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me ; 안개 -02 '난 분명히 도망쳐 나왔고, 어디쯤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왜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있지?'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청소년센터에서 한솔을 제외하고는 들고 나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한솔의 방. 한솔이 지금 누워 있는 곳은 그 곳 이었다. 그리고 밖에서는 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아니면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한솔이오빠! 나와봐, 할 말 있어."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당시 한솔이 도망쳐 나올때 죽어가던 그 여학생이었다. 평소처럼 단정하고 예쁜 모습이었지만, 묘하게 위화감을 주고 있었다. 눈에는 초점이 반쯤 나가 있었고, 곳곳에서 붉은 피가 흐르는 듯 했다. 이건 또 무슨 경우야, 한솔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한발짝 걸음을 떼었을 때, 여학생이 달려들어 한솔의 목을 움켜쥐고는 빙글빙글 웃었다. 소름이 끼치도록 밝은 미소였다. "왜 그냥 갔어? 응? 난 피가 옷을 다 적실 정도로 맞아서 죽어가는데 오빠는 되게 빨리 도망치더라? 그래서 어디까지 도망갔어? 살아서 행복해? 좋아? 응?" 아니야, 아니야, 오해야. 살아서 행복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한솔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한솔은 그저 여학생의 목소리를 들으며 목을 죄일 수 밖에 없었다. "왜? 대답 안해줘? 좋았냐니까? 행복하냐고 물어보잖아? 응? 대답하기 싫은 거야? 아니면 그냥 살고 싶었어?" 여학생은 그렇게 말하며 한솔을 움켜쥔 손에 힘을 강하게 주기 시작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한솔이오빠는 말을 할 수 없구나, 지금? 잊고 있었어." 마치 한솔을 이해해주겠다는 관대한 표정과 말투였지만, 손의 힘은 더더욱 한솔의 목을 눌러오고 있었다. 놓으라고도 할 수 없는 한솔은 창백히 핏기가 가시는 얼굴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강한 압박을 곧이곧대로 당하고 있다. 한솔의 괴로운 표정은 여학생에게도 아주 잘 보였다. 하지만 여학생은 한솔을 움켜쥔 손에 더더욱 힘을 주며 알수 없는 괴성을 질렀다. 괴성소리가 생생하게 귓가에 와닿는 순간 한솔은 꿈에서 깨어났다. 한솔은 여전히 어젯밤 잠들기 전 그 곳에 있었고, 어느샌가 내리기 시작한 비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한솔에게는 빗방울이 단 한번도 닿지 않았다. 한솔의 몸은 잠든 상태 그대로였다. 뭐지, 이건. 몸을 일으키는데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네요?다행이다."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하자면 정장을 빼입고 있었고, 금발이라 하기는 애매하지만 아무튼 밝은 노란색 계통의 약간 긴 머리.그리고 우산을 들고 한솔의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거에요? 추울텐데. 어디서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는 몰라도 여기 이렇게 비 오면 되게 추워요. 감기 걸리기 딱이야." 남자는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한솔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솔은 말을 할 수 없었다. 맞다, 나 목소리가 안나오지. 어제의 끔찍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왜 내가 이렇게 된 걸까. 하늘 위에서 아주 깊은 지하로 떨어지는 것 처럼 한솔에게는 다시금 생각난 이 상황이 너무나도 잔인하고 비참하고 실로 참혹했다. 그냥 울고 싶었다. 그래도 처음 본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한솔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줄테니 말만 하라는 듯이, 남자는 한솔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솔은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앙 깨물었다. "지금은 말 못하겠어요?" 한솔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든 앞으로 평생이든, 말로는 못 할 테니까. 괜히 남자에게 미안해졌다. "아..미안해요. 그럼 여기 계속 있을거에요? 어디 갈 곳은 있어요?" 한솔은 고민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18년 인생중 한솔이 있을 자리는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왜일까, 남자는 전적으로 한솔을 위하고 그에게 맞춰주려 하고 있었다. 마치 이 곳에 있어달라고 하면 정말 우주가 끝날 때까지라도 여기 있어주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남자의 태도가 고마우면서도 낯설었다. "근데 너무 춥죠? 일단 일어나요. 차에 들어가서 몸 좀 녹이고 그래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한솔을 잡아 일으키려 했지만, 한솔은 반사적으로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남자도, 뿌리친 한솔도 서로 당황했지만 남자는 애써 웃으며 다시 우산을 한솔에게 씌워줬다. "잠깐만 기다려요. 가서 담요 가져올게요." 이 추운 곳을 비맞고 그냥 갔다오겠다고? 한솔은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금방 갔다 올게요. 그 말만을 남기고 남자는 빠르게 어디론가 뛰어갔다. 한솔은 아무 생각 없이 바닥에 돋아난 풀을 조금 잡아 뜯다가 이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바보같았다. 왜 손을 뿌리쳤을까. 순간적인 행동이였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나쁜 사람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만큼이나 위험한 것도 없지만 쓸데없는 선입견과 의심 역시 꽤나 위험한 것이다. 확실히 남자의 태도는 따뜻하고 다정했다. 의심스러우면서도 너무나도 고마웠다. 나중에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고맙다는 인사부터 꼭 해야지, 생각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에 젖은 남자가 담요를 제 품에 싸안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한솔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한솔은 괜히 왈칵 눈물이 났다. 남자가 한솔에게 담요를 둘러주는 순간, 한솔의 눈에서 눈물이 한 두 방울 떨어졌다. 한솔은 순간적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당황하며 눈물을 감추려 했다. 남자는 그것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그리고 한솔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그냥 울어요. 괜찮아."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솔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쉴새 없이 흘렀다. 남자는 가만히 한솔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솔의 손을 꼬옥 잡고, 마치 한솔에게 주문을 걸듯이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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