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입맞춤
9월의 첫 날 후와 휴게소 집 딸애를 학교에서 태우고 갔을 때, 휴게소 여자는 어떤 남자와 잔디밭 한가운데에 놓인 비치 파라솔 아래 앉아서 다기를 다 갖추고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름 볕에 그을린 검붉은 얼굴에 때에 전 낡은 점퍼와 작업복 바지를 입은, 막노동과 피로에 찌들어 보이는 강팍한 체격의 남자였다. 남자와, 남자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청바지를 입은 휴게소 여자가 다도를 행하는 사람들처럼 조심스럽게 차를 따르고 잔뜩 예의를 갖추어 마셨다. 주변엔 수도 셀 수 없이 많은 잠자리떼가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잠시 뒤에 남자가 일어섰다. 남자가 일어서자 여자는 휴게소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이내 나온 여자의 손엔 테이프와 새하얀 편지 봉투와 책이 들려져 있었다. 여자는 그것을 트럭에 올라앉는 남자에게 주었다. 남자가 두 손으로 받으며 무어라고 말을 하고 머리를 꾸벅했고 여자도 조용히 머리를 조아렸다. 남자의 트럭이 사라진 뒤에도 여자는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휴게소 길 앞엔 코카콜라 병을 산처럼 높이 쌓은 트럭과 긴 철근을 실은 트레일러와 트럭이 세워져 있고 운전기사들은 차 안에서 혼곤한 낮잠에 빠져 있었다.
“ 바흐의 G선상이 아리아가 심장 박동의 리듬을 닮아서 심장에 좋대요. 그래서 사두었다가 드렸어요. 저분이 심장이 좀 안 좋거든요. 새벽이나 한밤중에 운전할 때 들으라구요 ”
보온병까지 담긴 차 쟁반을 들고 나에게로 다가온 여자는 차 잎을 주전자에 넣으며 앞뒤도 없이 말을 했다.
“ 내가 쓰는 편지를 참 좋아해요.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손이 무쇠 솥뚜껑 같아요. 잠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은 자본 적이 없고 일하는 거말고는 아무것도 안 한대요. 회사와 학교 급식소에 부식을 대는 일을 했는데 그렇게 돈이 많이 벌리고 잠잘 틈도 없다는 거에요. 젊었을 때는 쉰 살이 될 때까지 십억을 벌겠다고 목표를 세웠대요. 그런데 지금은 안 그래요. 자기는 전생에 불전의 돈까지 훔친 죄인이라 돈은 모을 수 없는 팔자래요. ”
살다 보면 그런 것까지도 알게 되는 것일까. 자신이 전생에 불전의 돈까지 훔친 죄인이라는 걸…. 여자가 나의 잔에 차를 따랐다.
“ 남편이 갇히고 난 뒤 십오만원짜리 사글세 방에서 애 둘 데리고 살면서 함바집에서 등판이 소금밭이 되도록 일했고 야식집에서 밤여덟시부터 새벽 여섯시까지 꼬박 새우며 일했고 보험도 기웃거려보고 책도 팔아보았지만… 열 달째가 되니까, 가난도 피로도 더는 어찌해볼 수 없는 지경이 되더라구요. 한번 드러누우니 뒤집어진 풍뎅이처럼 넘어져서 일어설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누워 있으니 금세 방세 밀리고 전화 끊기고 쌀 떨어지고 기름 떨어지고… 하는 수 없이 그해 겨울에 아이들은 일흔여덟 살이나 먹은 노모 혼자 사는 섬으로 보내놓고 냉방에서 누워서 보냈어요. ”
여자는 연둣빛 맑은 차를 내 잔에 또 따랐다. 얼굴이 깨끗하고 표정도 편안해 보였다.
“ 내가 그렇게 지내니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살 궁리들을 가르쳐 주더군요. 면도 기술을 배워서 면도사가 되라는 미장원 아줌마, 노래방에서 남자들 흥을 돋우는 일을 해보라는 보험일 하는 언니, 학교 앞에 가서 핫도그와 오뎅을 팔아보라는 목사님 부인… 그런데 보험을 하는 아는 언니가 그 길밖에 없다며 무조건 남자를 소개해주기 시작했어요. 사귀면서 사정도 이야기해 돈도 좀 타 쓰고,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라는 거였어요. 사람을 그런 목적으로 소개받으니 술도 한 잔 들어가기 전에 구역질이 나서 못 앉아 있겠데요. 마침 그 영감도 내가 하고 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봐요. 몇 번 그런 소개를 받고 어떤 사람과는 몇 번 만나 밥을 먹은 적도 있었지만 몸을 주고 보살핌을 받는 그런 거래는 결국 안 되더라구요. 그런데 어느 날 언니가 좀 특별한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 남자는 정말 착한 사람을 돕고 싶어한다면서… 그 언니는 남자가 착한 사람 그러자마자 내 생각이 났었대요. ”
여자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 웃었다. 듬직한 어깨와 튼실한 허벅지. 귀가 드러나도록 짧게 자른 머리, 두툼하고 붉은 손, 좀 큰듯한 입과 실팍한 눈. 결코 예쁘지 않은 얼굴인데도 그 얼굴 구석구석에서 인간의 향기가 풍기는 묘한 감동을 주는 여자였다. 여자의 어깨에 잠자리 한 마리가 앉았다.
“ 가난하면 착하기가 쉽거든요. ”
“ 아니에요. 그악스러워지기도 쉬워요. ”
여자는 아득한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더니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 다른 도시에 사는 남자여서 이내 만나지 못하고 처음엔 서로 전화만 했어요. 남자는 꼭 밤 한시경에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세번 통화하고 난 뒤 또 전화요금을 못 내 전화가 끊겨버렸어요. 남자가 걱정을 하자 언니가 그만 사정 이야기를 다 해버렸어요. 남편이 살인미수 죄로 감방에 갇혀 있다는 것까지. 난 남자가 꽁무니를 감추겠거니 생각했어요. 가난한 여자를 사귀는 건 사실 누구나 꺼리는 일인데다 남편이 그런 사람이면 몸까지 사려야 할 지경이니까요. 그런데 그 남자가 언니에게 돈을 백만원을 보냈어요. ”
“ 왜요? ”
“ 그냥요. 전화요금도 내고 쌀도 사고 아이들 옷도 사 입히라구요. 그리고 앞으로 매달 백만원씩 도울 테니 힘껏 살라는 거였어요. ”
나는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 처음엔 또 무슨 무서운 일이 닥치려고 이런 일이 생기나 싶어 거절했어요. 그렇잖아요. 돈처럼 무서운 게 어디 있어요? 꼭 그 값을 해야 하는 게 돈이잖아요. 그런데 남자가 그러는거예요. 자신은 전생에 불전의 돈까지 훔친 죄인이라 이렇게 고된 일을 하고 살지만 돈 모으고 살 팔자는 어차피 아니라구요. 그러니 어차피 새어나 갈 돈, 좋은 일로 쓰면 좋겠다구요. 고학하는 남학생이라면 더 편할텐데, 남녀 사이라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자긴 상관 않는다구요. ”
그런 사람도 있구나… 나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자꾸만 끄덕거렸다.
“ 가난을 아는 사람이었어요. 주인집에서 콩나물 머리를 떼어 거름밭에 버린 것을 주워먹으며, 이걸 왜 먹을 거 없어서 굶는 우리에게 주지 않고 거름밭에다 내버리나 하는 생각들을 하며 자랐대요. 자기는 없는 사람, 어려운 사람 둘러보고 도우며 살 거라고 결심하면서요. ”
여자는 그런 말을 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좋은 모양이었다. 나지막하고 일정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낯빛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 그 사람 그 뒤로 이 휴게소를 얻어줄 때까지 열 달 동안 정말로 꼬박꼬박 백만원씩을 통장에 넣어주었어요. 하루에 서너 시간 자고 나머지 시간 내내 밥 먹을 시간까지 놓쳐가며 손이 무쇠 솥뚜껑처럼 험해지도록 일해서 번 돈으로요. 그 사람 손을 보면 술 한 방울 안 먹은 맨정신에도 눈물이 나요. 어찌 이리도 불쌍한 사람이 있나 싶어서요. 어쩌자고 이리 불쌍한 사람끼리 만났나 싶어서요. 그 사람은 밤 한시에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집 식구들은 자기가 들어오는지 나가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시간에 일 마치고 나에게 전화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대요. 정에 주린 사람인거예요. 내가 편지에 시를 적어 보내주면 아이처럼 즐거워해요. 얼마나 힘이 나는지 며칠 밤잠을 안 자고도 일할 수 있겠다고 해요. 자기가 보기엔 내가 정말로 착한 여자고, 진짜 여자래요. 여자인 척 하거나 여자로 보이려는 여자가 아니고 그냥 그대로 여자라고요. 제가 귀하대요. ”
“ 그 사람이 바로 그 남자였나요? ”
휴게소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러운 하천변에 피어난 꽃을 보는 듯 아릿한 마음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잣거리처럼 질척하고 팍팍한 세상의 밑바닥에 이런 기막히도록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구나… 하면서.
“ 아내고 있고 자식도 있는 남자에요. 이 휴게소도 그 사람이 세내주었어요. 그런데 여름 지나면 장사가 늘 이 모양인데다 애 아빠까지 자꾸 들이닥쳐 깨부수고 때리니, 혹 저 사람과 마주치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고… ”
나는 그 여자를 알고 싶어졌다.
“ …난 ooo이에요. 이름이 뭐예요? ”
“ 이름?… 고향 떠난 뒤 내 이름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
여자는 내가 대단한 사치를 권하기라도 했다는 듯 어리둥절해하더니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이름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 나인 서른이고, 은연이예요. 나은연. 부르지는 말아요. 그냥 알고만 있어요. 이래봬도 고향에 가면 아버지도 있고 엄마도 있고 착한 남동생도 둘이나 있어요. ”
은연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발설하듯 낮게 말했다.
“ …집 떠난 지 십오년째예요. 아버지는 공장에 다니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사시는지… ”
“ 왜 집에 안 찾아갔어요? ”
“ … 아버진 나를 안 보려고 해요. 남부끄럽다고. ”
은연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테이블 위에 툭툭 떨어졌다. 나는 위로도 못하고 그대로 앉아 눈물만 쳐다보았다. 그때 누가 나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 왔는지 김창수가 내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다른 때와는 달리 우울해 보이고 눈빛이 불안정했다. 숲에서 마주친 후로 삼일 만이었다. 그날 발목을 삐어 며칠 보건소를 다니며 치료를 했었다.
“ 갔다 와요. 후는 내가 데리고 있을게. ”
은연은 다 안다는 듯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낮게 속삭였다. 나는 얼른 움직이지 못하고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 남자는 왜 갑자기 또 이런 얼굴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일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금세라도 두 손을 다 들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찾아왔을까.
그는 계곡 아래 마을로 차를 몰고 갔다. 텅 빈 마을의 뒷마당 한켠에 차를 숨겼다. 흰색 페인트 칠이 더러 벗겨진 담을 따라 걷다가 대문이 뜯겨나가버려 집 안이 활짝 드러난 집 앞에 멈추어 섰다. 안채와 사랑채와 별채와 광들과 축사들을 가진 무척 큰 집이었다. 누가 떼내어갔는지 방의 문짝들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활짝 열려 있는 광 안엔 쇠스랑 호미, 가래 같은 농기구들이 녹슬어 넘어져 있고 안방엔 한쪽 귀퉁이가 깨어진 낡은 자개 장롱이 세워져 있고 마루 아래엔 사람이 살기라도 하는 듯 흰 고무신과 낡은 운동화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책이 흩어져 있는 방, 장작과 마른 나뭇잎이 뒹구는 검게 그을린 부엌, 커다란 장독들이 남겨져 있는 장독대, 집 뒤엔 내던져진 바구니들과 솥과 단지들.
조용한 빈집의 풍경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나무들의 모양이었다. 그것들이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명체여서일까… 나무들이 하나같이 스스로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젠 적막과 뿌리뽑히는 것에 대한 공포에도 지쳐버린 피폐한 함구의 표정이였다. 그가 힘겹다는 듯 긴 숨을 내쉬며 나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바닥이 내 손바닥에 닿자 그 단순한 접촉에도 가슴이 뭉클해지며 조용히 피가 떨렸다.
우리는 큰 집 사이의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갔다. 여름 동안 발목까지 자란 풀들이 먼지에 덮여 푸슬푸슬 시들고 있었다. 그곳 집들은 앞집들과 달리 슬레이트를 얹은 안채가 전부인 가난하고 허슬한 집들이었다. 문짝들은 주저앉고 벽지는 길게 찢겨져 검푸른 곰팡이가 자라고, 내려앉은 방바닥엔 찢어진 장판 사이로 풀이 올라왔고 여기저기 내던져진 살림살이들은 마치 오래 전에 드러난 짐승의 내장처럼 녹슬고 부패한 채로 함부로 뒤엉켜 있었다. 그런 비릿하고 황폐한 풍경 속에서 내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잎새마저도 함부로 자라난 감나무 가지에 적요하게 걸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정지해 있는 굴렁쇠 하나. 날카로운 가을빛이 녹슨 굴렁쇠에 부딪쳐 새하얗게 빛났다.
내가 손짓하자 김창수는 흘깃 쳐다보았다. 우리는 버려진 집들을 다 지나고 탱자나무와 대나무 사잇길을 지나 마을 곁의 늙은 느티나무 아래로 가 앉았다. 그곳에도 새 한 마리 울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앉아 있었다. 그렇게 피폐한 풍경 속에서도 그와 함께 앉아 있으니 이내 몸이 달아오르고 손톱 밑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도 나의 떨림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나의 어깨를 안으며 자신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제 막 처음 만난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왠지 차례까 뒤죽박죽되어 이제야 첫 키스를 하는 것 같았다.
“ 언젠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이런 식으로 수몰될 마을을 버리고 도시로 갔어. 도시의 가난한 산동네에서 집을 자주 옮기고 살면서 엄마와 아버지는 싸우기 시작했지. 엄마는 아버지와 결국 이혼을 했어. 엄마는 나를 아버지에게 맡기고 가버렸지. 나를 버린 거야. 내 나이 아홉 살이었어. 나는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미워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달렸는지 몰라. 해가 지면 나가 달리고 완전히 지친 뒤에야 집에 돌아와 쓰러져 잤어. 눈물 속에서 하늘의 해가 멀어져가고, 가로수들이 휙휙 지나가고 보도 블록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흔들리고 라이트를 켠 흰 자동차들이 흘러갔지. 그런 달리기는 그해가 다 가도록 저녁마다 계속되었어. 지쳐야 했으니까. 지쳐서 정신없이 잠들어버려야 했으니까. 엄마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달렸는데, 달리기를 멈추었을 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어. 그리고 아이는 자라서 아무 곳에도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지… ”
나는 그를 끌어안으며 기다렸다. 그가 나를 유린하도록, 나를 능멸하도록… 그러나 그는 그대로 동작을 멈추고 말했다.
“ 그날 숲길로 걸어들어가는 뒷모습을 본 뒤로 오늘까지 네 생각만 했어. 이상한 이이지. 내 몸이 다른 몸을 이렇게 그리워할 수 있다니. 한순간도 빈틈없이 집중할 수 있다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송두리째 감정이입이 되다니… 엉망진창이야. 도로 엄마가 도망갔던 불행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거 같다고… ”
그는 해결해야 할 난제에라도 부딪친 사람처럼 낙심해했다. 나는 김창수가 엄마라고 말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그를 낳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웃옷의 단추를 풀며 그의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 … 이대로 마을이 물에 잠겨버렸으면 좋겠다. ”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브래지어를 풀어 바닥에 밀쳐놓으면서 그의 몸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온몸의 점막이 부풀어올라 나의 통제를 벗어나는 지점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되었다. 이내 땀이 흘렀다. 그의 입술이 나의 두 눈을 차례로 감겼다. 눈앞이 새하얗게 지워져갔다. 누군가 나의 눈을 뽑아가는 듯이… 빠져나간 눈 속에 새하얀 솜을 틀어막는 듯이. 원피스 아래 속옷이 구두 사이로 빠져나가고 마침내 그가 비스듬히 누운 나의 몸 속에 파고들어왔을 때 나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긴 경련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도망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 그만, 그만해… ”
내가 너무나 다급하게 비명을 지르가 그는 잠시 멈추었다. 그의 것은 내 살 속에서 나무둥치처럼, 사원의 기둥처럼 마구 부풀어올라 나를 산산조각으로 터뜨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 나의 눈에 닿을 듯 너무나 가까이 있었다. 내리막길을 내닫는 자전거의 바퀴살 같은 홍채가 경악하고 있었다.
“ 그만, 제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아… ”
그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수철같이 튀어오르려는 나의 몸을 온통 덮친 채 끝나지 않을 듯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마을에서 나오는데 계곡길 모퉁이에서 버스가 나타났다. 김창수는 눈에 띄게 난처해했다. 나 역시 할 수만 있다면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었지만 흐트러져 있고, 화장을 거의 지워져버린 채 고치지도 못한 상태였다. 맞은편 차가 승용차라면 최소한 몸을 아래로 숙이기라도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버스는 승용차보다 조금 더 높아서 그 조차도 불가능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버스를 스쳐지나가려고 했다. 버스의 차창은 활짝 열려 있고 길조차 빠듯해 비켜갈 때는 속도를 서로 한껏 낮추어야 했다. 버스 안의 마을 사람들과 학생들이 일제히 김창수와 나를 쳐다보았다. 한 노인과 남자애는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기까지 했다. 버스 뒷자리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며 어리둥절해하는 애선의 얼굴도 보였다. 버스가 스쳐간 뒤 침묵이 계속되었다. 휴게소에 이르자 나는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다음주 토요일에 친정에 갈 거예요. 언니 제사예요. 늘 후와 둘만 갔어요. 하룻밤 자고 올 거예요. ”
“ 언니? ”
“ …사고로 죽은 언니가 있어요. ”
“ 그 날 내가 근처에 가면, 하룻밤 같이 보낼 수 있어?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버지는? ”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 돌아가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