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requiem(안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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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옷장을 뒤엎는 상혁의 손길이 거칠었다. 그새 살이 또 빠진 건지 헐렁해진 팬츠에, 상혁은 잔뜩 신경질이 났다. 심플한 디자인의 블랙 팬츠는 파리에서 3주 전 상혁이 직접 사온 것이었다. 깊숙이 박혀 있던 벨트를 끄집어 낸 상혁이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에 닿아오는 물방울들이 거슬릴 만큼이나 차가웠다. 시선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화이트 셔츠와 가죽 재킷을 고정시킨채, 상혁은 천천히 벨트를 매었다. 재환이 저녁이나 먹자며 라무르로 상혁을 불러내었기 때문이었다.
라무르는 인페르노의 엔(N)이 총책임자로 위임하고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명백한 인페르노의 구역. 상혁은 굳이 그곳에 발을 들이려는 재환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딱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상혁은 그저 따를 뿐이었다. 상혁은 재환을 믿었다. 믿어야만 했다. 상혁은 결단코 재환을 거스르고, 비난할 수 없었다. 그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그 사실만큼은 재환도, 상혁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상혁은 분명하게 재환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드는 찝찝한 기분은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이별빛….”
상혁이 익숙한 이름을 곱씹다, 미간을 구겼다. 갑작스레 떠오른 불쾌한 생각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점령해갔다. 그 계집애가 정말 보스가 벌이는 이 짓거리들의 시발점이라면, 그 앙증맞은 대가리에 반드시 총구를 겨누리라. 상혁은 이를 바득 갈았다.
셔츠에 팔을 끼워 넣으며, 발로는 타월을 구석으로 밀어내었다. 단추를 잠그는 손길이 분주했다. 재환이 처음 상혁을 데려왔을 적 겪었던 섭식장애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인 것처럼, 상혁은 최근 무지막지한 식욕을 자랑했다. 그거, 다 성욕이 그리로 간 거야. 섹스를 못 해서 그래. 카일의 말이 떠올라 상혁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아, 여자나 만나볼까. 상혁이 목덜미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칼을 대충 털어내곤, 재킷을 걸쳤다. 상혁의 가벼운 차림과 다르게 여전히 뉴욕은 이가 딱딱 부딪히며 온몸을 부르르 떨게 할 만큼 추운 날씨였지만, 상혁은 한 끼 식사에 600불이 넘는 식당의 난방을 믿었다. 굳은살이 잔뜩 배겨 있는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상혁은 탁자 위의 차 키홀더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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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무르 앞으로 레드 색상의 람보르기니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차에서 내려서며 자연스럽게 키를 던져 발레파킹을 맡긴 상혁이 머리를 만지작대며, 라무르 내부로 들어섰다. 온통 골드 계열로 도색 되어있는 입구를 둘러보며 상혁은 혀를 찼다. 정말로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촌스러워. 상혁은 입구에 서 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여자의 유니폼마저도 촌스럽다고 생각하며, 앞장서 자신을 인도하는 여직원의 뒤를 쫓았다. 식당에서 안내를 받을 때 마다 상혁은 주인을 졸졸 쫓아다니는 개새끼가 된 기분이라며 툴툴대었다. 심보가 아주 더럽게 못됐다며 아무리 카일이 자신을 비난하더라도 상혁은 꿋꿋했다. 비딱한 마음가짐을 항상 유지하는 상혁에, 카일은 여러모로 대단한 자식이라며 혀를 찼었다.
벚꽃이 그려져 있는 후스마를 보며 상혁은 정말, 딱 일식 레스토랑 답다는 생각을 했다. 후스마를 옆으로 젖혀 주는 여자를 지나쳐 룸 안으로 들어섰다. 단조로운 내부가 썩 괜찮은 편이라고, 상혁은 멋대로 라무르를 평가하며 재환에게 살짝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건넸다.
“왔-어?”
“늦을 것 같길래, 먼저 주문 했는데, 괜찮지?”
“…예.”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카일을 무시한 채 자리에 앉은 상혁이 재환에게 답하며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들어오는 서버를 바라보며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건지 연신 방긋대는 카일에, 상혁은 물수건에 손을 닦다 말고 질색하며 말했다.
“미쳤어? 왜 이래.”
“그냥, 신나잖아!”
“혹시, 뇌가 아파?”
“아니거든? 으흥, 신나라!”
“…미친놈.”
점입가경으로 콧노래까지 부르는 카일에게 욕을 내뱉은 상혁이, 시선을 돌려 재환을 바라보았다. 재환은 와규에 청주를 뿌려 겉면을 익혀주는 것을 턱을 괸 채 구경하고 있었다. 연주황색의 불꽃이 상혁이 바라보는 재환의 형체를 자꾸만 흐릿하게 만들었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인 건지. 물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상혁이 뻐근한 목을 뒤로 젖혔다. 천장에 달린 화려한 물고기 모양의 조명이 눈이 부셨다.
와장창ㅡ!
상혁이 눈을 감으려던 찰나,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룸 안에 울려 퍼졌다. 상혁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게 움찔하며 급히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떡해….”
“…아….”
“보스, 괜찮으세요?”
“변상,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똑같은 옷으로, 새로 사줄려고요? 클리닝으로는 안 되겠는데….”
“알려만 주시면 어떻게든,”
“키톤에 직접 의뢰해서 맞춤제작 한 수트(Suit)인데….”
“……….”
“그럴만한 돈 있어요?”
“아 진짜, 씨발.”
안절부절못하는 여자 서버와 달리, 재환은 나긋나긋하게 이야기하며 여유로운 미소마저 갖추고 있었다. 하얀색의 식탁보 위와, 재환의 바짓단 위로 엎어진 에다마메 수프. 무릎까지 오는 딱 달라붙는 H 라인의 스커트 밑으로 빨갛게 부어오른 여자의 발목을 발견한 상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눈썹 뼈를 긁적이며 잔뜩 짜증을 내는 카일의 입가에 슬며시 보이는 웃음에 상혁은 미친 듯이 불안함이 밀려왔다. 만약 재환이 일부로 저 여자가 음식을 엎도록 한 것이라면,
“매니저 불러와요.”
“아, 저…….”
“매니저 불러오잖아, 다른 말 말고.”
상혁이 다리를 꼬며 마른 세수를 했다. 카일은 상당한 미남이였지만, 그닥 인상이 좋은편에 속하는 편은 아니었다. 최고의 조화라며, 스스로 수도 없이 찬양했던 백인 특유의 새하얀 피부와 백금발. 날카로운 눈매와 귀와 눈썹 뼈에 한 수많은 피어싱, 그리고 걷어올린 팔 사이로 보이는 문신들은 충분히 카일의 인상을 험악하게 보이도록 하기에 충분하였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모르는 여자의 뒤로 카일이 거칠게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욕을 내뱉었다.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재떨이가 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 나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진짜, 성질머리하고는. 재환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저 미친 성격 파탄자 새끼! 등을 바짝 세운 상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굳어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 정말….”
“…리벨리어스?”
난장판이 된 룸의 후스마를, 한 남자가 거칠게 열어젖혔다. 재환이 픽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쓸었다. 남자의 손등에 그려져 있는 악마 날개. 남자는 카일의 팔에 새겨진 R 문양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뒷주머니에서 총을 빼내어, 겨눴다. 재환은 천천히 다리를 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감히 누구한테 총을 겨눠, 씨발놈이.”
“가, 가까이 오지마!”
“좆 까. 혼자인 새끼가.”
성큼성큼 자신에게 총을 겨눈 남자에게 다가선 카일이, 순식간에 총을 빼들어 남자의 머리에 겨누곤,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채 식탁 위로 내리눌렀다. 또다시 와장창 소리와 함께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씨발! 상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이럴 줄 알았어. 상혁은 이를 악물고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여자 서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제 앞에 엎어져 있는 그릇을 걷어찼다. 재환은 꼬았던 다리를 펴고 바른 자세를 하며, 느긋하게 카르파쵸를 집어먹었다. 지나치게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미친새끼들. 대체 왜 여기에…!”
“왜 그래-.”
“……….”
“저녁 먹으러 온 거잖아. 응?”
“……….”
“넌 식당에 왜 가니?”
카일이 머리를 내리누르고 있는 탓에 억눌린 목소리로 이를 갈며 말하는 남자에, 재환이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짜증 나게 해, 왜. 한순간에 표정을 굳힌 재환이 카일이 누르고 있던 남자의 손에 쥐어진 총을 빼앗았다. 탕, 울리는 총성과 함께 눈을 감은 남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총에 맞아 부서진 도자기가 선반 위에 조각조각 난잡하게 흩어졌다. 자신의 발치에 튄 도자기 조각을 밟아 으스러뜨린 재환이 총을 바닥에 내던졌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한 채.
“뭐야, 이거.”
“…엔이네? 있었구나, 몰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