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집에 들어와서 씻고 나오자 다니엘과 지훈이 들어왔다.
왠지 꼴도 보기 싫은 마음에 그냥 방에 들어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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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한 것 같았느냐"
"감히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다니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틀린 말씀은 아니십니다. 다만..."
"다만?"
"그동안 여주님의 성향을 살펴본 결과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한 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성향을 가진 분들에게 그들의 존재가치를 폄하하는 발언을 하시는 행위는 상당히 비능률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 더."
"예. 말씀해주십시오."
"저 여자...가 맞는 것 같지?"
다니엘은 여주가 화를 내고 나가는 순간. 느꼈다.
이 여자를 어르고 달래고 구슬려 자신의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근거는 없었지만,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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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님..."
"바빠. 말 걸지마. 그리고 되도록이면 빨리 나가 줘."
"다니엘님이 어제는 실수를 한 것 같다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름답고 너그러운 여주님이 한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시면..."
"싫어."
아 회사가기 싫다..
일하기 싫다..
내내 싫다는 말만 하면서 회사에 갔다.
아 이직을 할 때가 된건가.
오늘은 짬날 때 헤드헌팅 사이트에 들어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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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다니엘은 티비를 돌려가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저 여인의 화를 풀어줄 수 있을까'
그 때, 멈춘 채널에서는 여심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여자들은 가끔 남자친구의 깜짝방문을 기다리기도 하죠?"
"물론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해요. 집에서 쌩얼일 때 찾아가는 그런 행동은 절대 금물!"
"일하는 회사로 퇴근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는 건 많은 직장인 여성분들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죠!"
다니엘은 패널들의 말을 들으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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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먼저 퇴근할게. 여주씨 수고해~"
오늘도 야근...야근...야근..!!!
진짜 죽고싶다 죽고싶어..
막내는 들어오지도 않고, 승진할 기회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고.
진짜 딱 이번 달까지만 하고 때려칠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타이핑을 하고 있는데,
"곧 때려칠 기세네"
"으악 깜짝이야!!!!!!"
옆자리에 그가 앉았다. 다니엘.
"오늘은 뭐야."
"신도 빨리 못한다는 단순업무. 타이핑."
"신이 못하는 건 없어."
세상에..미쳤나봐.
신들 사는 곳도 컴퓨터가 있나.
어쩜 저렇게 타자가 빠르지?
"끝났다. 가자."
"근데 왜 왔어. 요정이는"
"요정은 재워두고 나왔다. 하루종일 너 화풀어줄 궁리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길래."
"걔가 왜 고민을 해? 잘못은 너가 했는데."
"그래서 데리러 왔잖아. 퇴근시간 맞춰."
"뭐?"
"여인들, 퇴근 시간 맞춰 데리러오는 남자친구한테 감동받는다는데."
"남자친구가 데리러 오면 감동받는거지. 너는 그냥 우리집 거주자잖아"
"순서를 바꾸면 되지. 감동을 받고, 내가 당신의 남자친구가 되는걸로."
"뭐?????"
이 사람이, 아니 이 신이 미쳤나
"누가 내 남자친구야?"
"나!"
"하 참. 저기요.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당신 여자친구가 될 생각이 없어요."
"왜지?"
"당신에게 선택받는 순간, 당신에게 순종하게 된다고. 신이란 그런 거라고 요정이한테 다 들었어.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떻게 그쪽 여자친구가 돼?"
"요정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다니엘의 눈쌀이 약간 찌푸려졌고, 여주는 바로 눈치를 챘다.
"요정이한테 뭐라고 하기만 해봐."
"뭐라고 하면 어떡할건가"
"집에서 내쫓아야지"
"그정도라면, 요정을 소멸시켜야겠다."
소멸. 가장 끔찍한 요정의 말로.
천상의 질서를 거스르는 요정, 정령, 신에게 내려지는 처벌.
인간 - 요정 - 정령 - 신의 4순환 단계를 더이상 거칠 수 없도록 영영 매장시켜버리는 방법이다.
사멸보다 더 끔찍한. 소멸.
"소멸?"
"인간이라 그런가. 소멸의 의미를 모르는군. 요정에게 전해보거라. 어떤 반응인지."
**
"다니엘이 너를 소멸시켜버린다던데?"
요정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다니엘의 방으로 들어갔다.
뭐지..?
"여주."
한참 뒤에 문을 열고 다니엘이 나오며 나를 불렀다.
그 뒤로 보이는 광경은...요정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장면이었다.
"소멸이란, 저런거야. 저렇게 해서라도 피하고 싶은 것."
저게 신이야?
갑자기 약이 바짝 올랐다. 화도 났다.
"그 쪽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이렇게 당신을 위해 사는 애를 괴롭히니 신나? 재밌어? 어쩜 그렇게 가혹해? 신이 맞긴 해?"
"내 요정을 내가 처리하겠다는 거다."
"그래. 내가 그 쪽의 여자친구가 되었다면, 너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처리당했겠네. 나는 지금 저 요정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너의 처분만 기다리고."
"....."
"매정하다. 라는 말은 당신을 보고 만든 말 같네,"
멍하니 서있는 다니엘을 지나쳐서 요정에게로 갔다.
요정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제는 엉엉 울고 있었다.
아가같은 모습에 못내 마음이 쓰여 내 방으로 데려와 어르고 달래주었다.
소멸이라는 걸 구체적으로 요정에게 들어보니 이해는 안되지만 무서울 법 했다.
영혼이 처형당한다는 건 단순히 신체와 생명의 처형과는 완전 다르다고 했다.
고통은 4순환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보다 훨씬 강하고, 한번 소멸을 당하게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생명으로 탄생할 수 없다.
그게 생태계의 룰이라고 했다.
이제 자신은 끝이라며 요정은 밤새 울었고, 나는 다니엘을 회유할 방법을 생각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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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