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환상
제17장 ; 비극
멈추지 않는 발과는 다르게 고개는 자꾸만 뒤로 향했다. 그들이 걱정됐다. 특히, 발을 다친 지훈이가 보이지 않아 마음은 더욱 불안했다. 인원이 더 많은 우리도 다 도망가기 벅찬데 순영이 혼자 지훈을 지키며 올라가기엔 벅찰 것이다.
간간히 튀어 나오는 '그것'들을 급하게 처치하느라 얼굴에 생채기가 군데군데 생긴 원우도 눈동자는 그 둘이 있는 곳에 머물렀다.
"원우야, 잠깐만."
"왜? 못 걷겠어?"
".. 지훈이한테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진심이야?"
"지훈이 지금 상태 알잖아. 가서 도와줘야 해."
예상과는 다르게 원우는 난처해했다. 아마도 이유는 나 때문일 터. 현실적으로 생각했을때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
결국 나는 최우선으로 지켜야 하는 사람이자, 짐이 된 꼴이다.
그렇다고 곤경에 빠진 그들을 두고 혼자 살 순 없었다. 온 몸을 날렸으면 날렸지, 어떻게 가만히 있어.
"너 진짜 큰일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
".. 응."
"..."
"죽더라도 여긴 구하고 죽을 거야."
"하,"
"지금 여기서 떠들 시간 없어. 원우야, 제발.."
원우는 말 없이 내 앞에 서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살며시 쥔 힘은 내가 서 있는 방향을 바꿔주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응. 절대."
자칫 탑 주변에 머무르는 '그것'들에게 들켜 오히려 지훈과 순영이를 위험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원우는 끝까지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도 자신의 동료를 지키고 싶었거니와,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했을 테지.
소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뛰며 원우는 뒤를 확인하고 나는 지훈이와 순영을 눈이 빠지도록 찾았다.
도대체 어디야. 어디 있는 거야.
시야를 방해하는 많은 나무들 속에서 저 멀리 검은 것들이 뭉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온 것을 눈치채고 몇몇이 흩어지며 다가오자 그 속에 숨어 보이지 않던 둘의 모습이 보였다.
"원우야, 저기에!"
"나 믿고 저쪽으로 뛰어!"
선명히 보이는 지훈이의 모습에 누가 공격하든 말든 상관없이 뛰어들었다. 막아주며 뒤따라오던 원우도 곧 순영이 옆에 서자, 지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얘기했다.
"미쳤어? 여길 왜 되돌아와!"
"이거 봐. 더 다쳤잖아. 너 이런데 우리가 어떻게 두고 가."
"야, 나는 이미..!"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빨리 내 손 잡기나 해."
지훈이 일어난 것을 확인한 순영은 재빨리 앞에 있는 것들을 상대하고 우리 곁으로 왔다. 올라가는 데 시간은 걸릴지라도 함께 하는게 낫지. 안 그래도 더욱 몰려오는 수에 힘들어하던 찰나였다. 가까이서 마주하니 '그것'들만 날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자신들의 감정을 찾은 상태에서 날뛰는 망자들까지 모두 우리를 노렸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망자를 지훈이 급한 마음에 한 손으로 베었다. 어깨를 많이 쓴 탓에 통증이 찾아온 모양인지 지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진다.
"야, 누가 누굴 지켜. 이렇게 위험한데 진짜 인간이 겁도 없어."
"돌멩이라도 던질 거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줄게."
"잔말말고 빨리 올라가."
내칠 줄 알았던 손을 오히려 꾹 잡은 지훈은 앞을 경계한 채 걸었다. 뒤에선 순영이와 원우가 그들을 쉴 틈 없이 상대했다. 그나마 수월하게 가던 길도 몇 걸음 걷지 않고 다시 멈췄다. 사방에서 더 많은 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진퇴양난이다.
나무들까지 있어 도망가기 더욱 쉽지 않은 상황에, 이들은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그것'을 상대하느라 망자가 크게 휘두른 칼을 차마 보지 못한 지훈을 안고 엎어졌다. 찰나의 순간에 위기를 모면했지만 가방 끈이 끊어져, 내용물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되는 영검의 조각까지 가방에 걸쳐 그들의 앞에 모습을 보였다.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뻗은 '그것'의 손을 순영이 베고, 재빨리 잡아 나에게로 던졌다.
"...!"
내가 받은 것은 낡은 조각이 아닌, 파란 빛을 머금은 단도였다. 분명 영검에서 눈을 떼지 않았는데, 그새 바뀌어버린 형상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전에 들었던 말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파란 빛이 일렁이거든 얼른 영검의 조각을 손에 쥐세요.'
파란 빛은 나지만 이미 영검의 조각이 아니라 칼로 바뀌어버린 후였다. 손잡이를 천천히 쥐니, 약하게 나던 파란 빛이 점점 세져 완전한 파랑을 띄었다.
혹시 이게, 영검의 진짜 모습인가.
이 검이 심판을 끝낼 수 있는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이 들어, 얼른 품에 안았다.
이미 변해버린 검을 본 '그것'들은 더욱 날뛰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수들이 점점 우리를 에워싸려고 했다.
얼른 일어나 지훈을 찾았다. 뒤에서 혼자 그들을 상대하며 버티다 한 순간 쓰러져 버리는 지훈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뛰어갔다.
"이지훈!!"
크게 손을 드는 '그것'을 향해 나도 모르게 품에 안은 칼을 휘둘렀다. 잠시 뒤 재처럼 흩날려 사라지는 것을 보고 떨리는 손으로 지훈을 부축했다.
"너..."
"지훈, 지훈아, 너 괜찮아?"
"스친 것 뿐이야. 이제 진짜 시간 없어. 빨리 안 올라가면 여기서 다 죽어."
".. 너 안 괜찮잖아."
검에 잠시라도 한 눈을 팔아버린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지훈의 붉은 옷이 더욱 붉게 물들고 있었다. 옆구리를 한 번 만져보던 지훈은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이렇게 당할 리가 없는데.
울망울망 눈물이 맺힌 내 얼굴을 쳐다보곤 지훈은 제 힘으로 다시 일어나 내 등을 밀었다.
"빨리.. 안 올라가면 다 죽는다고 했지."
주춤거리던 우리에게 온 원우도 지훈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무어라 말을 건네려 하는 것도 잠시, 금새 또 날뛰며 다가오는 저들을 상대하느라 원우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지훈의 손도 쉬지를 못했다. 가다가도 쓰러져 덮쳐 오는 나무들 때문에 넘어지기 일쑤였다.
차마 피하지 못한 나뭇가지들에 맞은 우리를 본 순영이 또 하나의 망자를 처리하자마자 달려와 거둬주었다.
또 다칠까봐 지훈을 감싸돈 것이 천만다행이다. 쓰라린 등을 매만질 새도 없이 지훈의 안부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좋지 못했다.
".. 왜 이렇게까지 우릴 구하려 드는 거야?"
"별 다른 거 없어. 구해주고 싶으니까 구해주는 거야."
친구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차마 목구멍을 통해 내뱉지는 못하고 꾹 삼켰다.
주변에선 원우와 순영이 우리에게로 접근하지 못하게 이를 악물고 싸웠다.
반대로 나 혼자 죽으면 모두가 편해질 것인데, 저를 위해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나라고 못할 게 뭐야.
".. 여긴 영웅놀이 하는 곳 아냐."
"설교는 제발 좀 이따가 해."
멍해진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기만 하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지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른 잡아.
지훈은 그 손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뭐해, 얼른 잡.."
"..!"
지훈은 잡은 손을 그대로 당겨 나를 넘어뜨렸다.
그리고 시야로 들어오는 지훈이와 망자.
떨리는 마음을 주체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 장면에, 입을 틀어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