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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선] 우리에게 끝은 없다 0 1 | 인스티즈




생의 어느 저녁










 김주영이 시골생활을 해보자고 했을 때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이 년 째 별다른 의사표시 없이 살고 있었다. 그즈음 김주영은 편집 사무실과 인쇄소를 정리하고있던 차였다. 그는 두어 곳의 지방대학으로 출강하던 강사 일을 그만두고, 인쇄소를 낸 뒤, 몇 년 여동안 일에만 파묻혀 지냈다. 그리고 일이 궤도에 오를 쯤 편집, 인쇄업은 금세 사양 산업이 되었다. 사무자동화 시스템과 컴퓨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에 김주영의 사정을 알게 된 한 대학 동창이 한적한 바다를 낀 지방 도시의 서점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 바로 앞에 자리한 서점으로 자신의 친구 형이 칠 년 동안이나 운영해왔다고 했다. 그 친구의 형은 캐나다 이민을 가게 되어 서점을 내놓았는데 점원을 세 명쯤 쓰는 규모이고 대학 교수들과 관계가 좋아 교재를 많이 취급하며 출판사와 도매점과도 오랫동안 거래를 터와 신경쓸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방학이 끼어 있어 몇 개월은 매상이 비겠지만 그 외의 달은 수익도 아주 안정적이라고 했다.


 김주영은 처음부터 서점에 호감이나 무슨 기대를 가졌던 건 아니었다. 달리 방법은 없었다 해도 아직 젊은 나이에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유배지 같은 지방 도시에서 가게나 지키는 삶을 받아들일 사람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김주영이 시골집을 염두에 두게 된 건 의사의 진찰 결과 떄문이었다. 김주영이 시골 이야기를 꺼낸 것도 함께 병원에 다녀온 그날 밤이었다.


 의사는 나의 두통과 불면증, 낮잠을 만성적이고 극단적인 조울증 결과로 생긴 무력증으로 진단했다. 그리고 폐쇄적인 아파트의 가정생활이 병을 약화시킬 수도 있으니 환경을 바꾸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김주영은 나의 병을 납득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두통약과 수면제를 과용하고 있으며 증세가 심각하다는 점을 진작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부동산 업자와 처음 그 마을로 가던 날은 3월이었다. 초봄인데도 시골 풍경은 아직 겨울 같았다. 댐 공사를 하고 있는 비포장길 중간쯤에 수몰된 텅 빈 마을이 있고 그 마을들을 지나자 도예 단지가 나왔다. 그 뒤로 주홍색 기와지붕의 사택들 몇 채와 포도밭이 이어졌고 모퉁이길을 돌자 계곡안의 마을이 드러났다.


“ 완전히 새집인 탓에 마당도 정리가 안 되었고, 대문도 안 달려 있지만 오백 평 대지에 건평 사십 평 집이 이 정도 가격이면 아주 싼 거죠. 땅값만 쳐도 만만치 않아요. 마당은 내년 봄에 잔디를 깔아도 좋고, 아니면 바로 석분을 두어 트럭 갖다 부어도 좋고, 대문만 하나 달고, 그렇게만 해도 집 가치가 완전히 달라지죠. 뒤는 작은 동산이고 앞은 낮은 언덕이니 담장은 칠 필요도 없어요. 전망이 대단히 좋죠. 집을 바로 사겠다는 결정을 정말 잘한 겁니다. 규제가 많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땅 사서 건축 허가 받아서 짓는 거, 그거 아직은 말도 못 하게 성가신 일입니다. ”


 산골 마을들이 보통 그렇듯이 버스가 서는 길가에 양철 지붕을 잇댄 방앗간이 있고 맞은편 길가엔 담배 가게와 공중전화가 설치된 좁다란 기와 지붕 집이 있었다. 부동산 업자는 하루에 세 번 버스가 들어온다는 포장길에서 우회전을 해 윗마을로 오르면서 언덕을 향해 서둘러 손짓했다.



“ 저 집이예요. 언덕 위에 있는 집 중 두번째 검은색 벽돌집. ”



 높은 산 언덕바지에 저녁의 사양을 받고 있는 새하얀 두 집 사이에 주황색 지붕이 덮인 검은색 벽돌집이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해가 지는 무렵이어서 이제 막 가로등 불이 켜졌고, 마을의 집들도 차례로 불을 켰다. 하늘에 돋는 저녁 별들처럼 아직은 빛을 발하지 않는, 그저 그 집엔 사람이 산다는 신호를 보내는 듯한 가냘프고 창백한 빛들. 마을 아래 계단식으로 펼쳐진 보리밭은 어스름 속에서도 환영처럼 밝은 초록빛이었다.



“ 저 언덕에 지금은 집이 세 채뿐이지만 옛날엔 열다섯 호도 넘는마을이었지요. 나비가 워낙 많아 마을 이름이 나비 마을이었어요. ”



 마을을 지나자 다시 포장되지 않은 길이 나타났다. 그 언덕길을 따라 키 작은 노파가 검은 염소 두 마리를 끌고 구르듯이 위태롭게 내려오고 있었다. 노파가 차를 피해 길가에 멈추자 염소들도 가장자리로 붙어섰다. 매마른 품덜불 같은 재색 머리카락과 판화 칼로 그은 듯한 굵은 주름살들. 부적의 글자처럼 불길하고 추상적인 얼굴 표정. 반으로 접힌 굽은 허리. 저녁빛에 무슨 색깔인지 알 수 없는 낡고 두터운 스웨터와 몸빼 위에 짙은 색의 몽당치마를 입고 버선과 털신을 신은 모습이었다.


 그때 분명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노파의 흐릿하게 뭉개진 얼굴과 나의 얼굴이 겹쳐지는 한순간 노파의 얼굴에 실린 부적이 스르르 풀려 나에게 씌워지는 느낌…. 그것은, 알아챘다 해도 소용이 없는, 알아챈 순간 이미 피할 수 없게 된 우리들 운명에 어리는 암회색 너울 같은 것이었다. 저녁처럼 어두운 긴 너울이 커다랗게 뜬 내 눈 속으로 펄럭이며 지나갔다. 차가 노파와 염소를 천천히 비켜가는 동안 목을 빼고 노파를 쳐다보았다. 불길한 예감의 독특한 맛처럼 입 안의 침이 쓰디쓴 맛으로 변해버렸다.


 사무기기가 정리되고 전세금이 해결되자 김주영은 서점을 계약했고 미리 보아둔 집을 구입했다. 집은 도시의 끝 쪽 대학 앞의 서점에서 약 사십 분 거리였다. 늘 그랬듯이 김주영의 결정에 대해 나는 무반응이였다. 처음 마을에 들어갔던 날, 염소를 몰고 내려가던 노파를 보았을 때의 그 불가해한 고통과 두려움의 얼룩이 내 가슴을 짓누르던 기억이 생생한데도.






 이사를 한 뒤론 아침에 잠이 깬 뒤 후와 김주영을 보내고 다시 누워도 잠이 들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덮인 망막에 내 몸 속이 비칠정도로 정신이 맑았다. 나는 깨어 있는 채로 집 안을 서성댔다. 자동차 지나다니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깔깔거리는 소리도, 전화벨 소리도,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기척도 없었다. 이따금 새소리가 들리지만 새소리가 들리면 새소리의 간격 사이사이로 나만 남겨두고 세상이 아득히 사라져버린 듯 더욱 적요했다. 세상이 이렇게 고요할 수가 있을까? 혼자 중얼거려보았다. 그 적요는 아주 독특했다. 마치 노래를 지워버린 빈 테이프가 돌아가는 것처럼. 흡사 이제 네가 노래할 차례야, 라며 고요히 기다리는 것처럼.


 후도 이사한 후 한동안은 혼자 현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무서움을 많이 타서 밤이면 늘 내 곁에 달라붙어 잠이 들었다. 내가 앉은 소파에서 잠들거나 아니면 나의 침대로 기어들었다. 후는 남자아이답지 않게 마음이 여리고 피부가 유난히 희고 생김새가 섬세하며 야윈 편이었다. 자칫 심한 응석받이가 될 가능성도 많은 아이였다. 나는 후가 잠들 때까지 냉정했다가 잠들고 나면 배에다 얼굴을 대고 냄새를 맡아보고, 볼에 입을 맞추고, 머리와 얼굴에 입을 맞추곤 했다. 


 아침에는 김주영이 출근길에 후를 태워주었고 마치는 시간인 오후 세시에는 내가 태우러 가야했다. 나로서는 중요하고 일정한 일과가 한 가지 생긴 셈이였다. 이사를 한 뒤로 생필품은 김주영이 사왔다. 나는 오 일마다 선다는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 생필품을 살 수 있는 농협이나 마트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가 저녁이면 냉장고를 활짝 열고 그 속에 있는 재료들로만 반찬을 했다. 나는 아무 재료로나 반찬을 만들어 먹듯, 아무 프로그램이나 끝날 때까지 보며 후에게 이것저것 묻거나 지시했다. 쓰기 숙제는 했느냐, 유치원에서 무엇을 공부했느냐, 친구는 사귀었느냐, 마음 상한 일은 없었느냐고 건성으로 묻기도 하고 방을 그만 어지르고 이 닦고 세수하고 잠자라는 소리들.


 후가 잠든 뒤엔 텔레비전을 끄고 양치질을 하고 몸을 끌다시피 해 침대로 가서 누웠다. 어느 땐 저녁 설거지조차 못 할 때도 있었다. 세상은 노래를 지워버린 빈 테이프처럼 고요하고 마음속에는 늘 아아아,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런 때면 수면제를 먹고 무겁고 검은 커튼을 닫듯 눈을 꼭 감아버렸다.


 김주영이 서점 문을 닫고 사십 분 거리를 달려 도착하기 전에 나는 어김없이 잠든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김주영은 이따금 침대 앞에 의자를 끌어당기고 앉아 흙으로 만든 인형처럼 굳어버린 나의 얼굴을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런 때면, 그의 체취가 부드러운 비단처럼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다름아닌, 부드러운 비단 아래서 나의 얼굴이 금간 도자기처럼 깨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천천히 달리던 차가 서버린 곳은 계곡길 한 가운데의 외딴길 앞이었다. 차는 어느 순간 공기가 쓰윽 빠져나가는 듯 공허해지더니 거짓말처럼 서버렸다. 여기까지야, 하고 마지막 숨을 쉰 것도 같았다. 다시 엑셀을 밟아보았다. 헛것을 만지는 듯한 기묘한 느낌. 갑자기 기억이 삭제되듯 현실감이 사라져버렸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으니 모퉁이길에서 트럭이 구름 같은 먼지를 몰고 나타났다. 강팍하고 왜소한 운전기사가 굳이 고개를 빼고 차안에 갇힌 나를 위협하듯 내려다보았다. 나는 흙먼지 속에 내려서 차를 밀어 길 한쪽으로 붙였다. 트럭은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영문을 모르니 막막하기만 했다. 무턱대고 계속 걸어나가면 학교에 도착할 것이지만 후를 만나 정류소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려 마을로 들어서는 버스를 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길 가운데 세워진 차에 관한 한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다행히 시간은 아직 넉넉했다.


 나는 도움을 청해 볼 생각으로 산을 휘도는 모퉁이길 쪽과 길가의 외딴집을 막연히 쳐다보았다. 외딴집의 허물어진 담장가에 무성한 넝쿨을 뻗은 라일락꽃이 만개해 있었다. 집엔 기척이 없었고 길도 오랫동안 텅 빈 채였다. 흡사 번화한 거리에서 아이를 잃었을 때 같은 괴괴함이 엄습했다. 아무래도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빈집 같았다. 나는 빈 집에 호기심을 느끼며 감나무들을 지나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세 개의 방문과 부엌문은 꼭 닫혔고 마루에는 가족 사진이 든 액자가 거울 위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나는 바싹 다가가 액자를 들여다보았다. 액자의 테와 유리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아기 돌 사진, 남자의 증명사진, 누군가의 결혼식 사진, 그런 사진들 속에서 액자 가운데에 꽃다발을 든 남자아이와 목과 소매에 새하얀 털이 장식된 붉은 코트를 입고 은은하게 웃는 여자의 사진이 돋보였다. 여자는 마름모꼴의 얼굴에 눈썹이 초사흘 달처럼 휘어졌고 눈망울이 커다랗고 명랑한 인상의 얼굴이었다. 집의 여주인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급박한 일이 있었기에 살림을 고스란히 두고 단숨에 집을 나가버렸을까…….




 석분을 휩쓸고 달려오는 차소리를 듣고 나는 황급히 빈집을 빠져나와 달려오는 흰색 차량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차 안의 남자와 나의 눈이 속도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날카롭게 부딪혔다. 차는 나를 조금 지나 석분 쓸리는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먼지가 좀 가라앉자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려서더니 다가왔다.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얼굴이 작은데 비해 코는 오똑하고 눈이 유난히 번쩍이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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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오늘 어제 읽은 글을 곱씹으며 매일 연재되는거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도 올라와서 기분이 좋네요. 글이 생각을 구체화시켜주는 느낌이라 항상 흥미롭게 보고있습니다 작가님.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매일이 아니여도 좋으니 편하게 연재하시길. 아 글을 읽다보니 약간 오타가 있는데 혹시나 확인하실지 모르겠어서 댓글로나마 알려봅니다. 잘 읽고갑니다.
11년 전
독자2
글 쓰는 실력이 정말 대단하신것 같아요, 이런 김주영 선수의 빙의글이나 글이 아니여도 충분히 멋진 글인것 같습니다 꾸준히 지켜볼게요:)
11년 전
독자3
진짜 금손이에요 작가님.....장난아니다 진짜..ㅜ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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