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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아로아











오늘도 편전의 상석은 텅 비어있었다. 황상께서 산보 도중 갑자기 정신을 잃으시어 옥체 미령하시다는 말은 전해 들었지만 벌써 엿새째였다. 태의가 말하길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라 했다는 데도 주인이 없는 편전의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가뭄의 영향인지 하남 지역에는 역병이 돌기 시작했고, 국경 근처에서는 도적 떼가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닌 데 황제가 며칠째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있으니 어찌 큰일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황제의 보령이 이제 겨우 스물을 넘으셨으니 그를 대신할 태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태사 어른, 벌써 며칠째입니까? 황상께서 저리 누워계시니 무엇 하나 쉽게 처리할 수가 있어야지요.”



“기다려보시게.”




홀로 금화성에 남아계실 아버지가 걱정되어 죽겠다는 황후의 눈물 섞인 간청에 황제가 장인을 태사의 자리에 앉힌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5황자의 장인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바라던 대로 중앙에 진출하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황후께서 건강한 황자를 품에 안으시어 이 나라의 대통을 잇는 것뿐.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어찌할 줄 모르는 대사농의 초조한 목소리가 우스워 태사는 그저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껄껄 웃으며 제 수염을 가다듬었다.



앓아누웠다는 황제는 아마 지금쯤 어화원 어딘가에서 길을 거닐고 있을 것이다. 머리가 복잡하여 쉬고 싶다며 며칠 동안 국정을 알아서 돌보라 명하신 것이 얼마 전의 일.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처음엔 의심도 하였으나 황상께 붙여놓은 궁녀 아이의 말에 의하면 황상께서 매일같이 낚싯대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하여 이젠 마음을 놓았다.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으랴. 편전에 오기 전 황후전에 연통을 넣었으니 아마도 곧 황후전 태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황후마마 납시오!”




태사를 제외한 편전 안 모든 이들의 얼굴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찌그러졌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웅성거리는 것도 잠시, 태사의 헛기침 소리에 대신들은 황후를 향해 일제히 읍하였다.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열두 개의 계단. 황후가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녀의 금빛 귀걸이가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침묵을 깼다. 붉은 비단에 금사로 수 놓인 봉황은 황후의 고아한 걸음걸이를 따라 춤을 추는 듯하였다. 마침내 올라선 황제의 자리. 편전 중심에 우뚝 선 황후가 대소신료들을 쭉 둘러보았다. 하나뿐인 황후라지만 이곳은 오롯이 황제만을 위한 곳. 어찌 황후께서 발을 들이시냐고 항의라도 하듯이 제 눈길을 피하는 자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황후가 마침내 입을 뗐다.



“다들 앉으세요.”



.”



“불만이 많으신 얼굴들을 하고 계시는군요. 본궁이 와서는 안 되는 곳에 온 것입니까?”




기다려보라는 태사의 말이 이런 의미였나. 하던 대로 변방에서나 거들먹거릴 것이지 여식을 내세워 득세하는 태사의 꼴도 아니꼬워 죽겠는데, 그 여식인 황후는 한술 더 떠 황제께서 와병 중인 틈을 타 기어이 편전에 발을 들였다. 이래서 윤친왕이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됐던 것인데…. 얼마 남지 않은 선대 황제의 충신 중 하나인 대사농이 비장한 표정을 하곤 앞으로 나섰다.



“송구하오나 황후마마, 이곳은 편전이옵니다. 황상께서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곳이온데 어찌 황후마마께서 이곳에 발을 들이신단 말입니까.”



“그래요?”



대사농의 도발에 화를 내기는커녕,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던 황후의 표정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이윽고 그 넓은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낸 황후가 그것을 들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황상의 성지(聖旨)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 황상께 직접 받아온 것이지요.”



황금 비단 배경에 여의주를 문 용이 새겨진 그것은 윤기의 성지가 분명했다. 그래도 여전히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못하는 대신들을 보다 못한 태사가 황후가 들고 있던 성지를 건네받아 윤기의 인장을 확인시켜주었다. 틀림없는 황제의 뜻. 크게 앓아누우시어 편전에도 나오지 못하시는 황제께서 언제 저런 것을 남기신 것인지 의아한 눈치였지만, 하는 수 없이 대신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명을 받들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하늘의 뜻을 받아 황제가 이르노니, 태사는 짐의 충신이자 이 나라의 또 다른 기둥이라. 짐의 부덕한 탓에 몸이 좋지 못하여 당분간 정사를 돌보기 힘이 드니 태사를 짐의 대리로 명하노라.”



“이 무슨...!”



태사가 성지를 다 읽고 난 후에도, 대신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불경하기 짝이 없는 태도의 대신들에 황후는 기가 막혔다. 자신은 이 나라의 하나뿐인 황후이고, 아버님께서는 황상이 인정하신 황제의 대리이거늘 어찌 이렇게 무례하단 말인가.



황후가 눈짓하자 저 멀리 대기하고 있던 황후전 김상궁이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황후마마, 심려 마소서. 태위 어른께서 저들을 알아서 처리해 주실 것입니다. 김상궁의 다정한 목소리에 황후는 눈을 감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색은 안 했지만, 야차 같은 대신들을 상대하는 것이 그녀에게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러 평소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하고 왔는데도, 그들 앞에 서자 이상하게 자신이 없어졌다. 아버님마저 곁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아마 도중에 다리에 힘이 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할 일은 다 하였으니, 황후전으로 돌아가서 좋아하는 꽃이나 보며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황후전으로 돌아가자.”










**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사이로 희한한 소리가 들려왔다. 물고기가 드디어 미끼를 물은 모양이다. 나무 그늘 아래 의자에 축 늘어져 있던 윤기가 그 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하도 급작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부채를 부쳐주고 있던 궁녀 아이가 실수로 그의 용안을 쳐버리고 말았다.



감히 황제의 용안을 치다니, 죽을죄를 지었음을 알기에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바들바들 떨어대던 궁녀가 이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궁녀 아이가 아닌 급작스럽게 몸을 일으킨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기에 윤기는 괜찮다며 직접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지금은 그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었다. 몇 시진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던 낚싯대가 드디어 움찔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윤기의 시선이 호수로 향했다. 잔잔하던 물 위로 동그란 파동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움직임을 보아하니 대어가 분명했다. 황제의 체면도 잊고 낚싯대가 놓인 땡볕으로 달려나간 윤기가 재빨리 그것을 들어 올렸다. 수면 위로 거대한 잉어 한 마리가 펄떡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월척이로구나.”



.”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어. 고작 잉어 한 마리를 낚으려고 말이야.”



“폐하,”



“간만에 대어를 낚았으니 같이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지민아, 황후전에 저녁 수라를 준비해두라 이르거라.”




펄떡이던 모습은 어디 가고 어느새 축 늘어져 있는 잉어를 가리킨 윤기가 어서 가보라며 지민을 떠밀었다. 대낮에 한가로이 낚싯대나 어루만지고 있는 황제라니. 원래 같으면 편전에서 대소신료들과 회의를 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황후가 성지를 읽고도 남았을 것이다. 지민은 제 주군의 모습이 속상해 남몰래 가슴을 쳤다. 지민이 아는 2황자 윤기는 이리도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황제가 될 사람이 아니었다.



지민은 윤기가 2황자이던 시절 거둔 아이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황자이기에 곧잘 황궁 밖으로 나가 머리를 식히곤 했던 윤기가 여느 날처럼 저자를 떠돌고 있을 때였다. 길가에 웬 아이 하나가 쓰러져 있기에 데려왔는데 제 이름과 나이, 그리고 살던 곳도 모른다 했다. 그래서 윤기가 지민이라 이름을 지어주고 스승을 붙여 무술을 가르쳤다. 그렇게 지민은 윤기의 호위가 되어 지금의 자리까지 올랐다. 아마도 지민보다 윤기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 가슴이 아픈 것이다.



황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윤기는 낚시를 즐기기 시작했다.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는 데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가벼운 취미로는 나쁘지 않으나 정사도 나 몰라라 한 채로 즐기는 것이 문제였다. 무슨 생각이신지 며칠 전부턴 아예 거짓 핑계를 대고 호숫가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하루의 절반을 보내고 계시니 죽어나는 건 저를 포함한 아랫것들뿐이었다. 게다가 태사를 대리로 임명한다는 성지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어쩌려고 허수아비 황제라는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쓰려 하시는 것인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속을 알 수 없으니 그것이 문제였다. 한없이 평온해 보이는 윤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답답하여 지민은 푹푹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너도 내가 답답할 테지. 황제라는 자가 낚시놀음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옵니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해두지.”



“때라고 하오시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넌 어서 황후전에 가서 말이나 전하거라. 짐은 조금 더 걷다 황후전으로 갈 테니.”



윤기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걸렸다.











**









“황후마마, 호위대장께서 오셨습니다.”



“...호위대장이...? 뫼시거라.”



나인 아이가 유리 화병에 담아온 모란꽃 줄기를 다듬고 있던 황후가 지민이 왔다는 소리에 재빨리 가위를 내려놓았다. 황제의 최측근인 만큼 지민은 그녀가 마음 놓고 무시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걷고 있던 소매를 내려 단정하게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살핀 황후가 몸을 일으키는 사이 지민이 들어와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호위대장이 여긴 어쩐 일로...?



은쟁반에 굴러가는 옥구슬 소리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황후의 목소리는 맑고 아름다웠다. 그 용모는 또 어떠한가. 한때 지민은 하늘에 산다는 선녀가 실존한다면 황후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새카만 속내를 알기에, 지민은 황후를 극도로 혐오하였다.



“폐하께서 저녁 수라는 황후전에서 드실 것이니 준비하라 이르셨습니다.”



“알겠네.”



“허면 이만 물러가옵니다.”



“ㅈ, 잠깐! 별다른 용무가 없으면 예서 차라도 들고 가게.”



오늘따라 황후는 참으로 이상하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감히 황후에게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으니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준비하라고 김상궁에게 손짓을 하는 황후의 등 뒤로 화려한 황금빛의 향로가 보였다. 향로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새하얀 연기에서는 꽃향기가 났다. 지민은 이 냄새를 지독히도 혐오했다. 마치 꽃밭의 한가운데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았으니까.



아아, 아마도 잠시 홀렸었나 보다.



“호위대장, 호위대장?”



자신을 불러오는 황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제 앞에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지민은 황후의 앞이라는 것도 잠시 잊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황후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그런데 이런 꼴을 보이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지민의 시선에 얼굴이 따가울 법도 한데, 황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찻잔을 들어 입김을 후 불었다. 활짝 만개한 커다란 모란 한 송이가 그려진 그녀의 찻잔에는 금테가 둘러져 있었다. 아마도 또 누군가를 관직에 꽂아주면서 받은 물건일 테지. 과연 이 나라 황후의 물건다웠다.



“황상께선 요즘 어찌 지내고 계신지 궁금하여..아까 성지를 받으러 갈 때 잠시 뵌 것 말고는 며칠간 뵙지 못하여서 말이네.”



이제야 궁금해진 것인가. 황상의 안부라니, 황후에게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말이었다. 누구 덕분에 이 지경이 되었는데 그것이 궁금하단 말인가. 참으로 이상하게도, 제게 물어오는 황후의 모습은 참으로 수줍어 보였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흩날리는 복사꽃 빛이 이러할까. 연분홍빛 곱게 물든 황후의 얼굴을 보며 지민이 입을 떼려 할 때였다.





“괜찮다면 그 답은 내가 대신 답해주고 싶은데 말이오, 황후.”




“황상..!”



황제의 그 목소리에 분홍빛 돌던 황후의 복사꽃 얼굴이 빠알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




*황후 캐릭터는 드라마 후궁견환전의 화비 연씨, 기황후의 타나실리 두 인물을 참고했습니다.


기대도 안 했는데 댓글이 6개나 달려서 놀랐어요! 무려 암호닉도 ㅜㅜㅜ

사실 이건 제가 자기만족용으로 쓰는 글이라 보시기에 부족하실 수도 있을 텐데 보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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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헛 지민이가 잠시 홀렸다면 앞으로도 홀릴 횟수가 많아질거같은데..! 그럼 삼각관계 가는건가요 ㅎㅎㅎ 황후도 황제를 좋아하는거같아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다만 언제쯤 국정을 잘 돌보는 황제가 될건지 그 때가 언젠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6년 전
비회원13.161
작가님 재밌어요 !!!!!!!!!! 계속 써주시길 ㅠㅠㅠㅠㅠ
6년 전
독자2
지난번에 보고 윤기의 짝사랑 일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자신을 극도로 싫어하는 지민이까지 홀리게 하다니.. 황후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지 궁금하네요^ㅁ^
6년 전
비회원138.222
전 황후가 걸크러쉬라고 느껴지네용 오늘도 잘읽고갑니다 작가님 홧팅
6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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