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기사 08
w. Cecilia
나는 같은 반 아이들보다 2살이나 나이가 많다. 엄마의 말로는 내가 정말 많이 아팠다고 한다. 고열로 시작한 나의 증상은 환각, 환청으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정신을 잃어 식물인간 상태로 2년을 지냈다. 선생님 일을 하던 엄마는 일을 그만두고 나를 간호하는 데에 매달리셨고, 아버지가 생업을 전담하셨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기에 나의 상황은 부모님에게 더할 나위 없이 끔찍했다. 혹여나 나를 잃을까 두려우셨다고 한다. 가끔 엄마는 나에게 묻고는 한다. 그 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느냐고. 하지만 나는 그 무엇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나에게는 그저 칠흑같은 어둠으로 가득찼던 2년이었으니까.
나는 친구가 없다. 2살이나 나이가 많은 탓도 있지만, 크게 아팠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매사 조심스러웠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왔고 밥도 혼자 먹기 일쑤였다. 그렇게 혼자 조용히 지내는 듯 하다가 언젠가부터 아이들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의 교과서를 한 장 한 장 찢어놓은 아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내가 싫냐고. 그 아이는 그냥 내가 싫다고 대답했다. 세상에는 구체적으로 이유를 댈 수 없는 일들이 많은 것이다. 그 아이가 내게 대답했듯. 그리고 내가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어떠한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유리."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떠들석한 복도 한 가운데에 나와 나를 부르는 그 사람만이 멈추어 섰다. 새하얀 얼굴, 기다란 키, 동그란 눈에 두툼한 입술을 가진 남자였다. 교복을 입고 있지 않은 것을 보니 이 학교 학생은 아닌 듯 했다.
"누구세요."
"잘 지냈어?"
마치 나를 아는 사람처럼 살갑게 구는 그 사람이 낯설게 느껴졌다.
"절 아세요? 저는 당신을 처음 봐요."
사람을 대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나에게 이런 적극적인 사람은 부담스러울 뿐이다. 내가 움찔하자 그 사람은 그 얼굴을 나에게 조금씩 들이대었다. 그리고 나는 그만큼 뒷걸음질을 했다. 내 등이 복도 벽에 닿을 때에서야 그 사람은 다가오는 것을 멈추었다.
"난 진이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행복하니?"
그 사람은 나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두 입을 꾸욱 다물고 내 발 끝만을 쳐다볼 뿐.
* * * * * * *
"페르소나."
정국의 목소리다. 정국이 부르는 목소리에 그 진이라는 사람은 뒤돌았다. 그리고는 반가운듯 두 팔을 벌려 정국을 껴안으려 했다. 그러자 정국은 몸서리치며 그를 내밀었다. 내심 섭섭한 목소리로 그는 답했다.
"진이라고 부르래도. 페르소나라는 별명은 넣어둬 전정국."
"여기는 왜 온거야?"
"너네도 볼 겸, 성유리도 볼겸.. 태형이는 어딨어?"
자기 이름이 불리우길 기다렸다는듯 불쑥 태형이 나타났다.
"나 불렀어?"
진이라는 사람이 이 장소에 나타난 것이 꽤나 못 마땅한듯 태형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태형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나 혼자서도 이 곳을 잘 지키고 있었는데, 전정국이 나타나서 이 모양인거잖아. 그리고 그 곳은 어떡하고 여기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면 안되지 책임감 없이."
"궁금해서 왔어."
"니가 궁금해할 자격이나 있어? 유리 기억.."
태형의 말에 정국이 황급히 입을 막았다. 어떤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내 기억이라니. 혹시 2년간 나의 사라진 기억을 말하는 걸까? 저 진이라는 사람은 내 잊혀진 2년간의 기억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태형과 정국은 알고 있던 것이고? 또 태형은 이 곳에서 무엇을 지키고 있었던 것일까.
쉴새없이 많은 질문들이 내 머리속에 쏟아졌다. 정리가 되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냥 교실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나는 먼저 교실로 갈게."
나의 말에 진은 내 손에 목걸이 하나를 건네었다.
"니가 까먹고 안 가져갔던 거야."
* * * * * * *
에필로그. 정국이 나타나기 전 학교, 태형시점
또 저 표정이다. 성유리는 항상 죽을 듯한 표정을 하고 등교를 한다. 아침마다 저 녀석이 나오길 몰래 기다리다가 뒤 따라 나서는 것도 일이다. 왜냐면 그 누구보다 일찍 등교하는 아이니까. 시계는 아직 아침 6시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사실, 이 정도면 아침이 아니라 새벽이다.
조용히 그 아이의 걸음을 따라간다. 부는 바람에 날아갈것 같이 여리여리한 몸이 돌부리에 걸려 휘청였다. 괜스레 나도 따라서 "어이쿠"하는 소리를 낼 뻔 했다.
학교에서도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멍하니 앞을 응시하고 있는 그 아이를 지켜본다. 예전엔 괴롭히던 아이들조차 이제 유리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피하기 시작했다. 성유리가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뒤에서 그 아이들을 협박하고 앙갚음을 해 준 것은 언제나 나였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기도 1년.. 아직 그 아이는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