모두가 행복을 원합니다
아무도 고통을 원하지 않죠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무지개를 볼 수 없어요
새까만 도로를 질주하던 버스가 강한 브레이크를 밟는다. 바짝 뒤를 쫓는 차량마저 하나같이 붉은 등을 낼 때, 한 손으로 가방을 낚아채 버스 밖으로 뛰어나가는 내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꿈꾸던 세상 밖으로.
Oh My Rainbow
Kiss me hard in the pouring rain
Chapter. 12
<Take Me To Your World>
‘I Love U, Whoever U Are’
-HALF SWEET-
#47.
쉴 틈 없이 달렸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 방울을 그대로 삼키고 미끄러운 길을 겨우 되짚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이대로 가다간 심장이 먼저 터져 죽겠구나 싶을 만큼. 신호를 찾지 못해 무작정 도로를 침범한 운동화는 여린 눈꽃을 매단 채 끝없는 길을 내달렸다. 그제야 오롯한 얼굴을 떠올렸기에, 마지막 시곗바늘 뒤로 켜켜이 묻어두려 했던 예쁜 목소리를 되감았기에.
-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
……
- ‘그냥, 번호 맞나 확인 차.’
……
- ‘……나도 메로나 좋아해.’
홀로 감내하는 것이 누구보다 익숙한 그가, 속을 내어 주기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주는 일이 더 편한 그가, 복잡한 굴레에 길들여져 서서히 자신을 잃어버리던 그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 ‘다 기억해. 너만.’
……
- ‘도망치고 싶을 때, 어디든 같이 가줄 내 편이 생겼으니까.’
……
- ‘네가 있어야 내가 살아.’
우는 방법을 몰라 울지 못하던 아이가, 그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던 아이가 마음을 열었다. 외면하려 했으나 그러하지 못한 나는 끝내 가슴을 쳐댔다. 아아, 충분히 아파할 수 있음에도 억지 부리는 사람아. 난 그를 그렇게 불렀다. 왜 울지 못하는지, 그동안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는지 이따위의 질문들은 이젠 중요치 않다. 그는 또 다른 나였으며, 사실 나 또한 상처에 대해 섣불리 울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차가운 과학실에 홀로 앉아 있는 그를 보는 순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확연한 승패가 갈리는 현실의 울타리 속, 타인이 표식 한 그늘에 엉겨 붙어 가늘게 숨만 쉬고 있는 내 손을 잡아줄 단 하나의 구원자가 바로 이지훈, 너였음을.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둠이 깔린 건물은 짙은 새벽의 틈을 말했다. 숨이 터질 듯 가빠지는 호흡에 허리를 숙였다. 거칠게 들썩이는 그림자는 세상에 떨어진 적막함에 외로움을 떨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텅 빈 품 안으로 가득 눈꽃을 담는다.
- ‘우리, 그때 만날까.’
……
- ‘기다릴게.’
앙상한 가로수에 눈꽃이 박혔다. 푸른 달무리는 곧 익숙한 길을 따라 옅은 빛을 내렸다. 수천 번을 오르고 내리던, 처음 그를 본 장소이자, 내 모든 것이 담긴 공간이었다. 선명한 것은 오직 발자국이 전부인 세상, 학교 운동장을 헤매다 문득 뒤를 되짚어 보지만 깊이 파고드는 아릿한 겨울만이 들어찰 뿐이었다. 차마 어쩌지 못하는 나는 운동장 구석에 그대로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냈다.
지훈아…… 지훈아……. 갈라진 목소리에 안개가 베인다. 어쩌면 이런 결말이 가장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부터 이 이야기의 끝은 정해 져 있었을지도 모르지. 흔히 말하는 해피엔딩은 현실에서는 절대 잡을 수 없는 한낱 가상 장치에 불과하니까.
종국의 발자국은 자취를 감추고, 더불어 흐느끼는 음성도 눈발에 묻혀 서서히 먹혀들어 가는 순간이었다. 흐린 가로등 아래, 호박 등으로 물든 흔적이 내게 향한다.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실루엣. 까만 코트에 물든 익숙한 그림자에 덜컥 마음이 놓이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 “지각이야, 너.”
- “…….”
- “시험은, 잘 봤어?”
오늘이 끝나면 사라질 것만 같았던 나는
- “답 찾기 전에 샤프 굴렸지.”
그 길고 긴 시간 끝에 네가 있어서
- “코카콜라 한 것 같은데 표정이.”
마지막일 것 같던 그 순간에 여전히 네가 있어서…….
- “나 진짜 한 번도 안 쉬고 달려왔어.”
- “…….”
- “너 보려고…… 네가 정말 보고 싶어서…….”
있는 힘껏 그를 껴안고 얼굴을 묻는다. 갑작스런 포옹에 방황하던 상대방의 두 팔이 제자리를 찾는다. 넓은 품 안에 묻은 고개를 들어 어엿한 얼굴을 마주하자, 그는 허리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뉘였다.
- “이제야 듣네.”
- “…….”
- “진짜 마음.”
그동안 아파한 모든 것들을 위로하는 목소리였다. 이제 아무 데도 가지마. 갇힌 거야 나한테. 잘 가다 종종 엉뚱한 곳에 대화를 빠트리는 입술이 둥근 곡선을 그린다. 이내 예쁜 보조개가 패인 두 볼에 서늘한 손을 얹고 입을 맞추는 날 그대로 받아들이며 지그시 눈을 감는 그였다. 귓바퀴에 새빨간 열이 돋는 건 사계절 내내 같은 아이였다.
지훈아, 얼굴 빨갛다. 추워서 그래. 귀가 터질 것 같아. 일교차가 심해서. 핑계 아닌 핑계를 부리는 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다 느닷없이 터진 웃음에 한 발 뒤로 물러나자, 그는 내 손을 그러쥔 채 전보다 더 깊이 입술을 파고들었다. 눈꽃 사이 피어난 두 사람의 안개가 새벽을 따라 흩어진다. 이윽고 프리지아가 베인 숨결은 곳곳에 남아 잔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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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솔직히 많이 힘들었어요. 나는 왜 이렇게 아프고 외로운지, 애초에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괴로웠고 고통스러웠어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외줄을 탔어요. 아무런 장치 없는 곳에서요. 죽은 은수의 얼굴을 만지는 그 순간에도 앞만 봐야 했어요. 은수 없는 내일을 빼곡히 채워야만 하는 비열한 책임감에 시달렸으니까요.
사실, 제게 ‘산다’라는 건 책임감이었어요. 은수를 대신해서 살아야 한다, 약속을 지키려면 꼭 버텨야 한다라는 의무감이라고 말하면 더 편하겠죠. 늘 어중간함을 달고 다니던 저는 학업에 있어서든 관계에 있어서든 역시나 애매했어요. 웃지도, 그렇다고 울지도 못하는 모습이 싫어 거울을 피한 적도 있었고, 이게 다 너 때문이라며 은수를 원망한 적도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든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 말하는 어른들은 아직도 모를 거예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은수 머리맡에 국화를 놓고 우는 승관이를 위로하고 또한 비참한 세상을 견디려 애쓰는 지훈이를 그리는지.
시간은 기억을 잊게 하지 않아요. 단지 받아들이는 걸 달리해줄 뿐이죠. 그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진흙에 파묻혀 질식하고 싶었던 저를 있는 그대로 껴안아 주었던 사람이자, 여전히 그리운 사람이 되어 버린 사람이요.
4월의 봄이 가고 7월의 여름이 오고, 그리고 10월의 가을이 가면 어느새 다시 익숙한 계절이 돌아오겠죠. 그리고 매년 겨울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그 사람이 생각날 것 같아요. 물론 이 라디오도 문득 생각날 것 같아요.
제 이야기가 부디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길 바랍니다. 너무 지독하고, 외롭고, 항상 혼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도 실제로 그대 옆을 묵묵히 지키는 가족이 있고, 같이 걸어가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혹시라도 아무도 곁에 없다 생각이 들 때, 적어도 이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낸 저만큼은, 지금 라디오를 듣고 있는 본인을 언제나 응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잘 견뎌왔고 또한 수고했다 미리 말하고 싶었어요. 현재 아픔이 인생을 마무리 짓는 굴레가 아닌, 또 다른 삶의 시작을 알리는 터닝 포인트라 생각해 주세요. 그리고 지금 제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 여러분께도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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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계는 새벽 두 시를 향했고 그녀의 사연도 끝을 향해 갔다. 끝을 알리는 피아노 음악과 함께 창문 밖 너머 스탭의 사인이 비춰졌고 새벽을 녹이는 조슈아의 음성이 마이크를 탔다.
- “오늘 이 사연을 마지막으로 읽어드리고 싶었어요.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이지만 누군가는 이제야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내일을 위해 꿈을 꾸는 시간이기도 하니까요. 여주 씨의 이야기로 청취자 여러분들도 많은 생각을 하실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지금 그렇거든요.”
50초가량 남은 시간을 확인하던 조슈아는 엽서 끝을 매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 “개인적인 질문이지만, 여주 씨가 여전히 그분과 함께인지 궁금해요. 그분을 ‘그립다’라고 말씀하신 게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신입생이라 하셨으니 혹시 같은 대학에 가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실 제가 캠퍼스 커플을 정말 부러워하거든요 하하. 여주 씨, 듣고 계신다면 저희 라디오 게시판에 짧게라도 올려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
- “그럼 여주 씨가 신청하신 ‘제이레빗’의 ‘요즘 너 말야’를 끝으로 DJ 조슈아는 내일 다시 올게요. ‘Falling In Music’ 가족 여러분, 오늘도 예쁜 밤 되세요.”
스크린으로 비치는 핸드 사인에 조슈아는 헤드폰을 벗으며 답을 보냈다. 스피커 밖으로 퍼지는 노랫소리가 점점 사그라질 때, 새벽을 비추던 ‘On-Air’ 등도 서서히 빛을 잃었다.
*
라디오 볼륨을 줄인 손마디가 소파 위 웅크린 등을 쓸어 내린다. 상대방의 체온에 스러지듯 품에 안겨 온몸 가득 들어오는 프리지아 향을 느낀다. 지훈아. 지훈아.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하얀 셔츠를 적신다. 그는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 가까이 얼굴을 맞댄다. 가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듣는 것이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우리는.
오늘은 좋은 꿈만 꾸고 싶어.
그럴 거야.
언젠가 우리에게 처음 다가왔던 벚꽃은 어느덧 잎을 만개해 올해의 창가에 기댔다. 조용히 잠을 청하는 듯 봄바람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홀연히 나부끼던 커튼은 잠잠히 벚꽃 나무를 지켰다. 하늘 가득 수를 놓는 불꽃에 넋을 잃는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조차 꿈 같아 부디 깨지 않길 빌며 깊게 눈을 감았다.
깨워 줄게.
……
예쁜 꿈 꿔.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OMR 카드를 갈아치웠을까.
찢기고 찢긴 오답투성이 사이에서 우린 어떻게 견뎌왔을까.
다음을 향해 걷는 이 길에,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발끝을 당기고 가시로 찌르며 마침내 겁박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제 더 이상 나 혼자가 아닌 이지훈, 그 아이와 함께라는 것.
열아홉을 끝으로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았던 내게, 그가 오랫동안 나를 위해 그려왔던 예쁜 무지개 하나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두 눈을 들어 그것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이미 내 세계에 머물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있었다.
너와 내가 그리며 서로의 세계를 연결하는 단 하나의 고리.
OH MY RAINBOW
우리들의 이야기는 지금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