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환상
제14장 ; 돌아가야 하는 사람,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
승철 씨와 똑 닮은 '그것'은 찾았다는 말과 함께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조금씩 내려가는 시선. 역시, 가방 속에 든 그 조각을 얘기하는 것이 틀림없다. 눈치챔과 동시에 가방을 꼭 쥐자, '그것'은 눈치가 빠르다며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
"그만하시죠."
위협적으로 행동하던 '그것'이 몸을 던진 승철 씨와 함께 바닥에 뒹굴었다.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노려보던 '그것'은 승철 씨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모른 척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자신을 감싸고 있는 승철 씨를 있는 힘껏 밀어내고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들을 탈탈 털어냈다.
그 틈에 원우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아이들 곁으로 온 나는 승철 씨의 반응에 이상함을 느꼈다. 무기를 빼들고 경계하는 보통의 경우와는 달리, 승철 씨는 아무런 방어 없이 직접 몸을 날렸다. 심지어 '그것'에게 말을 높이기까지 했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역시 그에게 마구 달려들지 않았다.
"이러고 있으라고 보낸 게 아닐 텐데."
승철 씨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우리를 등지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는,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설마 바보 같은 생각은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와 피 섞인 사람이 그런 창피한 짓거리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
"보아하니, 저 인간이 영검을 찾은 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
영검? 작게 읊조린 지훈은 금세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어깨가 움찔한 승철 씨도 뒤를 돌아, 내 가방 쪽에 시선을 두었다. '그것'은 재미있는 상황이라며 기분 나쁘게 큰 소리로 웃음을 토해냈다.
"멀쩡히 살아있는 인간이 이미 죽은 자들을 위해서 희생이라. 볼 만 하네."
"..."
"그렇게는 두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영웅 놀이하기 전에 우리가 없애버릴 거거든."
"..."
기대하마. 과연 어떻게 될지.
'그것'은 가방을 빼앗지 못해 아쉽다며 입맛을 다시고는 순식간에 나무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물론 나도 정신이 어지러웠다. 이렇게 갑자기 영검의 존재를 알리게 될 줄이야. 그건 다른 의미로 승철 씨도 마찬가지인 듯 숙인 고개는 다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이 중에서 정신 차린 정한 오빠가 말을 꺼냈다.
"일단 승철아, 네가 좀 상황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
"아니 일단,"
"넌 누구야..?"
목소리가 떨렸다. 함께 생활하고, 함께 그 험한 일을 겪은 사람에게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했다. 작은 떨림은 그대로 승철 씨에게 향해, 등에 꽂혔다. 더욱 고개를 숙인 그는 뒤돌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과 피가 섞였다, 그리고 여기로 보내졌다.
그래 당신은,
원래 이곳으로 온 사람이 아니었구나.
".. 그래, 맞아. 난 이곳 망자가 아니야."
"..."
"아까 본 그 자는 내 형. 그 점쟁이의 추측대로 심판을 이용해 이 세계를 아예 없애버리려고 하고 있어. 그 이유로 나도 이곳에 보낸 거고.
사실은 너희가 이곳의 관리자가 된 것도 형이 계획한 거야."
"그럼 당신은 뭐야. 신이야...?"
".. 비슷해."
"결국, 당신이 온 목적도 이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네."
원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를 꺼냈다.
짧은 시간 동안 믿고 따랐는데 마음속에서 울컥울컥 댔다. 배신감일까.
"내가 형과 똑같이 그런 목적이었다면, 아마 티스를 봤을 때 내가 먼저 처리했을 거야."
"다 알고 모른 척 한 거란 말이야?"
"너희를 감시하며 인간을 처리하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그래서 인간이 언젠가 올 것이라는 것만 알았지, 나머지는 전혀 몰랐어. 믿어줘."
"우리가 이 세계를 지켰다고 쳐요. 그럼 그다음은, 형은 어떻게 되는데요?"
".. 그들에 의해 소멸 당하겠지."
"..."
"나한테 배신감 느껴질 거 알아. 미안하다. 하지만, 너희를 대한 건 진심이었어. 나도, 나도 똑같이 이 세계를 지키고 싶어."
처음 본 날 옥상에서 한 얘기도, 간간이 자꾸 확인하려는 듯한 말투도 전부 알았기 때문에 그랬던 거야.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으로 승철 씨가 한 말은 믿을 수 있었다.
그의 말 한 마디는 항상 진정성이 있었기에. 여기 있는 사람들도 그건 인정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배신감을 크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싸늘한 분위기는 점점 우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섣불리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배신자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쪽으로 볼 수 있지만, 다시 그쪽으로 돌아간다면 역시 위험하다.
"그리고, 너."
지훈은 다가와 내 가방을 낚아챘다. 말릴 새도 없이 지훈에 의해 힘없이 열린 가방에서 영검의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할아버지한테 받은 것 맞지."
"..."
"이건 나도 그들에게 들었어. 인간이 영검을 가져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
"대체 이걸 숨기고 있었던 이유가 뭐야?"
화가 난 듯한 지훈의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래, 내가 승철 씨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정작 나도 그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는 걸. 어쩌면 승철 씨보다 더 한.
순간적으로 마주친 원우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나를 향해 있었다. 괜찮으니까 얘기해 보라는 표정을 담은 채 기다리고 있는 원우의 얼굴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에 내 기를 담아 중심을 막으면 이 세계의 심판은 끝난다고 했어. 색을 지닌 자들이 축을 찾아야 한다고 했고."
"그게 다야?"
"..."
"그게 진짜 끝이야? 말해준 거 더 없어? 어차피 들킨 거, 다 말해.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
"내가 막으면 이 세계는 다시 평화로워지는 대신, 내가 파괴된다고 했어."
"..."
반대로, 그 조각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 중심을 막으면 나는 돌아가는 대신 결국 이 세계의 끝은 파멸일 거라고.."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귀에 박혔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 지훈은 질린다며 순영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풀썩 앉았다.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꺼내는 것조차 너무 염치없어 보였다. 나름 애썼는데, 결국 그들에게 득이 되는 것이 하나 없었다. 눈치 없이 나와버린 눈물은 야속하게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옆에 같이 서 있던 원우는 조용히 내 손을 잡아왔다.
"그거 내가 할게."
승철 씨의 말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인 거냐며 답지 않게 정한 오빠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이쪽이랑 기가 다른 사람이잖아. 혹시나 실패하더라도, 너희는 반드시 내가 지켜."
"됐어. 둘 다 아무것도 하지 마."
".. 이지훈."
지훈이 천천히 일어났다. 정한 오빠도 지훈이가 한 말의 뜻을 알아차리곤 해맑은 웃음으로 지훈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뭐가 무섭겠냐. 우린 이제 잃을 게 없지만, 너희는 있잖아."
"..."
"미안하지만 승철아, 너에게 우리 세계는 안 맡겨. 눈 밖에 나는 행동하지 말고 이 일 끝나면 바로 돌아가."
마주 잡은 손은 어느새 풀리고, 원우는 내 어깨를 조심히 감쌌다.
"내가 말했잖아. 너 꼭 지켜준다고."
"..."
"너는 돌아가야 해."
"..."
돌아가야 하는 사람,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 똑같이 고통을 겪고 아플 거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망자들은 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사라질 각오를 한다.
나 또한, 그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게 희생하려는 그들을 위해, 내가 희생하더라도 이 세계를 지키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다고.
작가의 말
서로를 많이 위하는 아이들이쥬.. ;ㅅ;
정한이 승철에게 너한테는 맡기지 않겠다는 것도, 굳이 우리를 위해 애쓰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정말 그 세계 사람이 아니니까요. 자신의 사람들을 속이면서까지 승철이 할 이유는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