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환상
제 21장 ; 봄의 환상 (完)
끝이 났다. 매정하게 닫혀 버린, 더 바라볼 수도 없게 사라져 버린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의 눈동자.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이던 원우가 천천히 무너졌다. 그가 들고 있던 칼도 서서히 소멸하기 시작했다. 버티지 못하고 뒤로 누워버린 원우는 눈을 꼭 감았다.
"아흐윽, 흐으..."
원우는 터져버린 눈물에 참지 않고 다 쏟아내기 시작한다. 원우의 울음소리만 주변에 서 있는 그들의 귓속을 가득 채운다.
고개를 숙여 땅만 바라보던 정한이 칼을 멀리 던졌다. 더 이상 무의미해진 칼을 가지고 있어봤자 무얼 하나. 가치를 다 한 무기는 곤두박질치기도 전에 그들의 눈에서 사라졌다.
"다 끝났어. 우리가 사라질 일만 남은 거야."
"..."
"너도 사라지기 전에 얼른 돌아가. 우린 널 보내줄 수 없어."
정한의 얘기에 승철은 몸을 틀어 그들을 향해 서 있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 꾹 깨물었다. 그들과 함께 싸웠지만 결국엔 그도 '영원의 공간'이 무너져야 살 수 있었으니. 승철은 너무 커져버린 죄책감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티스는."
"..."
"티스는... 이거 다 기억 가지고 가는 거예요?"
".. 아마."
"..."
조심스레 묻는 순영의 질문에 승철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자로 누워 꼼짝없이 누워있던 원우는 티스의 얘기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거칠게 손으로 쓸어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 지워줘요.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우리까지 다."
"..."
"그거 하난 해줄 수 있잖아요."
"..."
"당신.. 신이잖아."
원우는 눈물로 가득 젖은 목소리에 하나하나 힘을 실었다. 절대적인 존재. 승철은 이미 적어도 그들에겐 신이었다. 정한은 원우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지훈이를 떠나보내면서도, 티스를 억지로 밀어내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던 그가 흔들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그의 모습이었다.
미묘하게 흔들리던 땅이 점점 거세게 요동 치자, 승철은 밭은 숨을 내쉰다. 곧 확신에 찬 눈빛이 아이들을 향한다. 저의 정체를 다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말을 믿어줬던 친구들. 그래 이 친구들이라면. 어차피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눈곱만치도 없었는데.
승철이 순영의 눈을 마주치자, 별안간 순영이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지훈이 그랬던 것처럼 순영이의 형체가 점점 사라지자, 정한이 흠칫 놀라 순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으, 몸이 너무 무거워요.. 저도 이제 여기서 끝인가 ㅂ.."
"아니."
"..."
"권순영, 너는 이승으로 갈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정한이 승철에게 물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이승으로 다시 간단 말인가.
"권순영은 살아 있었어. 그래서 불완전한 존재였던 거야. 자신이 왜 왔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 거고."
"내가.. 살아있다고?"
"이승에서는 생사를 오고 가는 사람일 테지. 가서 새 삶을 살아."
"..."
"권순영 말고도 너희 모두. 전부."
승철의 말에 원우는 벙찐 얼굴로 쳐다봤다. 우리 모두?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이미 우리의 육신은 사라졌다.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인지, 무슨 의미로 한 얘긴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것은 정한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제정신이야? 그럼 지훈이가 우릴 위해서 희생한 건 뭐가 되는데? 너 우리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
"지훈이도 너희 곁에 머무를 거야."
"..."
"티스 기억도 지워줄 거고. 그냥, 그냥 내가 그렇게 해주고 싶어."
"망자를 함부로 다시 살려내면 안 되는 거 몰라? 너 어떻게 하려고 그래."
"상관없어. 너희들이라면."
"..."
"어차피 다시 돌아가도 내 마지막은 같을 거야."
승철이는 이미 그곳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결국 돌아가도 같을 거라는 말에, 정한이 따지려던 입술을 끝내 다물었다. 그런 정한을 보고 승철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슬하게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반짝인다.
"너희까지 전부 기억을 지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나도 여기서 많이 지쳤거든."
"바보. 우리 주변 사람들 기억까지 다 조작해야 하는 것도 생각하고 벌이는 일이야?"
"..."
"최승철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정한은 승철의 손을 살짝 잡았다. 자신의 힘도 보태려는 것이다. 승철이 당황해하자, 정한은 고개를 저었다. 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 없어.
원우마저 짓누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자 정한이 원우에게 물었다.
"원우야. 너의 기억은 선택에 맡길게."
"..."
"기억. 지워줘?"
".. 아뇨."
"그래. 그럴 것 같았어."
파이팅. 입꼬리를 작게 올린 정한의 말에 함께 웃던 원우도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곧 순영이가 사라지고, 원우도 세상에서 흔적을 없앴다.
그들을 다 보내고 덩그러니 남은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세상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제 이 손은 놓으시죠?"
"왜. 내 손잡을 기회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그냥 잡고 있어."
"..."
"사실 좀 무서워서 그래."
작게 떨림이 느껴지는 손을, 승철은 아무말 없이 고쳐 잡았다. 지도 좋으면서. 아니거든? 둘은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잠시, 점점 사라지는 세상을 구경했다.
"승철아."
"응."
"고마웠다."
".. 나야말로."
다음 생은 없으니 우리 인연은 여기서 끝이야.
고개를 주억거리던 둘은 서로를 마지막으로 훑은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또 꿈을 꿨다. 누군가와 함께 강가에서 노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꿈. 그 속엔 순영이도 있었다.
순영이와는 그때 벤치에서 만난 뒤로 정말 편한 친구가 되어 여전히 자주 순영의 병실에 놀러 가기 때문에 꿈속에 나오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 강가는 내가 그린 그림 속에 나오는 강과 똑같았다. 심지어 사람들까지. 그 안에서의 순영의 자리가 확연했다.
"순영아, 나 요즘에 내가 그린 그림이 꿈에 계속 나와."
"무슨 그림인데? 나도 보여줘!"
"이거. 웃긴 게 뭔지 알아? 이 사람이 너로 보여."
"어, 나도 여기 익숙한데."
그냥 유명한 곳 그린 거 아냐? 순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유명한 곳이 대체 어디냐고요. 내가 그린 거라고는 했지만 그 그림도 언제 그린 건지 기억이 도통 나질 않는단 말이다. 한숨을 폭 내쉬자 쩝- 입소리를 내던 순영이 다시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에이 민속촌이네~ 사람들도 다 옛날 옷 입었고, 너 거기서 쓰러졌다며! 이거 그리다 쓰러져서 기억 못하는 거 아냐?"
"너 민속촌 가 본 적 있어?"
"없어.."
뭐야, 정말.
순영이 재활 시간에 맞춰 나온 나는 근처 한강 산책길을 걸었다. 괜히 찝찝해진 마음 한구석에, 콧구멍에 바람이라도 쐐야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 어, 흰나비."
흰나비는 내 앞에서 빙빙 맴돌았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것 같은 날갯짓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그 흰나비 뒤를 따랐다.
노을에 비춰 연하게 주황빛을 띄는 흰나비는 춤을 추듯 나풀거렸다.
잠깐 멈춰 내 주변을 한 바퀴 돌던 나비는 따라갈 수도 없게 파도치며 앞으로 향했다. 나를 계속 찾아왔던 그 나비인지는 모르겠으나, 점점 멀어지는 형상이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 것 같아 '잘 가'라고 속삭였다. 나비는 더욱더 나아가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남자의 옆에 이르렀다.
"찾았구나."
남자는 그 나비를 한 번, 내 얼굴을 한 번 차례대로 보고는 말을 했다. 내 앞으로 우뚝 선 남자는 맑게 웃었다. 그 가운데서 넘실대던 나비는 내 얼굴에 한 번 닿고선 남자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했다.
"수고했어, 지훈아."
"..."
"고마워."
지금 누구한테 얘기하는 거야?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비는 강을 자신의 길로 삼아 날아갔다. 나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남자는 다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말했잖아. 내가 찾겠다고. 기다리겠다고."
'내가 찾을게. 너 올 때까지 내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순간 머리를 쿵, 맞은 기분이 들었다. 뇌의 파장이 크게 흔들리는 느낌이다. 갑자기 떠오른 말. 그것도 너무나 익숙했다.
동시에 떠오른 '지훈'이라는 이름. 잘게 부서진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맞춰지듯,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리고 드디어 맞춰진 하나의 퍼즐.
"원우.."
"..."
"전원우..."
그림은 꿈이 아니었다. 내가 겪은 현실이자 절대 잊고 싶지 않았던, 잊어버리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견디지 못한 눈물이 거세게 흘렀다. 어떻게 된 건지 물을 겨를이 없었다. 이 남자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찼다.
원우는 한 발짝, 한 발짝 걸어와 손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눈동자에 서로가 비친다.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