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 없는 여자에게 흥미를 잃은 남자가 아무 말 않으며 등을 돌렸다.
남자는 검은색 양복 차림이다.
누가.
죽기라도 한 걸까.
남자는 차근하게 걸음을 옮겨 다시 짐이 있는 집 앞으로 향했다.
남자가 조용히 초인종을 누른다.
생애 처음으로 들어보는 초인종에 여자가 청각을 곤두세웠다.
남자의 손길에 의해 떨어져나간 이어폰에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전달된다.
이어폰은 이제 저만치 아래에 있었다.
여자의 손에 힘이 풀려나감과 동시에 음악을 재생시키고 있던 핸드폰은 땅 위로 곤두박질했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임에도 남자는 그 즉시 뒤를 돌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부드럽게 풀어진 눈동자가 여자를 주시한다.
여자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정상이었고, 현실이었다.
겁에 질려 시선을 회피하려는 눈동자가 조금 안쓰러워 남자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누른다.
그러나 그 곳에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집에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얘.”
“…….”
“꼬마야.”
“…….”
“너 여기 혼자 사니.”
예상을 엇나가는 남자의 질문에 여자가 가방끈을 꾸욱 눌러 잡았다.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은 와중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무작위로 음악이 재생되고 있는 게 보인다.
여자가 재빠르게 바닥에서 핸드폰을 낚아채었다.
그리고 그대로 어딘가를 향해 사나운 달리기를 시작했다.
너 여기 혼자 사니.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목소리는 여자에게로 똑똑히 전달되었다.
소름이 돋도록 낮은 음성이다.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남자는 미처 보지 못했다.
그저 사람을 부르기 위해 초인종을 눌러대기 바쁠 뿐.
조용한 골목길에 정적이 이어진다.
남자가 멀거니 고개를 내려 제 앞에 놓여있는 짐들을 확인한다.
그리고 한 번 안에 들어있을 내용물들을 차근히 생각해본다.
남자가 무심코 머리칼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곧 여자가 없어졌음을 깨닫고 굳게 입을 다문다.
이유를 캐물을 생각은 없다.
뒤쫓을 생각 역시 하지 않았다.
“귀찮게 됐네…….”
남자가 미세하게 얼굴 근육을 찌그러뜨리며 중얼거린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사람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불찰을 예상하며 다시 한 번 길을 찾아도 목적지는 이 곳이 맞았다.
남자가 점차 갈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아직 세상은 경이롭다.
남자가 평화로운 하늘에게 가만히 이른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감사하며 남자가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고막을 틀어막은 센서에서 어느 중년의 목소리가 뻐근하게 들려온다.
“……예. 방금 도착했습니다.”
남자의 눈이 집 주변을 샅샅이 뒤진다.
별 다른 점은 딱히 발견되지 않았다.
“예. 예. 어차피 죽게 돼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모든 걸 돌려놓을 테니.
그래놓고 그는 슬며시 웃었다.
센서의 목소리는 멋대로 그를 ‘이홍빈’으로 지칭했다.
재환이 개수대에서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혀 파레트를 씻었다.
약간의 기름기가 섞여있는 파레트는 결코 물 따위에 굴복하지 않고 씻기어나가지 않는다.
뻔히 그것을 알면서도 재환은 매번 이렇게 물에서 파레트를 헹군다.
아마 즐기는 것 같다.
아무리 벅벅 문질러도 말끔하게 닦아지지 못하는 물감의 잔해들은 꼭 자신을 닮았다.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즐겁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끝까지 버티고 버텨 목숨을 부지해주어.
재환은 그 마지막의 처절함을 알아차리는 것이 언제나 즐거웠다.
그가 흐르는 물에 붓대를 거머쥐었다.
그러자 사방으로 다양한 빛깔의 물방울들이 튀기기 시작한다.
그것은 재환이 입고 있는 밝은 보리색 티셔츠에도.
개수대 옆 선반 위 가지런한 접시들 사이에도.
마구 튀기어 무수히 많은 잔상을 남겼다.
꼭 까무룩한 밤 하늘에 떨어지는 유성같은 모습들이다.
재환이 축축하고 미끄덩한 손바닥을 티셔츠에 문지르며 수도꼭지를 잠근다.
그가 부엌 식탁에 젖은 파레트를 올려놓으며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저녁은 오지 않았다.
자신이 그걸 알아채도 밖은 여전히 밝을 것이다.
재환이 지층의 월셋방에서 썩어가는 곰팡이 내음을 애써 모른 척 지나치며 침대 위에 고개를 묻는다.
포근한 감촉이 그의 얼굴은 한껏 감싸 안았다.
문득 그는 그것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생경한 향수를 발견한다.
그 향수는 짙고, 캄캄했으며, 스무살인 재환을 단숨에 한낱 사춘기 소년으로 돌려놓았다.
슬프지만 슬프지는 않은 느낌이 재환을 잠식한다.
침대 위로 올라가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버린 재환이 잠시 느리게 숨을 쉬어낸다.
아무도 자신의 숨을 대신하여 쉬어주지 않는다.
재환이 이불 속에서 잔뜩 몸을 웅크려 백색의 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고요하게 벽을 쳐다본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흰 빛깔 본연을 자알 간직하고 있는 그것은 재환의 마음을 칙칙하게 끌어당겼다.
홀린 것처럼 재환이 그 위로 손바닥을 가져다댄다.
딱딱했다.
딱딱함의 정도를 감안해보며 벽 위로 손바닥을 움직이던 재환이 이내 고개를 돌려 천장을 살펴본다.
만개한 해바라기들이 보인다.
물을 주지 않아도.
햇살을 받지 않아도.
가볍게 붓을 놀려주면.
그가 기름으로 창조한 해바라기들은 몇 번이고 무턱대고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해바라기와 재환은 많이 달랐다.
재환이 질끈 두 눈을 감는다.
단 하루도 그림 연습을 쉬었던 적은 없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넘기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피곤한 느낌이 그를 계속해서 주무른다.
미지근한 심연의 기척에서 재환이 여자를 생각했다.
여자는 예쁘고.
예뻤을 것이고.
예뻤고.
또 예쁠 것이다.
재환이 느리게 생각을 멈춘다.
그의 시간엔 안타깝게도 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만히 떠올리니 여자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다.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직접 물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오늘 재환은 조금 이른 수면에 빠져들기로 했다.
나를.
잊어버리지 마.
“여기는 어쩐 일로.”
그의 음성엔 불필요한 모든 것들이 걸러져 있었다.
최소한의 감정을 가지고 언제나 모든 상황을 임하는 그의 자세는.
늘 여자의 눈에 썩 보기 좋지 못하다.
여자는 용케도 지리를 기억해내어 상혁의 집 앞을 찾아왔다.
몇 분의 시간이 흘렀는지 여자는 차마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해가 사라진 걸로 미뤄보아 여자는 자신이 뛰어온 거리가 그렇게 가깝지만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택운은 주택의 주차장 옆에서 한가로이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물론 여자가 먼저 그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다급하게 주택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여자를 택운은 휘파람 소리로 가뿐하게 제압해냈다.
천천히 떨어뜨린 담배를 구둣굽으로 밟아 지진 그가 여자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러나 여자는 역시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다.
택운을 올려다보는 여자의 눈초리가 심각한 경계심에 젖어있다.
숨 가쁘게 택운을 노려보던 여자가 땀으로 흠뻑 젖은 긴 생머리를 뒤로 넘긴다.
그에 택운이 아주 잠깐 웃음을 머금었다.
“질 나쁜 버릇은 여전하네요.”
“…….”
“말로 전하면 될 것을.”
“…….”
택운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번엔 또 어떤 문제죠.”
“…….”
“그 날 당하다 말았던…….”
“…….”
“……어쨌든 지금은 안 됩니다. 집 안에서 회의가 한창이라서요.”
“…….”
“보시는 바와 같이, 저도 이렇게 밖으로 쫓겨났거든요.”
여자의 눈동자가 애원을 담았다.
그러나 택운은 곧 고개를 숙임으로서 그 애원을 철저하게 외면한다.
여자가 뻐끔거리며 입을 열려던 찰나에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딱딱한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언제까지 맞아 지낼 작정입니까.”
“…….”
그러다가 정말 언제 한 번 크게 다치면…….
상혁의 경호를 맡고 있는 그가 어째선지 여자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모두 그의 영향일 것이라고 여자는 무르게 단정 지었다.
여자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가 폐 안으로 밀집되어 점점 뱉어내기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버린다.
여자가 숨을 멈췄다.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 정지된다.
택운이 무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등을 돌리고 잠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가 주머니에서 라이터와 담뱃대 하나를 꺼내어 새빨간 불을 붙인다.
기름을 섞으면 활활 멈춤 없이 타오를.
“혹시 사람 하나 그 쪽으로 가지 않았나요.”
“…….”
“제가 보냈습니다.”
“…….”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
“…같이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낫겠죠.”
“…….”
“그러니까 제발 처신 좀 똑바로 하고 다니세요.”
택운의 냉혈적인 눈동자가 여자에게로 닿았다가 떨어졌다.
반응 보니 그것 때문에 오신 것 같네요.
이제 가셔도 좋아요.
내뱉는 그의 목소리에 잔뜩 가시가 돋혔다.
여자가 천천히 걸음을 틀어 왔던 길을 다시금 곱씹어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걸 택운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 번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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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지 않을 우리들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