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훈아, 나 결혼해." 한창 벚꽃이 예쁘게 흩날리던 4월 중순, 세훈은 그렇게 이별통보를 받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데이트였다. 아침 일찍 만나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었다. 걸어다닐때도 남들 시선은 의식하지 않은 채 손을 잡고 걸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마지막으로 카페에 들어가, 세훈은 카페라떼를, 준면은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카페라떼 한 잔,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ㅡ 라는 소리가 들리고, 세훈이 커피를 가지러 갔을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세훈이 자리에 앉으면서 테이블 위의 하얀 청첩장을 보았을 때, 그리고 준면이 입을 열었을 때 모든 것이 뒤틀렸다. 청첩장 W. 승백태 세훈은 제 손에 들린 하얀 청첩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준면의 깔끔한 성격을 입증해주듯 청첩장 역시 단조로웠다. 신랑 김준면, 신부 이은주. 장소는 신라호텔 웨딩홀. 빌리는 데에 많은 비용이 들었을텐데. 신부가 돈이 많구나- 하고 어렴풋이 짐작하는 세훈이었다. 가만히 청첩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새삼 기억 속에서 흐려져가던 과거가 뚜렷하게 형태를 찾는 듯 싶었다. 준면은 세훈의 과외선생님이었다. 과외선생님과 학생의 사랑이야기는 흔하고, 준면과 세훈의 연애 초창기도 인터넷에서 흔히 보던 사랑이야기와 별 다르지 않았다. 유일하면서도 큰 차이점은 과외선생님과 학생의 성별이 동일했다는 사실정도였다.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세훈쪽이었다. 19살의 패기를 보여주겠다는 듯 준면의 거부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들이댔다. "세훈아, 공부해야지. 대학 안갈거야?" "선생님은 좋아하는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공부가 돼요?" "아, 음.. 그래도 넌 고3이고.." 늘 비슷한 맥락의 대화가 반복됐다. 세훈은 문제를 풀라고 준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준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계속 이대로 있다간 준면의 얼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될정도로. 그리하여 시작했던 가벼운 내기가 그들의 미묘한 관계에 불을 지폈다. "세훈아, 우리 내기 하나 할래?" "네?" "이번 수능에서 세훈이 너가 목표하는 대학에 붙으면 내가 네 소원 하나 들어줄게." "..." "싫으면 말고." 아, 아니 좋아요! 세훈은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킨 채 콜! 을 외쳤다. 이건 신이 내려준 기회였다. 이때부터 세훈은 더 이상 준면에게 들이대지도 않고 공부만 하기 시작했고, 그 노력에 배상해주듯 결과는 당연히 기대 이상이었다. 성명 오세훈, X대학교 최종합격을 축하드립니다. "문자 보낸거 봤어요? 나 대학 합격했어요." "축하해." "이제 소원 들어주셔야죠." "소원이, 뭔데?"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둘의 목소리는 묘하게 들떠있었다. 아마 준면도 세훈의 소원이 무엇일지 짐작을 했을 것이다. 남은것은 세훈이 소원을 말함으로써 둘의 미묘한 감정과 관계를 정의내리는 것 뿐. "제 소원은," "..." "선생님이 저를 좋아해주는 거예요." "..." "우리, 연애할래요?" 그렇게 시작된 연애는 조심스러웠다. 그 이유는 둘이 연애를 처음 시작했기 때문이 아닌, 주변인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동성애가 인정받지 못하는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그들의 연애는 조금은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물에 잉크가 번지듯 공공장소에서의 스킨십을 자연스럽게 느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 어찌 비춰질지 생각하지도 않은 채로 손을 잡고, 백허그를 하며, 가끔은 볼뽀뽀도 서슴치않았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시선과 비난을 받기도 했다. 5월의 하늘은 맑고 날씨는 따뜻했다. 5월에 결혼하는 것은 아마도 신부를 배려해주기 위함이었겠지. 세훈은 혼잣말을 하며 넥타이를 고쳐맸다. 자신의 애인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데 기분이 좋을 사람이 어디있겠냐만은, 세훈은 그간 그와 함께 하면서 느꼈던 행복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며 호텔 입구로 발을 내딛었다. 직원들에게 물어 웨딩홀이 있다는 쪽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세훈이 본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준면이었다. 준면 역시 세훈을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전과 같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잠깐 밖에서 얘기좀 할 수 있을까? -준면이 형] 문자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선 세훈은 호텔 밖으로 나왔다. 신랑이 이렇게 밖에 있어도 되는거예요? 잠깐이니까 괜찮아.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웃던 준면은 이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세훈의 손을 붙잡았다. 저... "네?" "우리가 잠깐이지만 연애했다는 사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도 알다시피..." "형한테는 2년이 잠깐이에요?" "아, 세훈아 그게 아니라ㅡ" "...알았어요." 동성애는 대한민국에서는 자랑스러운 사실이 아니었다. 그걸 알고 있던 준면은 2년간의 연애 사실을 부인하기로 결정하였고, 세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세훈에게는 그런 준면이 잔인하다고 느꼈다. 결혼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신부는 그녀의 아버지의 손을 떠나 준면의 손을 붙잡았고, 신부의 말과 함께 둘은 수줍은 듯한 키스를 나누었고,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세훈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신혼여행은 하와이로 가기로 했다며, 풍선으로 잔뜩 장식된 고급스러운 차는 준면과 신부를 태운 채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세훈은 자신을 차를 탄 채 집으로 향했다. 결혼식 이후, 세훈은 이전처럼 대학을 다녔다. 과제에 시달리기도 하고, 종강 후에는 술파티도 하였드. 가끔은 유흥가에서 밤을 새는 둥 준면과 연애할 때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탈을 즐기기도 했다. 준면을 잊어보고자 여자를 사귀기도 하였지만, 이전만큼의 설레는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준면과의 연락이 끊긴 지 4개월 정도 지났을까, 세훈의 집으로 엽서 한 장이 도착했다. 엽서에는 와이키키 해변을 배경으로 한 채 해맑게 웃고 있는 준면의 사진과 함께 준면이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쓴 듯한 짧은 편지가 있었다. '이곳이 마음에 든다는 아내의 의견을 따라서 몇개월 더 지내기로 했어. 세훈아, 너는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어?' 편지를 다 읽은 세훈은 쓴 웃음을 지으며 엽서를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준면은 자신이 당신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세훈은 자신이 미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준면은, 끝까지 잔인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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