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손애
꿈을 꾸었다. 여렴풋하고 아련한 어린 시절 이었다. 그 짧은 기억은 손으로 쓰다듬을 새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봄동산 위의 일렁이는 수선화와 진달래가 발목을 스치니, 그 여린 간지러움에 달리던 발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마마, 옹주마마!, 누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작은 두 사람이 겨루듯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어서 와서 저 아래를 보거라! 너무나도 예쁘지 않느냐? 작고 올망한 입술로 말하였다. 제 목소리에 헐떡이며 올라오던 그들은 이내 제 옆에 서 있었다. 봄내음이 콧잔등을 두드리고 지나갔다. 우리의 어린 시절이구나, 우리의 어린 시절은 이토록 푸르렀구나. 진득이 눈을 감았다 뜨니 신기루를 본 듯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이런 꿈을 꿀만큼 푹 자본 적이 언제였는지 가늠하다 작게 웃음이 났다. 꿈마저 제대로 꾸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며 잠을 청하는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른한 눈을 뜨니 윤기와 태형이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
" 네, 제가 쓰러졌나봅니다. "
" 정국선비가 전하를 이곳으로 뫼시었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
태형의 걱정어린 목소리와 윤기의 대답이 한데 겹쳐 왔다. 그래, 기억이 난다. 그보다, 너는 다치지 않았느냐? 제 말에 태형이 불쑥 끼어들어 윤기의 팔을 잡고 들어보였다. 옅은 색의 도포가 찢어지고 붉은 선혈이 이곳 저곳 물들어 있었다. 미안해 지는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윤기의 손을 잡았다. 네가 고생했구나.
" 전하를 지키는 것이 저의 일이옵니다. "
" 그래도 조금은 네 몸 걱정을 하거라. 네가 다치면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느냐. "
" 예, 전하. "
윤기의 건조한 대답이 오히려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차라리 건조하거라, 아파서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것 보다 그게 훨씬 나으니. 태형은 연신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비님, 그리 바라보시면 제 얼굴이 닳으니 그만 보십시오. 저의 농에도 태형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멎쩍은 얼굴로 태형을 바라보니 제 두 손을 스스럼 없이 꼭 잡아왔다. 당혹감을 비추자 더욱 더 세게 잡아왔다.
" 걱정했습니다, 정말로. 혹 전하께서 다치지는 않으실까, 전하의 손을 놓치고 나서 많이 자책하였습니다. "
" 저는 괜찮으니 그러지 마세요. "
" 송구합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정말로…. "
"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다 제가 자초한 일이지 않습니까. "
" 그런 말씀 마십시오. "
태형이 꽤나 미안한 얼굴로 연신 사과를 하니 받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잡힌 손을 바라보자니 어색한 침묵이 방 안에 흘러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정국선비는 어디 계십니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제 말에 윤기는 일어나려는 나의 팔을 부축했다. 밖에 계시니 불러드리겠습니다, 앉아 계시지요. 태형의 말에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니요, 마침 답답했으니 나가 보려 합니다. 윤기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오니, 제 옷을 널고 있던 정국이 저를 돌아보았다. 윤기의 손을 놓고 천천히 다가가려니 여전히 현기증이 가시지 않은 것인지 다리에 힘을 줄 수 없어 휘청였다. 정국은 그런 저에게 달려와 저를 부축해 주었다.
" 깨어 나셨습니까. "
" 저를 이 곳 까지 데리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
" 땀을 많이 흘리셨기에 옷을 갈아입히고 빨아 놓았으니 다 마르면 입으십시오. "
" 갈아 입혀요…? "
" ㅇ,아, 이 민박의 여주인에게, 제가 그런 것이 아니옵고, 빠는건 제가… . "
" 하하, 농을 부린 것에 어찌 그리 당황하십니까? "
저의 말에 정국이 동그란 눈으로 나를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농을 친 것 가지고 무척이나 진지하시네. 저의 투덜거림에 그는 결국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저의 도포를 모두 널어놓고 나의 팔을 잡고 마루에 앉혔다. 편히 앉으니 붉게 물들어 가는 노을이 도성에 내려 앉는게 보였다. 이 곳 까지 저를 업고 올라오셨습니까? 저의 물음에 정국은 저와 같이 노을을 바라보며 끄덕였다. 봄이었구나, 눈앞에 펼쳐진 언덕 위의 꽃들이, 나의 꿈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전하, 기억 나십니까. 정국의 물음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만 같았다. 그래, 그 것은 비련한 꿈만이 아니었다.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하여서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옅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느꼈다. 정국에게서 나는 난초의 향이 들에 핀 꽃 향기 보다도 더 짙게 다가왔다.
" 기억 납니다. "
" 다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
" 저를 누이라 부르던 그 목소리가 지금의 그대와는 많이 다르지요. "
" 전하. "
" 사실, 모두 잊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그대를 모른 척 한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전부 잊을 만큼 아프게 살아서, 따뜻하던 기억은 모두 잊어벼렸습니다. "
" 면목이 없사옵니다. "
" 어린 시절에는 우리가 꽤나 사이가 나쁘지 않았나봅니다. "
" 저는 그 때부터, 아직도, 앞으로도 전하의 편입니다. "
" 그런 말 마세요. 당신의 집안과 나는 대치 중인걸 알지 않습니까. "
" 저와는 별개가 될 수 없는 것이겠지요. "
" …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
" 제가 권세도, 집안도, 아버지도 모두 버리고 전하의 손을 잡는다 하면. "
" … … . "
" 그 때에는 저에게 어린 시절처럼 웃으며 저의 이름을 불러 주실 것입니까? "
노을이 내려앉고 밤이 도성을 덮었다. 정국의 말이 심장을 쿡쿡 찔렀다. 섣불리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 저를 이용하라는 정국의 말에 덥석 그러자고 할 수 없었다. 나의 여린 추억에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고민조차 할 수 없는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나는, 나의 추억보다도 정국에게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 저의 집으로 전하를 모셔 가면 불편하실 듯 하여 이리로 왔습니다. "
" … 그대는 나를 너무 잘 아는군요. "
" 전하는 변한것이 없으니까요. 그때의 기억이라면, 분명 이 곳에서 마음 편히 쉬실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
정국은 까만 하늘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보다 한참이고 작았던 그 아이가 이제는 저보다 한 척이나 더 크게 자라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정국의 상투를 튼 머리를 어루만질 뻔 했다. 허공에서 머무는 손에 정신을 차리고 손을 거두려 하자, 정국이 나의 팔을 붙잡고 머리로 가져갔다.
" 쓰다듬어 주십시오. "
" ㄴ, 놓으세요. "
" 왜 안되십니까, 여전히 제가 전하를 해하려 하는 그자들과 다름이 없어 보이십니까? 저는 그저 누이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철없는 아우입니다. "
" 지금의 우리는 이래서는 안되는 것을 모르십니까? "
" 모르지 않기에 더욱 표현하는 것입니다. "
저의 손을 잡고 있는 정국의 손은 따뜻하기만 하였다. 흔들림 없는 올곧은 눈길에 결국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리 바라보지 마세요. 그토록 애처롭게, 그 기억들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얼굴로 바라보지 마세요. 정국이 나를 현혹하는 것이 틀림 없다며 마음을 다독였다. 잠깐의 기억에 흔들려 내가 만들어 가던 일들을 모두 무를 수는 없었다. 철 없던 시절의 기억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아프게 자란 나에게 작고 둥글게 자리잡아 모난 나를 다듬어 주었다. 기억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 그 긴 세월의 차가운 궁중 생활을 버티게 해 주었다. 그 중심에는 정국이 있었고, 나의 벗 윤기가, 그리고 내가 있었다. 어색해지는 침묵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도 들어가 보세요, 오늘 들었던 말들은 전부 못들은 것으로 할테니 그 어디에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 마세요. 제법 단호했던 저의 말투에 정국은 씁쓸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저만 붙잡고 있겠습니다, 그 때 저를 끌어주던 전하의 작은 손. "
정국이 내뱉는 숨들을 애써 무시했다. 그저 일순 동요했던 감정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단어들을 곱씹고 곱씹으면서.
***
한여름 밤의 꿈은 정말 한순간에 끝이 났다. 궁인들 모르게 잠행을 나갔다 변을 당하였으니 궁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사라진 왕을 찾아 궁은 발칵 뒤집어 졌다. 어린 여왕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쳤다는 수군거림이 도성 내 저잣거리까지 퍼졌다. 말의 고삐를 고쳐 잡고 궁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바삐 했다. 대신들의 입이 너무나도 가벼워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았다. 소론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좌상의 편만 들고 이판에게 호통을 치던 어린 군주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자락도 들리지 않았다. 간신배들, 결국 나의 어리석음이 저들만 좋은 일을 만들어 준 꼴이 되었다. 급한 마음에 고삐를 더욱 세게 당기자, 말이 놀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저도 말과 함께 고꾸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서 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사고만 치는 제 자신에 화가 났다. 말에서 떨어진 저에 놀란 세 사람을 위해서라도 아픈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정국은 빠르게 말에서 내려 나를 부축했다. 제 말에 오르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정국의 걱정서린 목소리에 손을 저어보였다. 되었소, 나는 윤기의 말을 타면 되니. 정국은 윤기의 말로 향하는 나를 더이상 붙잡지 않았다. 괜스레 정국의 시선으로 뒷통수가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운검, 내 자리가 있겠는가?
" 물론입니다. 어서 오르시지요, 전하. "
" 불편할 터인데, 미안하구나. "
" 아니옵니다. "
태형은 고꾸라진 제 말을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저어보였다. 전하, 이 아이는 함께 갈 수 없을 것 같사옵니다. 태형의 목소리에 안쓰러운 눈으로 제 말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으니 궁으로 돌아가는 즉시 마부를 불러 저 아이를 데리고 가 치료하라 일러야겠습니다. 서두르시지요. 제 말에 태형과 윤기가 말에 다시 올라탔다. 속도를 내어 달림에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제 등 뒤에서 들리는 윤기의 숨소리에 문득 어제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 윤기, 그 때 기억하느냐? "
"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
" … 너와 나, 어릴때. 봄동산에 오르지 않았느냐. "
" 예, 기억 하옵니다. "
" 그 때, 전정국 저자는 어땠었느냐? "
" … 어떤 것을 물어 보시는지요.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저 자의 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
" … 글쎄. 나도 너에게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구나. "
" 저 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
" 어째서? "
" 전하를 바라보는 눈이 어릴 때와 진배없이 똑같은 것을 모르십니까? "
그렇구나. 짧은 대답에 대화는 끊어졌다. 그렇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상참(매일 짧게 열리는 약식 조회)* 시간이 한참 지났기에 대신들의 반발이 클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곧바로 사정전으로 향했다. 나의 늦은 등장에 사정전을 나서던 대신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마뜩잖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길을 애써 무시하고 회대에 올랐다. 상석에 앉으니 그제야 나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제 자리로 돌아왔다.
" 전하, 조회에 늦으셨사옵니다. "
" 미안하게 되었소. "
" 잠행을 나가시려거든 조금 더 준비해서 나가시지요. "
이판, 이판은 내가 내어준 숙제는 잘 해 오셨소? 나에게 나무라듯 말하는 이판에 웃으며 물었다. 이판은 그런 내게 동요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이옵지요, 전하. 그의 얼굴을 보니 온 몸에 벌레가 기는 듯 하였다. 그래, 지금의 이판을 보니 충실히 수행한 것 같군요. 이판은 거만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낭창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신들은 나의 차림새에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잠행을 나가느라 했던 남장 차림으로 돌아온 여군주라, 이또한 세간으로 입을 놀릴 것이 자명했다.
" 조회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내가 잠행을 나간 것이 도성 내에 파다한 것을 보니 이 안에 쥐새끼 한마리가 있는 듯 합니다. "
" 전하, 그러한 말씀은 삼가 주십시오. "
" 아, 방금 과인이 한 상스런 말도 밖으로 옮기실 겝니까? "
" 그런것이 아니오라, "
" 여기에는 한낱 궁녀만도 못한 사람들 뿐인가봅니다. 대신들은 온실수가 무엇인지 아시지 않소? 혹, 모르시는건 아니지요? "
" 모를 리가 있겠사옵니까. "
" 모를리가 있겠냐? 그럼 그리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이판이 대답해 보시오. "
' 온실수를 말하지 말라는 것은, 궁중이나 조정의 일을 절대 밖으로 전파하지 말라는 뜻이옵니다. "
" 그 것을 잘 아는 자들이 이러시오? 그동안은 과인이 그 사실을 알고도 눈감아 주었으나, 오늘에서야 크게 느낀바가 있기에 철저히 지켜보도록 하겠소. "
" 전하, 어찌 대신들을 믿지 못하시고 이리 나무라시나이까. "
" 과인이 어리석어 그런게지요. 믿지 못하고 나무란다? 그대들이 내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
"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
"대신들이야말로 통촉하여 주시게. 앞으로 하고픈 말이 있거든 내게 따로 와 하시오. 오늘은 조참(월 5, 11, 21, 25일에 하는 정기조회)*이 아니니 먼저 일어나 보겠소. "
조회가 끝났지만 그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바보같은 사람들. 눈에 훤히 보이는 약아빠진 속셈에 성큼성큼 내려와 이판에게 다가갔다. 이판의 어깨에 손을 올려 힘주어 눌렀다. 당신의 그 야망, 내가 모를 줄 아시오? 그리 노골적이게 내비추지 않았으면 모르는 척 넘어가 줄 수도 있었을 터인데. 이판의 섣부른 판단이 과인을 일께워 주었소. 참 고마운 일이 아니오? 저의 속삭임에 이판은 타오를 듯 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지금이라도 그리 봐 두어라. 속으로 비죽 웃으며 이판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 쳐주었다. 대신들은 눈으로 소리없이 수군댔다. 저들의 눈에는 지금, 감정 하나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으로 보일 것이 뻔했다.
" 내 그대들을 위해, 기꺼이 폭군이 되어 드리리다. "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전쟁의 시작, 제대로 된 선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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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가 잠들었어요.
앞으로 직장이 생기면
매일매일 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 점 죄송하게 생각하고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소중한 독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