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환상
제 16장 ; 다가오는 끝
"......"
아픈 다리를 두드려가며 계속 올라온 덕분에 산 중턱을 간신히 넘었다. 너무 높아 작게만 보였던, 무너진 탑 주위를 날아다니던 시커먼 것들도 형상이 이제는 자세하게 드러났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특히 지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친 다리로 쉴 새 없이 걸었는데 무리가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인데도, 지훈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곳에서 고집이 센 그였다.
그렇다고 차마 숲 밖으로 나가, 쉬고 가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말로 시간이 없기 때문에.
무너진 탑의 영향으로 불안하다 못해 점점 위태로워지는 숲의 기운 탓에 모두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식은땀까지 흘리는 지훈을 옆에서 지켜보기만은 할 수 없어, 그의 팔에 단단히 내 손을 엮어맸다.
"..뭐, 뭐야. 이거 놔."
"너야말로 고집 좀 이제 그만 부려. 너 얼굴 지금 말이 아니야."
치- 하며 투덜거리는 입모양도, 똑같이 부리는 나의 고집 앞에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의지해 오는 손을 잡아 힘을 더 주었다.
".. 고맙다."
"많이 아프긴 한가보다. 나한테 고맙다고 얘기도 하고."
이왕 고마워 할 거면 나한테도 고마워 해.
뒤에서 심심치 않게 지훈의 거동을 관찰하던 순영이도 어느새 지훈의 옆에 서서 부축했다. 가볍게 올라가는 긴 입꼬리에 지훈은 자신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쉬지 않고 땅을 밟던 발은 우뚝 선 승철 씨에 의해 멈췄다. 그가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집었다. 바닥에 차인 듯 흙이며 먼지며 얼룩덜룩 묻은 잿빛을 띈 쇳조각.
원형은 보지 않았지만 무너져 내리면서 튄 탑의 파편일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렇다는 건,
"정상에 다 와간다."
이 지옥 같은 심판을 머지않아 끝낼 수 있다는 소리.
검게 피워 올라가는 연기처럼 살랑이던 '그것'들은 이따금씩 장난질을 해댔다. 이미 숲 깊숙이 들어와버린 탓에 부적도 쓸 수 없어 우리는 공격조차 할 수 없었다.
날아다니지 못하는 것이 이리도 치명적이게 다가온다. 이리저리 피하며 올라갈수록 숨이 턱 막혀왔다. 심리적인 불안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물리적인 힘에 의해 온몸이 억눌리는 느낌이다.
"야, 괜찮아?"
"아니.. 숨 막혀."
"그럴 줄 알았어. 나도 느끼는데 네가 멀쩡할 리가 없지."
뒤를 지키던 원우가 내 옆에 바짝 서자, 지훈은 의지하며 잡던 나의 손을 놓았다. 그대로 멈춰 서서 맞이한 분위기는 공포, 그 자체였다. 무슨 일인지도 전혀 모르는데 피부로 직접 스쳐 지나가는 두려움에 원우의 손을 덜컥 잡았다.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감싸오는 손길에 침을 꿀꺽, 삼켰다. 손을 통해 전해져오는 따뜻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도통 진정이 되지 않았다.
사람의 촉이란, 무서운 법인데.
"6시 방향."
눈을 감고 있던 승철 씨가 조용히 읊조렸다. 움직임이 불편해 그동안 칼을 집어넣고 다녔던 지훈이도 칼자루를 조심히 쥐었다.
아무래도 6시 방향에 있는 무언가가 한 둘이 아님이 분명했다. 수가 적었다면 이들이 이미 공격을 했을 것이다.
"셋 세면 다들 옆으로 퍼지는 거야."
하나,
원우는 자신이 있는 쪽으로 나를 더 끌어당겼다. 뒤돌아보면 안 돼.
둘,
나 꽉 잡고.
응.
셋
"뛰어!!"
뜀박질을 함과 동시에 우거진 나무들이 얽히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멸망하게 될 거 이까짓 숲은 망가져도 괜찮다는 듯, 시야가 방해되어 우리를 놓치는 일이 없게 무자비하게 베는 것 같았다. 우리 앞에는 승철 씨와 정한 오빠가, 반대편에는 순영과 지훈이 달리고 있었다. 지훈이는 다리까지 다쳤는데, 하필 인원이 이쪽으로 몰려 버렸다.
가까운 곳에서 나는 큰 소리에 몸을 주춤하자, 원우가 나를 옆으로 힘껏 밀쳤다. 바닥에 고꾸라지면서 내 눈에 보인 것은 세로로 두 동강이 난 나무였다. 미처 내뱉지 못한 숨이 버티지 못하고 토하듯 쏟아져 나왔다. 공포심에 의한 본능은 뒤돌아보지 말라는 원우의 말도 잊은 채로 뒤를 돌게 만들었다.
"!!!"
탑이 무너짐으로써 되찾은 감정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망자들,
옆에서 그들을 부추기는 검은 것들.
딱 봐도 많은 수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자, 앞서 달리던 정한 오빠가 급히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정신 차려. 빨리 가야 해."
옆에서 원우를 일으키던 승철 씨도 내 상태를 살피곤 정한 오빠와 함께 뒤쪽으로 섰다.
"아무래도 먼저 올라오는 몇 명은 좀 처리해야 할 것 같아."
"..."
"그니까, 원우 너 티스 데리고 먼저 빨리 올라가 있어."
"형,"
"저기 보이는 다섯 놈만 처리하고 얼른 뒤따라 갈게."
조용히 눈짓을 하던 원우는 내 손을 잡았다. 그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정한 오빠가 괜찮다는 듯 웃고는 칼을 고쳐 잡았다.
괜히 불안해지는 마음을 접고 걸음을 다시 떼었다.
부디, 저들에게 운이 따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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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호닉 ♡
대시, 자몽몽몽, 제로나인, 늘보냥이, 0717, 밍뿌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