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 오세훈 사장님
집에 와서 한참 동안이나 그의 생각에서 못 헤어나왔다. 속이 상해서 울면 화를 내던 그의 모습, 다정하게 웃어주며 내게 말하던 그의 모습까지도.
'웃는 거 처음 보네.'
'….'
'참 예쁘다. 보기 좋아.'
'넌 바보라서 이런 말 못 알아 듣지?'
'…'
'앞으로는 울지 말고 웃으라는 뜻이야, 적어도 나하고 있을 때 만큼은.'
적어도 그와 있을 때 만큼은 웃으라고 했다. 나는 거울을 보며 축 내려간 입꼬리를 애써 올려 보였다. 어색하고 생소하다. 웃는 내가 낯설게 느껴질 만큼 나는 그동안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살아 왔나 보다. 한 편으로는 씁쓸 하면서도 자꾸만 떠오르는 그의 말에 히죽 웃게 되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람 대하는 법을 못 배운 나에게 그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사랑'이라는 낯설고 묘한 감정까지. 정체를 모르는 묘약을 마신 것 마냥 알 수 없는 증상들이 매일 나에게 따라 붙는다.
'아까 그 말 농담 아니야, 네 아빠도, 오빠도 전부 해주겠다는 말.'
짙푸른 색의 밤하늘 빛이 창문새로 스며 들었다. 그의 문자를 보며 나는 화면을 쓸어 보았다. 꿈처럼 금새 사라질 것만 같이 낯선 모습. 아까 전에 그가 왜 그렇게 액자를 쓸어대며 아픈 눈빛으로 봤는지, 나는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악덕 오세훈 사장님
"우리 백화점 사장 완전 어린년한테 정신 팔렸잖아~ 비서라고 들어 앉은 게 얼마나 재수가 없던지, 고 년이 아주 사람 홀리는 기술이 대단 하나 봐?"
검은 색과 흰색 따위의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유니폼을 입은 아웃도어 매장 직원이 깔깔대며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매장 청결 상태…, 그리고 직원들의 친절도를 체크 해 오라는 그의 지시에 맞게 파일바인더를 가지고 다니며 매장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업무를 수행 하고 있을 때 나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릴 게 뭐람, 적어도 나 때문에 그가 피해 보는 일은 없었으면 했는데, 조금 뒤 손님이 오자 환하게 웃으며 친절하게 설명을 하는 그녀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친절도 항목에 최상으로 표시를 했다.
그는 그런 파일 바인더에 담긴 종이를 계속해서 대강 넘기곤 책상 위에 툭 던져 버렸다.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가 말했다.
"직원들 하는 말 신경 쓰지 마."
"안 써요, 신경."
"다들 쉬는 시간인데 따로 할 얘기도 없고, 시사 얘기를 하기엔 덜 자극적이잖아."
"상관 없어요."
"억울하지, 나는 그 놈이랑 제대로 손도 잡아 본 적 없고 입 맞춰 본 적도 없는데. 지들이 뭐라고."
그는 구태여 하지 않을 말까지 붙여 가며 설핏 웃었다. 그런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손톱이나 매만지며 앉아 있을 뿐이었고, 소파쪽으로 다가와 내 옆에 앉은 그는 화들짝 놀랄만큼 갑작스런 행동을 했다. 내 손을 깍지 껴 꼭 잡는 그의 행동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손 되게 작네."
"…."
"우리 놀러 나갈까?"
웃었다. 그가 햇살처럼 밝고 다정하게 내게 웃어 줬다. 마음이 그의 따뜻한 웃음으로 물드는 듯 내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굳이 횡설수설 화제를 돌리려는 노력이 아니라, 우울한 일 쯤은 말끔히 잊어도 된다는 듯. 일 하는 곳이 백화점 안이라 좋은 점이 한 두개가 아니다. 따로 나갈 곳 없이 사장실이 있는 15층만 벗어나면 됐으니까. 어깨에 손을 얹은 아저씨와 함께 바로 아랫층에 있는 영화관을 들어 갔다.
"영화 볼까?"
"무서운 거 못 봐요."
"그럼 이거 보자."
꼭 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세차게 뛰는 심장은 정상적으로 돌아 올 생각을 안했고 얼굴에선 뜨끈뜨끈 미열이 났다. 그가 집어 들은 영화 포스터는 예쁜 분홍 빛으로 인쇄된 두 남녀의 모습이 보였고, 곧이어 영화관에 입장한 우리는 스크린에 비친 두 남녀의 열렬한 사랑을 집중해서 보았고, 1분…, 10분…, 그리고 30분…. 지루고, 또 진부하고 상투적이기도 하지만 사랑스러운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는 꽤 깊고 절절하고 뜨거웠다. 똑같은 스토리에 비슷한 뉘앙스의 영화를 봐도 이렇게 와닿지는 않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몰입이 되고 마음에 크게 와닿는지, 스크린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아저씨와 나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샐쭉대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에는 세훈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때의 모습이 오버랩 돼 보였다.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서로 자존심을 바짝 내세우며 싸웠고, 급기야 여자 주인공이 훌쩍이며 우는 장면에 다다랐을때 그가 입을 열었다.
"왜 저렇게 울지."
조용하게 그 한마디를 뱉은 그는 설핏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 보았다.
"너, 처음 만난 날."
"…."
"내가 뭐 죽을 죄를 지은 건가, 넌 뭘 그렇게 잘못한 건가."
나는 민망함에 괜히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의 한 마디가 방금까지 눈을 떼지 못 한 그들의 모습처럼 내 마음에 쿵. 와닿아서.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그를 미워했던 지난 날의 마음이 세상의 어떤 누구보다도 바보같았음을 절감했다.
"넌 화 내는 방법을 몰랐고, 나는 혼자 울기만 하는 누군가를 달래는 방법을 몰랐고."
"…"
"그런 너를 사람들은 널 만만하게만 보고."
"…"
"그래서 생각 해 왔지, 아, 내가 얘를 지켜줘야겠구나."
"…."
"네가 다른 사람을 만만하게 볼 수 있도록."
악덕 오세훈 사장님
스티커 사진기에 들어간 그는 이건 어떻게 하는 거냐며 내게 물었고, 그에게 팔짱을 낀 나는 브이 표시를 하며 카메라를 바라보라고 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 본 그는 여섯 번의 촬영 끝에 입술 끝을 꾹꾹 누르며 많이 어색 하다고 했다. 웃는 게 어색한건지, 아님 나랑 이런 사진을 찍는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단 건지, 나는 살짝 귀여운 그의 말에 키득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내 스티커 사진기에서 나온 사진을 보고 슬몃 웃던 그의 모습, 그게 내 마음 속의 무엇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으로 만들었다.
악덕 오세훈 사장님
그와 나는 딱히 할 일이 없단 걸 알면서도 백화점 안에서 구태여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내려고 애를 썼다. 그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구경하거나, 나에게 걸맞는 악세사리를 한 번 착용 해 본다던가. 서로의 얼굴을 웃으며 바라 본 그 시간들이 혹여 꿈일까 두렵던 마음에 그랬던 걸까, 시간은 흘러 밤 9시가 되었고, 누군가 말 해주지 않으면 열두 시 쯤으로 알 만큼 침묵 속의 새벽은 깊어져만 갔다. 우리 집 앞에 차를 주차시킨 그가 나를 깨웠다. 집 가서 자야지, 응? 피곤에 찌든 몸이 찌뿌드드했다. 기지개를 켠 나는 차에서 내리며 열린 자동차 창문 새로 보이는 그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건만, 정작 그는 웃기만 하다가 차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열린 대문 앞에 서 있는 그를 나는 묘한 기분에 한참 동안이나 완상하다가, 그가 뱉은 한 마디에 계단을 한 칸씩 밟기 시작했다.
"너 집까지 들어가는 것만 보고 싶어서 그래."
계단을 겨우 두 칸 밟았을 때 였다. 충동적으로 나는 그가 뒤 돌아 있는 곳에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어깻죽지 조금 더 아래에 얼굴을 파묻고 등허리를 감쌌다.
"나랑 자요."
껍데기. 사람들은 모두 매끈매끈하게 어울려 살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웃음이라는 고운 결의 껍데기로 자신을 칭칭 둘러 싸고 오른 손을 맞잡는다. 나같이 껍데기가 마모 될 대로 마모 돼 시커먼 속까지 투과 돼 보이는 별 볼 일 없이 가엾은 인간과 달리. 모순이다. 하얀색 불투명한 껍데기로 둘둘 둘러싼 채로 마찰 없이 지내기를 바라며 나 같은 껍데기는 천박한 취급을 한다는 게. 원만한 대인관계라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간절한 것이었다. 거칠거칠한 내 껍데기와 오물 가득한 속은 보는 사람 마다 거부감이 들게 했으며, 내 모습 만으로도 날 혐오하는 사람이 다수였다. 누군가와 따뜻한 마음을 나눠 본 적이 없으며, 얼굴을 맞대고 웃는 표정으로 이야기 해본 적도 없다.
내 마음 상태는 엉망이 될 대로 엉망이었다. 마음의 온도가 냉골임을 항상 당연 한 것인 줄 알던 내게 세훈 아저씨는 그 무엇보다 따뜻하고 복잡한 존재로 다가왔다.
낮이면 항상 따뜻했다. 햇살 이외의 존재가 내 마음을 항상 따뜻하게 달구고 있었으니까. 그 존재와 헤어지고 나면 항상 마음이 시려웠다. 그게 내겐 더없이 무서운 존재였다.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은 차가움 때문에 그에게 자자고 말했다. 그가 떠나가고 나면 어쩌면 두 배로 시려워 질지도 모른다는 모순적임을 알면서도….
나랑 자요. 그 한마디가 시린 밤 공기를 타고 그의 귀에 닿았다. 뒤를 돌아 나를 본 그의 눈빛은 안타까움과 애상적임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 왜 이래, 상태가 얼마나 최악인거야. 그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리는 듯 한 착각이 일었다. 내 팔을 떼어 내고 그는 내 볼에 입을 맞췄다. 길고 따뜻하게. 긴 밤이 감히 차가움으로 나를 괴롭힐 수 없도록 긴 따뜻함을 볼에 물들여 주었다.
내 주머니에서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연 그는 내 신발을 벗겨주는 정성까지 보였다. 내 핸드폰을 가져가 자신의 번호를 찍은 그는 내 손에 다시 핸드폰을 들려주며 속으로 외쳤다. 혼자 있다고 느끼지 말라고.
"잘 자."
"…."
"악몽 꾸면 꼭 전화 하고."
열쇠를 내 주머니에 다시 넣어준 그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돌아 섰다.
사랑해. 그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 뒤로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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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