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미운 놈
01. 다시 시작된...
강다니엘 그 녀석과 나의 관계는 개와 고양이, 물과 기름, n극과s극으로 정의된다.
'잘생기고 착하고 친절한, 선배와 동기는 환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거란다.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 널 보는 애들은 더 실망할거 아니야.'
같은 새내기 주제에 선배인척 내게 충고를 하던 옹성우에게 망설이지않고 주먹을 날려주고는 야무지게 가방을 챙겨들고서 집합장소에 왔는데, 불과 1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옹성우의 말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희가 새내기구나하고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선배도, 어른스러움을 풍기는 선배도 없었다. 그저 경영학과 18 새내기 맞지?하는 목소리 뒤로 동기들이 있는 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내가 있을뿐이었다.
‘거 봐 내말이 맞았지?’하고 얄밉게 웃는 옹성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이제 20살이니까, 성인이니까하는 기대를 품고 마주한 동기들은 아직 19살의 모습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고학번으로 보이는 선배마저도 그랬다. 말을 할때마다 나오는 거친 욕설들과 말에는 아직 십대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외적인 모습은 이미 어른이고 성인이었다. 요즘은 다들 일찍 화장을 하고 자신을 꾸미기 시작했기에, 새내기라고해서 서툴고 이상한 화장이나 패션을 보이는 애들은 거의 없었다. 이미 자신과 어울리는 화장법, 스타일을 잘 알고 있기에 잘난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대학가면 이쁘고 잘생긴 사람이 많다고 하던데, 정말 다들 그랬다. 편한게 최고라는 옹성우의 말에 넘어가서 후드티에 청바지 그 위에 추위를 막아줄 롱패딩을 입은 내 모습이 유독 초라해보였다. 그래도 이 와중에 메이크업은 하고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안녕, 혹시 마이쭈 좋아해?와 같은 대화들이 오고가던 고등학생때와는 달리, 무슨 고등학교 나왔어?, 고향이 어디야?, 왜 여기 지원했어? 화장품 어떤거 써?와 같은 대화들이 오고갔다.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야 되는가하고 고민하던 것들이 무색해질만큼 금세 친해졌다. 공통의 관심사와 같은 과라는 소속감이 있어서 그런건지, 한 살 더 먹었다고 사람을 사귀는데 더 능숙해져서 그런건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이거 입학선물로 엄마가 사준거야, 우리나라에 딱 3개밖에 없는 거래.”
“오늘 민현오빠 저녁에 오신다더라, 드디어 그 잘나신 얼굴을 볼 수 있어”
처음으로 친해진 친구라고 말하기는 아직 어색한 동기인, 이리현은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남자에 관심이 많았다. 이 나이 또래면 당연히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주제이긴 했지만 이리현은 유독 더 관심이 많은 듯 했다. 덧붙여서 자랑하는 걸 좋아했다. 명품에 관심이 없는 나는 이리현이 들고 있는 가방이 고가의 명품인지 쇼핑몰에서 구매한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이리현은 내게 ‘한번 들어 보게 해줄게.’라며 가방을 내밀었고, 살짝 들고나서 응, 역시 비싼거라 그런지 다르다. 라는 말을 하면서 이리현에게 급히 가방을 돌려주었다. 우리나라에 3개밖에 없는 가방이면 셀 수 없을 만큼의 0이 뒤에 붙을 게 분명했기에, 7주일 동안 혼자 집안 청소를 도맡은 후에 5만원을 받을 수 있는 내가 감당할하기에는 손이 심히 떨리는 수준이었다.
난 명품백보다는 집에서 만화책보면서 치킨먹는게 더 좋은데, 나와 취미부터 성격까지 하나도 맞지않을 것 같아보이는 이리현의 모습에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올라왔으나, 예쁘다는 내 말에 숨기지 못하고 좋아하는 모습에 잘 지낼 수 있지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티 그런 걸 왜 가냐, 몸만 상해 몸만. 오티 갈 돈으로 그냥 나랑 치킨시켜먹자니까’
오늘따라 평소 개소리만 해대던 옹성우의 말이 구구절절 맞는 말로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듣는 척이라도 할 걸 그랬나. 연희는 재밌었다고 하길래 나도 그런 줄 알았지. 옹성우의 말이 맞을지 내가 알았나. 이건 다 옹성우탓이다. 평소에 맞는 말을 했으면 내가 좀 귀담아서 정성스럽게 들었을 거 아니야, 맨날 입만 열면 필요없는 말만 하니까 내가 또 그냥 넘긴거지. 하여튼 도움이 안되요, 도움이.
그라데이션으로 치솟는 짜증에 옹성우에게 시원하게 욕을 날려주고는 톡방을 나왔다. 따지고보면 옹성우잘못은 없지만, 또 따지고 보면 잘못이 있었다. 곧이어 ? 하나가 액정에 뜨는 것을 확인하고는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옹성우도 더는 톡이 없었다. 내가 이런적이 한두번이 아니니 그러려니하고 넘기는 것 같았다. 뭔가 갑자기 내가 굉장히 쓰레기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피구, 몸으로 말해요, 실내게임과 같은 것들로 오티의 막을 열었다. 게임을 위해서 선배들은 많은 준비를 한 것인지 한게임이 끝나면 곧바로 또 다른 게임을 시작하였다. 버라티어티 예능 지옥에 같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편하게 누워있는 작고 귀여운 선배의 모습에 나도 편하게 드러눕고 싶다는 욕구가 목까지 올라왔지만,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선배들을 노고를 생각하며 열심히 몸을 굴렸다.
"여주야 너무 무리하는거 아니야?"
"아니에요 열심히해야죠"
"그런 태도 좋아. 이따 저녁에도 기대한다"
서늘한 실내임에도 열심히 뛰어다닌 탓에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공들여한 화장 다 지워지겠네. 화장마저 지워지면 새벽에 과자가 먹고싶어서 마트에 뛰어온 사람의 몰골이 될게 뻔했기에, 서둘러 소매를 살짝 빼내 이마를 닦았다.
열심히 이마를 톡톡 두드리고 있으면 스케치북을 든 채 걸음을 옮기고 있던 주연선배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곤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했다. 아까부터 저녁을 계속 강조하는 게, 밥을 건너뛰고 그냥 잠을 자야하나하는 생각을 했다.
'여주야 오티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술이란다. 뭐 그건 앞으로 있을 4년동안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런데 여주는 주량이 어떻게 되니?' 심히 주당스러운 주연선배의 모습에 나도 술로는 어디 나가서 빠지지않음에도 불구하고 저녁이 되는 게 두려워졌다.
"와...대박 저 선배 원래 저렇게 빠르신 분이었나..?"
"술 좋아하시나봐 귀엽다."
아까 전에 게임을 할 때만 해도 구석에서 늘어지게 누워서 내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성운선배가 저녁시간이 되자,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보다 신나게 움직이셨다.
"그럼 우리 이제 시작해볼까?"
"좀만 더 기다려 넌 민현이 오면 먹어, 맨날 너 때문에 술 부족하다고!"
신나게 술병을 까던 하성운선배의 손이 찰싹하고 떨어지는 주현선배의 손에 멈추었다.
"언니, 누가 또 와요?"
"어, 리현이 너 못 들었어? 오늘 사정이 있어서 늦는다던 새내기 2명 데리고 민현이가 오기로 했는데 이제 곧 올거야. 참, 민현이는 나랑 동갑이야. 14학번"
리현이가 주연선배에게 물어봐준 덕에 궁금증이 풀렸다. 눈치를 보니까 나랑 리현이 둘만 몰랐던 것 같았다. 잠깐 표정이 안좋아진 주연선배가 곧 웃으며 새내기 둘과 민현선배랑 함께 온다는 말을 해줬고, 대답을 들은 리현이는 한껏 들뜬 얼굴을 하였다.
"드디어 민현오빠가 오는 구나,"
"아, 낮에 너가 말했던 그 잘생겼다는 선배?"
"응“
얼마나 잘생겼길래, 이리현이 이렇게나 흥분을 하나싶은 마음이 들었다. 말하는 거 들어보면 얘 눈 되게 높아보이던데.
"같이 온다는 새내기에 다니엘도 있으면 좋겠다."
"다니엘?!....혹시...강..다니엘은 아니지?“
“맞는데 강다니엘, 어떻게 알았어? 하긴 유명하니까 여주 너도 알았으려나.”
리현이의 입에서 나온 강다니엘이라는 이름에 나도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나를 보며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며 말을 하였지만 동명이인의 동기에 기분이 다운되어서 아무소리도 들리지않았다.
설마...아니겠지 내가 아는 그 강다니엘은 아닐거야. 아니여야 돼. 아닐 수 밖에 없지. 걔는 애초에 이과 수재였고, 의대지망생이었으니까. 그래 강다니엘이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동명이인일뿐이야. 걔가 여기 들어오는 건 말도 안되는거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절대로 이리현의 입에서 나온 강다니엘이 내가 아는 강다니엘 일리가 없었는데, 이상하게 불안했다.
"애들 데려왔어. 하성운 넌 벌써 한잔했냐?"
"....헐"
아닐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주연선배의 눈을 피해서 술을 까고 있는 성운선배를 따라서 같이 홀짝이고 있는데, 갑자기 찬 공기와 함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좀 작작 좀 마셔라, 니가 새내기냐.“
“여, 술은 어디있어?”
“친구보다 술 먼저 찾냐, 애들이 갖고 올라올거야.”
성운선배와 정답게 얘기를 나누는 이 존잘남이 민현선배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리현이 입에 침을 튀기면서 강조하던게 부족할 만큼 진짜, 완전 잘생겼기 때문이다. 키도 크고 목소리도 좋고 성격도 좋고, 대학로맨스물에서만 보던 완벽한 선배의 모습이었다.
-야 옹, 꿈이 아니고 현실에도 존재함. 존잘 선배님. 여기가 꿈이라면 여기서 집짓고 산다. 참고로 존예 선배도 있음
서둘러 옹성우에게 실존하지않는다는 선배의 실존을 알리고는 티나지않게 선배의 얼굴을 구경하였다. 뭘 먹고 살면 이렇게까지 잘생겼을까 싶을 정도로 잘생겼다.
힐끗 본다고 봤는데, 뚫어져라보고 있었던 건지 성운선배와 말을 하던 민현선배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얼떨결에 마주한 시선에 당황해서 '아..안녕하십니까!'하고 우렁차게 인사를 해버렸다. 옆에서 리현이의 애잔한 눈빛이 느껴졌다.
"그래, 안녕, 목청이 좋네"
"제..제가 원래 목청이 좀 좋아요!"
"벌써 마셨네. 야 하성운 니가 앞에서 술마시니까 후배가 마셔야 되는 줄 알고 마시잖아. 무리해서 안마셔도 돼, 얘가 억지로 먹이면 나한테 말하고."
와 사람이 이렇게나 다정할 수가. 벌써부터 술을 마시면 어떡하냐며 성운선배에게 잔소리를 하는 모습에 심장이 빨리 뛰는것같았다. 한번도 해보지않은 덕질을 시작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옹성우 덕질은 어떻게 하는 거니?
"안녕하십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빨리 뛰는 심장을 가라 앉히기 위해서 술을 더 열심히 들이키는데, 입구쪽에서 인사소리와 함께 뒤이어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와 대박 진짜 강다니엘이다. 헐 진심 미쳤다 실물이 더 대박이야! 옆에 애도 잘생겼다."
어깨를 마구 때리며 호들갑을 떠는 이리현이에게 맞은 어깨를 문지르며 입구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헐...??!! 지금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내 눈에 보이는 건 틀림없이 강다니엘이었다. 이름만 같은 강다니엘이 아니라 내가 아는 그 강다니엘이었다. 오-마이갓.
"이제 다 왔으니까 섞어서 앉아볼까"
강다니엘옆에 가서 앉자는 이리현의 말을 무시하고는 강다니엘이 먼저 자리를 잡는 것을 확인한 후,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강다니엘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고 재수없게도 녀석은 여전히 빛났다. 자주색의 촌스러운 교복을 입고도 살아남았던 강다니엘은 나처럼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었음에도 태가 달랐다. 평범한 옷도 찰떡같이 소화해내는 강다니엘의 능력은 대인관계에서도 통했다.
매일 얼굴에 웃음을 달고 사는 탓에 강다니엘의 무표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싸가지가 없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돈 많고, 공부 잘하고, 잘생겼고, 심지어 성격까지 좋은 강다니엘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확히는 나빼고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다니엘은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신입생 선서를 하는 순간부터 유명 인사였다. 사실 이미 중학생때부터 유명하였다는데, 나는 이날 강다니엘을 처음 알았다.
반에서 겉도는 친구가 없도록 반애들과의 단합을 도모하고, 애들이 기피하는 일을 나서서하고, 체육대회때면 운동장을 휩쓸고 다니면서도 전교권에서의 성적을 놓지않는 강다니엘은 싫어할 수 없는 사람이자 동경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도 강다니엘과 말을 섞기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시간이 당장 수학인데 깜빡하고 집에 수학책을 놓고와서 부랴부랴 옹성우네반으로 뛰어가서 수학책을 빌리려고 했는데, 칠판옆에 붙은 시간표을 가리키며 나도 다음 시간 수학인데. 라고 말을 하는 옹성우에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너네 수학쌤 책 안가져오면 수업시간 내내 뒤에 세워둔다며, 다음시간에 운동 잘하겠네"
"옹아 닥쳐줄래, 안그래도 다른반에 친한애가 없어서 지금 심란하니까."
"역시 김여주 인간관계 좁다 좁아. 김여주 속만큼 좁다."
오늘도 역시나 매를 버는 옹성우에게 응징을 해주고 나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나왔다. 또 교과서 안들고왔다고 말하면 이번에는 교실에서 쫓겨날것같은데...싫다. 아직 복도는 추운데. 난 왜 다른반 친구가 쓸모없는 옹성우밖에 없는 거지...
땅이꺼져라 한숨을 쉬며 복도를 걷는데, 열린 교실 앞문 사이로 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강다니엘의 얼굴이 보였다.
"강다니엘 진짜 착하더라. 나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내가 문학 못빌리고 있으니까 먼저 와서 빌려주더라"
문득 떠오른 수진이의 말에 4반 뒷문으로 가서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애의 등을 살짝 치며 저기 강다니엘 좀 불러주라.하고 부탁을 한 후에 기다렸다.
"너가 나 부른거야?"
"응.. 아, 저기 초면에 미안한데 내가 수학책이 필요해서 그런데 좀 빌려 줄 수 있을까? 진짜 아무 글자도 안쓰고 그대로 돌려줄게."
"싫은데"
"진짜 고마...응?"
"싫다고, 빌려주기"
너무도 멍뭉이같은 얼굴로 웃길래 당연히 빌려준다는 말인 줄 알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곱씹어보니 싫다는 말이었다. 설마 저렇게 웃으면서 싫다는 말을 하겠어?라는 생각에 응? 하고 되묻는데 친절하게도 한글자씩 천천히 싫다는 말이 돌아왔다. 덤으로 웃음기마저 지운 싸늘한 표정으로 말이다.
동기들과 선배들에게 둘러싸여 특히 여자에게 둘러싸여 웃음을 흘리고 있는 강다니엘을 보니 안 좋은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생각해보니 저놈은 처음부터 나한테만 불친절했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씨- 이중인격같은 놈. 수진이한테는 잘만 빌려줘 놓고. 외모로 사람 차별한다 이거지. 이런 거지같은 세상.
앞에 보이는 강다니엘을 안주삼아 씹으며 열심히 술을 마셔댔다. 강다니엘과 시선이 마주친다는 느낌이 들때마다 더욱 인상을 구기면 술을 들이켰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척을 해야지 대학생활이 편하다고 하던데 이미 못 먹는 척 하기에는 멀리 와버린 듯했다. 아 몰라, 어차피 저 자식이랑 동기인거부터가 꼬인건데 뭘.
"오, 여주후배 마음에 들어"
내가 앉은 조에는 성운선배가 있어서 지금 다른조에서는 열심히 진행중인 술게임을 하지않았다. 술게임을 못하는 나로서는 대환영이었다. 술 마실 시간도 부족한데 게임할 시간이 어디있냐는 성운선배의 말 한마디에 우리는 묵묵히 술병만 비워댔다. 아까 전 술을 보고 웃는 모습을 보고 주당일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더 주당이었다. 과연 주량이 어느정도일까.
소주를 맥주잔에 담아서 마시는데 뭐 거의 물 마시듯 술을 원샷해댔다. 오, 선배 존경합니다. 나도 오늘따라 술이 잘 받아서 성운선배의 리듬에 맞춰서 열심히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결과, 오로지 술로만 배가 빵빵하게 찼고 두 볼에서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래도 성운선배의 칭찬을 받았으니 좋은 건가.
"너무 많이 마시는거 아니야? 억지로 안 마셔도 돼"
"괜찮아요, 억지로 마시는 거 아니에요, 사실..저 술 좋아하거든요."
" 여주후배 내 술파트너야. 황민현 너 내 술친구 데려갈 생각 마."
존잘선배의 걱정에도 웃으며 술을 비워나갔다. 술이 들어갈수록 선배의 얼굴은 더 잘생겨져만 갔다.
"여주는 다니엘한테 안 가봐?"
"맞아. 다니엘때문에 천하의 황민현이도 찬밥 신세인데"
술에 취한 애들은 방에 들어가서 뻗거나 밖으로 나가면서 술자리가 흐트러졌다. 나도 바람이나 좀 맞고 올까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채고 '여주야 넌 내 술메이트야 끝까지 같이해야지'하고 말을 하는 성운선배에 다 수포로 돌아갔다. 방광이 터질 것같았지만 차마 오늘 처음 본 선배의 면전에 대고 지금 쌀 것 같은데요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그래, 이리현은 아주 강다니엘에게 빠져가지고 나는 안중에도 없고, 나가봤자 혼자인데. 성운선배랑 방광터질때까지 술이나 마시지 뭐.
방광을 포기한 덕에 예쁜 주연선배랑 잘생긴 민현선배와 가까워지는 선물을 받았다. 아직 세상은 살만한가봐요. 셋이서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니 잘 그려진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선배들은 왜 이렇게 이쁘고 멋지고 착한거죠? 오늘 오티 온거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아요.
강다니엘은 가리키며 왜 안 가봐?하며 묻는 민현선배의 말에 인상이 험악해질 뻔했는데 다행히 찬밥되었다는 주연선배의 농담에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민현선배의 얼굴을 보며 금세 안정을 찾았다.
"그냥 별로 친하고 지내고 싶지 않아요. 제가 미신을 잘 믿는데 강씨가 저랑 안맞다고해서..."
저 자식이랑 친하게 지낼바에는 옹성우랑 연애를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삼키며 가장 괜찮은 답변을 내놓았다.
"응? 여주 너 다니엘이랑 친하잖아. 다니엘이 너랑 고등학교때 엄청친했다던데?"
"네?!! 저 자식...강다니엘이 그래요?"
"응 아니야? 다니엘이 여주 너 얘기많이 하던데, 오랜만에 봤는데 자리가 멀어서 아직 인사도 못해서 아쉽다고 하면서"
"하하..그럴리가. 그냥 같은 학교 나와서 그렇게 얘기했나봐요. 전 친하게 지내는 강씨가 없아요..."
어쩐지 여동기들이 지나갈때마다 이상하게 나를 째려본다고 했다. 후..강다니엘 넌 정말 내 인생에서 한번을 도움이 안되는구나. 그냥 의대나 가지 도대체 왜 갑자기 정반대인 경영학과는 와가지고. 또 나랑 싸우자는 거니?
"선배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열이 확 올라서 붙잡는 성운선배에게 단호하게 말을 하고는, 열린 문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의 발에 걸려서 넘어졌...질 뻔하였다.
"괜찮아?"
넘어질 뻔한 나를 잡아준 것도, 일부로 내게 발을 건 것도 강다니엘이었다.
"괜찮으니까 이거 좀 놔줄래"
"여주야 아무래도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나랑 같이 나가자."
차마 동기들과 선배들의 이목이 집중되어있는데 강다니엘에게 쌍욕을 퍼부을수는 없어서 내 어깨에 팔을 올린 강다니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마구 찍어대는데 조금도 아파하지않는 모습에 더 짜증이 났다. 성운선배 제발 이놈한테서 구해주세요. 저 선배 술메이트잖아요. 마주친 성운선배의 얼굴을 보며 열심히 구조요청을 보냈으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게 마음에 안들었는지 고개를 외면하는 성운선배였다.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강다니엘의 팔을 걷어내려고 하는데 그보다 먼저 강다니엘이 나를 밀어버리면서 자신의 팔을 빼냈다. 참나, 누가보면 내가 먼저 붙은 줄 알겠네.
"니가 왜 여기있냐"
분명 짜증을 내야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지가 더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어대는 탓에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야! 그 그건 내가 할말이거든"
"그럼 하던가"
"씨 넌 의대 간다던 애가 왜 여기 있는 건데!!"
"말해주기 싫은데"
저 재수없는 표정은 여전했다. 재수없는 말빨도. 항상 나와 말싸움할때면 보이는 저 여유로운 표정까지도 말이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강다니엘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는듯했다. 더불어 앞으로 고달파질 나의 대학생활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