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중궁궐 04
w. Cecilia
1
정국은 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뜰 때쯤에야 궐에 도착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여니 그 앞에는 지민이가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아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저 눈길로 무사히 돌아왔냐는 물음을 던졌다. 정국 또한 입은 꼬옥 다문채 잘 다녀왔다는 눈짓을 한다. 정국은 많이 피곤한듯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가 입고 있던 옷을 벗고는 세안도 하지 않은 채 바닥에 누웠다. 창 밖으로 보이는 달이 오늘 유난히도 밝았다. 지금쯤 태형도 집에 돌아갔을 터이다. 복잡한 시장통 속에서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두 팔을 휘저으며 이 곳 저 곳을 누비는 태형의 모습이 문득 생각나 흐뭇해진다. 살아온 환경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누구보다도 해맑고 밝은 태형의 미소를 정국은 계속 보고 싶었고, 지켜주고 싶었다. 한창 정국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가 조용히 문 밖에서 속삭인다.
"정국아, 자?"
그 목소리에 정국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드르륵 문을 옆으로 열었다. 그 앞에는 조용히 기어온 듯한 진이 있었다.
"진 형!"
"쉿"
진은 누가 들을새라 조용히하라며 정국에게 방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였고, 엉금엉금 기어 문지방을 넘었다.
"아직 안자고 뭐해?"
"형이 깨워놓고는..."
"그랬지, 미안 미안."
진은 머쓱한듯 뒷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 정말 할 생각이야?"
"말했잖아. 예전부터 형을 보면서 꼭 형 일을 돕고 싶다고."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나야 잃을 것 없는 일개 서자 출신이지만 너는 곧 이 나라의 임금이 될 왕자 아니니."
"글쎄... 이런 세상이라면 왕 자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형을 도울거야."
진은 정말로 걱정하는 듯 했다. 예전에는 정국이 치기어린 마음에 이 세상을 바로잡아 볼 것이라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더 이상 이를 장난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정국의 눈빛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괜히 자신 때문에 정국을 일에 끼어들게 만든 것 같아 죄책감도 들었다.
"진 형. 나는 진지해. 그리고 또 내가 이 일을 해야할 다른 이유가 생겼어."
"다른 이유?"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거든. 잃고 싶지 않아."
2
'천풍화(天風花)'
정국과 진이 다다른 곳은 천풍화라는 장소였다. 하늘 바람에 날리는 꽃이라는 이름의 공간에는 이미 대여섯명 정도의 장정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진, 저 아이야? 네가 말한 사람이.."
정국이 방 안을 들어서자마자 일제히 사람들의 시선은 정국에게로 쏠렸다. 평상시와 달리 정국은 위 아래 검은 옷을 입었고, 얼굴에는 비칠듯말듯한 검정 비단으로 하관을 가리었다. 그 공간에 있는 그 누구도 정국이 조선의 왕자임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물론, 진을 제외하고.
"우리의 일에 분명 큰 도움이 될 자다. 이는 내가 보장하지."
정국은 진의 옆에 붙어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아끼는 것 같기도, 약간 긴장을 한 것 같기도 하였다. 그저 진 옆에 붙어 무뚝뚝한 자세로 서 있었다. 다행히도 정국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천 덕분에 그런 긴장된 정국의 모습을 들킬 일은 없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그만 앉아서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천월(天月)."
그들은 정국을 '천월'이라 불렀다.
3
천풍화를 나오면서 정국은 허리춤을 감싸고 있던 검은 천을 더 세게 억죄였다. 살짝 복부를 압박하는 느낌에 정국은 긴장이 풀린듯 푹 한숨을 쉬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거리에는 진과 정국만이 걷고 있었다. 낮의 왁자지껄한 거리와는 정 반대의 풍경이다. 진은 정국의 눈치를 보는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하였고, 정국은 그런 진의 뒤를 따랐다. 진은 조선임금의 두번째 첩인 미후의 첫째 아들이다. 물론, 계승 서열에서 철저하게 제외되었으며 궐 안으로의 출입또한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진은 그런 자신의 상황을 한번도 원망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본 처의 자식인 정국을 자신의 친동생마냥 아끼고 돌보았다. 정국은 어려서부터 진을 친형처럼 따랐으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는 진의 모습이 멋져 보이기만 했다. 꼭 나중에 커서 진형 같은 멋진 남자가 되어 조선을 다스리고 싶었다.
진이 15살이 되던 해였다.
바깥에 나가 있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탓에 정국은 여느 때처럼 방 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여름 밤인지라 창문을 열어 놓아도 시원치않을 판에 사방에 창문을 모두 닫아두고 촛불 두어개만을 켜 둔 채 정국은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그 때 였다. 굉음과 동시에 한 사람이 정국의 방 안에 굴러 들어왔다.
"아윽..."
정국 앞에 한 남자가 쓰러졌다.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정국은 소리칠 새도 없었다. 그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멍하니 그 남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옆에 놓인 초 하나를 손에 들고 조심스레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정국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는 다름아닌 진이었다.
"형! 이게 뭐야? 무슨 일이야? 어디서 이렇게 다치고 온거야? "
쉴새없이 질문을 해대는 정국에 진은 정국의 입을 손으로 막더니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정국은 그제서야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람은 부르지 말고, 오늘 하루만 네 방에서 자고 가자.."
진은 가까스레 몸을 일으켜 세운뒤 피가 낭자한 복부 부위를 자신의 바지 한 쪽을 찢어 동여매었다. 그리고는 외마디 신음소리와 함께 매듭을 지어 지혈을 하였다. 정국은 낯선 진 형의 모습과 처음 보는 광경에 그저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때 부터였다. 정국은 진 형이 밤마다 어디를 가느라 자신과 놀아주지 못하였는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는 둘만이 아는 작은 비밀이라고 진은 정국에게 타일렀다. 이 비밀을 다른 사람이 아는 순간 그 둘만의 재미있는 놀이가 끝나게 되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정국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이렇게 진과 정국의 비밀스러운 놀이는 계속되었고, 이에 정국이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천월로서.
4
"에이 아저씨 그런게 어디있습니까."
"아무리 네가 부탁을 해도 안되는건 안되는 것이야."
태형은 입을 삐죽대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아저씨께서 허락을 해주실 때까지 전 이 곳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무리 떼를 써도 안된다. 네 어미를 봐서라도 절대로. 그리고 돌아가신 네 아비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으냐."
그 사람 입에서 '아비'라는 말이 나오자 태형은 기분이 언짢아졌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제가 알지도 못하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제 알 바가 아닙니다."
"생전 그 누구보다도 나라를 사랑하시고 가족을 사랑하셨던 분이다. 네 녀석이 아직 철딱서니가 없서기로니와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된다."
"저는 꼭 궐에 들어가야 합니다."
"궐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을 것이다. 정 안되면 양반집 호위무사라도 시켜달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
"아닙니다. 저는 궐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높게 쌓여진 성벽 안에 들어가 어찌 그 안의 사람들은 살고 있는지, 얼마나 잘 살고 있길래 그 밖의 상황에 대해서는 귀먹은 벙어리가 되는지, 눈을 가리고 아웅하는지 제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궐에 들어가면 제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아버지를 찾다니. 이미 이십년 전에 이 세상을 등진 분이다."
"예 그렇지요. 육체는 이 세상을 등졌지만 그 분의 흔적은 궐 안에 남아있을 것 아닙니까."
태형의 완강한 고집에 그 사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넌 이게 지금 가당키나 한 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죽은 자에게까지 세금을 거두는 이 나라에서."
"네 모양을 보아라."
태형은 사내의 말에 자신의 몸을 한 번 내려다 훑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소매를 걷어 사내에게 자신의 손목을 보였다.
"무술로 다져진 몸이지만 그 어느 여인만큼의 가녀린 손목을 갖고 있습니다."
사내는 태형의 말이 못 미더운듯 했다. 여러번 헛기침을 하더니 검지 손가락으로 태형의 목을 가리켰다. 아마 일반 사내들과 비교해보았을 때에도 낮은 태형의 목소리가 걸리는 듯 했다.
"나비가 꽃을 찾는 것은 꽃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옵고, 그 꽃이 품고 있는 꿀 때문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이를 모두는 간과하고 꽃의 아름다움을 꼭 나비를 유혹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뭍 이 조선의 사내놈들도 이 나비들과 별 다를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5
태형은 그 다음 날 아침, 조선의 제일가는 기방인 '모란수' 문 앞에 다다랐다. 약간은 긴장한 듯 침을 두어번 삼키더니 두꺼운 나무로 된 문을 손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오늘부터 이 곳에서 일하기로 한 기생 '운화(雲花)' 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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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세실리아입니다 :D
항상 댓글 달아주시는 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네요.
암호닉은 항상 받고 있습니다.(추후에 글이 완결되고 몇 분께 책으로 엮어 선물해 드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