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손애
" 어서오세요, 주상. "
" 어찌 부르셨나이까, 대비마마. "
" 대비라니, 그리 차갑게 부르지 마세요. 어머니란 좋은 말이 있지 않사옵니까? "
" 제게 하실 말이 있거든 어서 해주세요. 있기 거북합니다. "
" 용건은 내가 아니라 이자에게 있지. "
문안도 제대로 오지 않으시고, 이 어미는 주상께 서운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어미에게 신경을 써주세요, 주상. 어머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남준을 노려보았다. 남준은 그런 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용건이 무엇인가? 제 날 선 목소리에 남준은 눈을 위로 치켜뜨며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전하, 전하께서는 이판의 아들과 혼인하실 수 밖에 없사옵니다. 제가, 그리 만들 것이기 때문이지요. 괜한 힘 들이지 마시고 따르시지요.
" 일개 말동무 주제에 내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
" 본디 미천한 것들이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법입니다. "
" 네 주제가 하찮은 것은 잘 알고 있나보구나. "
" 제 비록 신분은 미천하고 출신은 죄인의 자식이나, 배운것의 깊이는 얕지 않고 머리는 비상하니 이 곳 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
" 제 입으로 잘도 말하는군. 허나 너의 그 잘난 재주로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나의 국혼이지. "
" 간과하지 마십시오 전하, 방심은 금물입니다. "
" 그래, 어디 네 놈의 대단한 계획을 들어 줄 테니, 말 해 보거라. "
" 제가 어찌 전하께 입을 놀릴 수 있겠나이까? 거창하게 계획이랄 것도 없이, 그저 세간의 여론이 모두 전하께 불리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말씀 드릴 수 있사옵니다. "
" 하, 세간의 여론이라. "
" 최근에 전하께서 대소신료들께 하신 말들과 행동들이 백성들의 입에서 화자되고 있다 하옵니다. "
" 순전히 내 백성들을 위한 일이었다. "
" 백성들은 무지하고 쉽게 휩쓸리지요. '
" 무어라? "
" 전하께서 말하시는 배운 것 없는 천한 것들이라, 여론만 잘 형성하면 곧이 곧대로 믿어버리는 무지한 자들이란 말입니다. 전하께서 일전에 폭군이 되겠다 하신 말씀, 와전이라면 와전이겠지만 노론 세력만 끼고 도시다가는 이대로 백성들의 믿음을 깨버리기 쉽지요. 백성들에게는 노론과 소론, 그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것이 중요한 것인지는 안중에도 없으니 말이지요. 다만, 왕이 한 세력만 집중적으로 키우려 들고 폭군이 되겠다며 대소신료들에게 협박한 것이 알려진다면… .저희 소론은 그 것을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군주를 몰락하고 끌어내리지는 못하나, 군주의 국혼은 소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겠지요. "
" 협박하는 것 치고는 거창하구나. "
" 협박이라니, 당치 않사옵니다. "
" 어머니도 참 대단하십니다, 집안의 성공이 그리도 궁하셨습니까? "
" ㅈ, 주상 … . "
" 제가 왜 대비마마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는지 아십니까? 그 더러운 야망으로 피를 흘린 사람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칼은 저에게 겨눠졌지요. 오로지 당신의 성공을 위해,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당신의 집안을 위해! "
" … …. "
"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도 그저 어여쁜 옹주나,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세력을 키우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요. "
" …그런 말씀은 삼가세요. "
" 듣기 거북하십니까? 저는 그 긴 세월 도구로 쓰일 날만 기다리면서 얼마나 거북했을까요. 어미의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해,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남준이 저를 따라 일어났다. 웃는 얼굴로 고개숙여 저를 배웅하는 그 얼굴에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니 그는 두 주먹을 꾹 쥐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상처를 모두 자신이 받기라도 한 얼굴로.
***
"함부러 찾아와 송구하옵니다. "
" 괘념치 마세요. "
" 제 아비가 밉습니다. "
" 효자인줄로만 알았는데, 못하시는 말씀이 없네요. "
" 전하, 저들의 계획대로라면 전하가 위험해 지시옵니다. "
" 위험할 수 밖에 없는 자리이지 않습니까. "
저의 달관한 말에 정국이 나의 팔을 잡아왔다. 그를 바라보니, 처연한 눈으로 나를 안아주고 있었다. 그의 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어 벅차는 숨을 애써 삼키며 팔을 빼내었다. 곧 백성들이 간신배들의 세치 혀에 홀려 전하를 해하려 할 것입니다. 그 전에 손을 쓰심이 마땅합니다. 정국의 진심이 연못으로 넓게 퍼졌다. 그를 믿기에는 나는 겁이 많은 겁쟁이었다. 걷으로는 대범한 군주인 척 행동했지만 자신있는 일이 단 한가지도 없었다. 겁이 났다. 아는 것이 없어 혹여나 제 욕심이나 고집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될 까 걱정되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자리에 풀썩 앉아버렸다. 정국은 그런 제 옆에 천천히 앉아 나의 손을 잡았다. 제가 방법을 강구해 내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떨리는 손으로 정국의 손가락을 꾹 잡았다.
" 제가 전하를 돕는다는 것은 아버님의 목에 칼을 들이 미는 것입니다. "
" 불효를 행하겠다 하시는 것입니까? "
" 부강한 나라를 위해서라면, 응당 그래야겠지요. "
" 너무 위험합니다. "
" 저를 걱정하시는 것이거든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 그대는 내게 한없이 한결같네요. 그런데도 저는 여전히 그대를 믿지 못하겠습니다. "
" 태형, 그 자를 불러주십시오. "
" 어찌 그러십니까? "
" 소론 세력을 죽이시려거든 노론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저의 계획을 태형 그자에게 넘길 것이니, 그 자의 손을 잡으세요. "
" 소론이 죽으면, 정국 그대도 죽습니다. "
" 어찌 되어도 상관 없습니다. 전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싶습니다. 이판의 아들이 아니라, 전하의 백성인 전정국으로. "
" … … . "
" 후회하지 않을 것이니, 태형 그 자를 불러주십시오. "
또, 저 흔들림 없는 눈길. 부서진 바람이 정국의 향을 실어 내 가슴에 꽂혔다. 모른 채 할 수 없는 마음이 괴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알 수 없이 요동치는 나의 마음도, 그 때의 어린 시절도, 모든것이 정국을 향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보필하던 방내관을 불러 태형을 입궐하라고 이르라 했다. 정국은 서있는 저를 올려다 보았다. 지는 노을에 눈이 부셔 찡긋거리는 얼굴마저 눈에 담아냈다. 한참이고 서로를 바라보다, 정국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밀어진 나의 손에 깨질 듯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잡아왔다. 전하, 지켜드리겠사옵니다. 그의 말에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래요, 지켜주세요. 옅은 숨을 내뱉듯 속삭였다. 속에서 올라온 불안감을 드디어 밖으로 토해냈다. 그의 믿음으로, 그의 마음 덕에.
***
" 밖이 소란스럽구나. "
"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킨다 하옵니다. "
" 시작 되었구나, 벌써. "
" 전하, 조금 더 눈을 붙이시지요. 아직 묘시(새벽 5시~7시)*도 되지 않았사옵니다. "
" 태형, 그 자는 아직 한양에 당도하지 않았다더냐? "
"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외조부의 상을 급히 마치고 올라오고 있다 하옵니다. 오는 즉시 궁으로 입궐하라 하였으니 걱정치 마시옵소서. "
" 그에게 큰 짐을 지게 해야 하다니, 마음이 무겁다. "
" 부마가 되실 분이신데 어찌 그런 걱정을 하시는지요. "
" 부마는 정치에 뜻이 없어야 하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 "
" 하지만 전하의 뜻을 이루시려거든 그 방법 뿐이옵니다. "
" 그래, 처음부터 소론을 죽이기 위하여 끌어들인 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자를, 이토록 잔인한 싸움에 뛰어들게 한 것이 신경쓰이는 것 뿐이야. "
" 전정국 그 자를 좀 더 믿으십시오. "
" 방내관은 정국 그 자가 마음에 드나보구나. "
" 충언 고맙구나, 깊이 새기마. "
백성들의 노기가 궐 담을 넘어 나의 가슴까지 뛰게 만들었다. 시끄러운 궐 밖의 상황에 매일 아침 거르지 않던 상참(아침 조회)*도 취소하였다. 조수라(아침 식사)*도 물리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히 상소를 읽고 있자, 태형과 정국이 당도하였다는 말에 서둘러 그들을 안으로 들이었다. 비장한 얼굴로 들어오는 정국과 잔뜩 굳은 채로 저의 상태부터 살피는 태형에 저도 절로 긴장이 되었다.
" 태형 선비,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
" 늦어서 송구하옵니다, 전하. 헌데 궐 밖이 어찌 이리… . "
" 그 것 때문에 선비를 불렀습니다. "
" 예? 그 것 때문이라니요? "
" 과인이 소론을 배척하고 노론을 끌어안으니 소론이 그 것을 빌미로 여론을 조장하고 있소. 가엾은 나의 백성들은 제대로 된 판단조차 하지 못하고 봉기를 일으키고 있소. "
" 제가 어찌 도우면 되겠사옵니까? "
태형은 의지에 찬 얼굴로 물었다. 그에게 묘책을 말해주기가 꺼려졌다. 나로 인해 다치기는 너무 여리고 고운 자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지 못하자, 정국이 먼저 입을 열었다.
" 태형 선비님, 이 곳으로 곧 성균관의 장의(현대의 학생회장)*, 박지민이 올 것 이옵니다. "
" 박지민이라면, 저의 절친한 벗이 아니옵니까. "
" 그 자와 함께 거사를 논의 할 것입니다. "
" 거사라 하심은… . "
" 성균관 유생들의 유소행렬(유생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을 빙자하여 탕평책을 펼칠 것이오. "
" ㅈ, 전하. 탕평책을 유생들의 유소행렬로 시작하신단 말씀입니까? "
" 예, 앞에서 정국 선비가 말씀하신 그대로 입니다. 내가 나서서 조정 신료들 앞에서 탕평을 논한다면, 그 것 또한 그들이 기회로 삼고 여론조장으로 이어지겠지요. 그러니, 묻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는 성균관 유생들의 유소행렬을 시작으로 탕평을 펼치자는 것입니다. 궐 밖은 과인이 소론을 내치고 노론의 손만 잡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차라리 유생들이 과인에게 탕평을 펼치라 상소를 올리면 결국 제가 원하는 것의 반은 얻은 셈이 되지요. "
" 소론 죽이기…. 죽일 수 없다면 묻어 두자는 것이군요. "
" 예. 그렇습니다. 허나 선비께서 원치 않으시면 이 일에서 빠지셔도 되니, 너무 부담을 가지지 마세요. "
" 아니요, 제가 할 것 입니다. "
태형은 제게 대답하며 정국을 바라보았다. 일종의 선망과 의리가 아닌 경쟁의 눈빛이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은근한 기류에 입이 말라 왔다. 성균관 장의는 언제 오나, 속만 까맣게 태우니 그제야 당도하였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성균관 장의는 얼떨떨한 얼굴로 들어서다 저를 보고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 ㅈ,전하…! "
" 고개를 드세요. 그대가 성균관의 동장의, 박지민이시오? "
" 그렇사옵니다, 전하. 미혹한 자를 어찌 알현하시옵니까. "
" 내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이리 번거로이 불렀소. "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 동장의는, 지금 궐 내부와 궐 밖의 상황을 어찌 생각하시오? "
"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조정의 대신들은 온실수를 도성 내에 퍼트렸고, 백성들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아니하고 봉기를 일으키고 있나이다. 소인은 한낱 유생에 불과하오나, 장차 전하를 곁에서 보필하고 나라의 녹을 받는 신하가 될 자이옵니다. 전하께서 소인과 유생들에게 행하라 하시는 일이 부도덕 하거나 백성들과 나라에 해가 된다면 유생들은 그 일을 할 수 없사옵니다. "
" 아주 바른 길을 걷고 있군요. 과인이 그대에게 하려는 말은, 탕평책에 대한 것이오. "
" 탕평책… … !! "
" 그렇소. 소론을 죽일 수 없다면, 잠재우는 수 밖에 없지요. 비록 노론의 세력도 함께 주춤 할 것이나, 나의 어리석었던 지난 날들의 판단을 바로새울 수 있고 백성들의 민심을 안심시킬 수 있는 것이라 사료되오. "
" …제가 어찌 하면 전하를 도울 수 있겠사옵니까? "
" 유소행렬을 해주시오. "
나의 말에 지민이 꽤나 놀란 듯 저를 바라보았다. 제 옆에 앉은 정국과 태형의 굳은 표정을 보곤 그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명 받들겠나이다. 그의 대답에 참았던 숨을 한번에 토해냈다. 어질해진 머리에 서둘러 그들을 내보냈다. 태형은 나가는 지민의 손을 잡으며 다시 한 번 이번 거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뒤돌아 나가는 정국에 급히 그의 도포자락을 끌어당겼다.
" 선비, 그대는 이 일에서 빠지는게 좋겠습니다. "
" 어찌 그러십니까. "
" 이 일의 배후에 그대가 있는 것을 안다면, 그대를 불효로 처벌을 꾀해도 나는 그대를 지킬 수 없습니다. "
" 상관없습니다. "
" … … . "
" 전하를 지키기 위한 일에, 한 치의 실수와 머뭇거림도 용납치 않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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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탈출 했더니 글쓰는게 조금 버겁습니다.
하지만 독자님들의 댓글에 힘을 얻어 글을 써요.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소중한 암호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