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 오세훈 사장님
11
"아픈데 술 마셔도 돼?"
"괜찮아요, 가끔은 잠 안 오거나 외로울 때 마셔요."
아픈 몸으로 혼자 있기 싫다는 나의 고집에 못 이겨 아저씨의 집까지 가고야 말았다. 우린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많은 대화를 했다. 일주일동안 서로의 빈자리가 얼마나 크게 느껴졌는지, 내가 일주일 동안 무엇을 했는지, 그는 일주일 동안 호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사실대로 다 털어 놓는다. 보육원 원장에게 찾아 갔었다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었단 걸 알 수 있는 유일한 내 혈육인 부모님이 누군지만 알려달라고, 그렇게 애원을 했는데 결국은 안 됐다고. 기대는 하지 않았다며 씁쓸하게 웃는 내 등을 아저씨는 조용히 쓸어내려 주었다. 그의 향기가 옷깃으로부터 은은하게 퍼졌다.
"내일은 일어나면 일단 병원부터 가자."
"…."
"그리고…, 뭐 하지?"
한 팔로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던 아저씨는 사랑스러운 눈빛과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그러면 나는 조용히 말 한다. 놀이공원 가요 우리. 아저씨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내린다. 놀이공원 가고싶어? 아픈데? 평소같았으면 화 냈을 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저씨는 어찌 보면 투정일법한 말을 전부 받아 준다.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 영영 이런 상황에서 헤어나오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리에 쿡쿡 박힌다.
"어렸을 때 애들은 주말이나 휴가 때 부모님이랑 놀이공원 갔다고 자랑 했었는데…, 전 보육원에서 애들이랑 단체로 갔던 게 끝이에요. 그나마 있는 추억은 길 잃어버려서 엉엉 울던 거."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래, 가자, 놀이공원. 생각 해보니까 나도 그런 데 가 본 기억이 일 관련해서밖에 없네. 그것도 성인 다 돼서."
잔에 남은 와인을 빙빙 돌리다 이내 쭉 들이켜 버린 아저씨는 내 머리를 뒤로 넘겨 주며 말한다.
"이제 자야지, 내일 갈 곳도 많은데. 내 방 가서 자. 화분 있는 쪽이 아저씨 방이야."
나는 덮고있던 담요를 걷고는 소파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걸음을 내딛으려던 차에 휘청거리는 몸을 아저씨가 벌떡 일어서 붙잡아 주었고, 제게로 풀썩 기대는 나를 놀랄 새도 없이 번쩍 안아 들었다. 슬리퍼와 바닥간의 마찰음만이 서로간의 정적을 애워 쌌고, 어두컴컴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커다란 침대에 나를 조심스레 눕힌 아저씨는 스탠드를 켰다.
"너무 많이 마셨나보다. 너 술 약하지."
"안 약한데…."
아저씨는 안 약하다고 고개를 젓는 나의 행동에 바람빠지는 소리로 웃으며 이불을 주섬주섬 끌어 올려 가슴까지 덮어 주었다. 살포시 침대에 앉은 아저씨는 몸을 낮춰 내게 가까이 다가와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잘 자, 내일 보자."
그리고 순간이었다. 주춤거리던 손으로 몸을 틀려는 그의 와이셔츠 깃을 꽉 붙잡은 나.
"가지 마요…."
"…."
"다른 사람들처럼…, 나 두고…, 그렇게 가지 마요…."
은은한 스탠드 조명이 그의 슬프고 따뜻한 눈길을 온전하게 비춘다. 그는 내 머리를 쓸어 내린다. 나는 그런 그에게 입을 맞춘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깊어진다. 하루라는 단위로는 부족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그를 향한 마음은 단지 이전까지 완벽하고 철저하게 고립된 삶을 살았던 이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내게 다른 사람과들과는 다르게 운명적인 특별함을 지니고 있어서였을까. 운명애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이런 내게 그가 운명이라고 누군가 내게 말한다면 맹신하리라 나는 장담한다. 아저씨는 깊은 입맞춤 끝에 입을 떼고는 숨을 몰아 쉬며 인상을 쓴다.
"너…, 뭐 하는 거야."
"…."
"네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한지 알고 있긴 한 거야?"
서투르다. 모든 게, 미숙하다. 너무 많이. 그러나 그런 그의 표현 방식이 좋다. 인상을 쓰며 심각한 듯 떨리는 눈동자를 한 채로 나를 바라보던 그는 다시 내게 부드럽게 입을 맞춘다. 그의 불규칙적인 숨결이 얼굴을 간질이고 쿵쿵거리는 서로의 심장소리가 와닿는다. 서로의 숨결이 오고가는 이 느낌이 낯설지만 싫지 않다. 그와의 진한 입맞춤으로 모든 걸 위로받는 기분이다. 그렇게 긴 입맞춤 끝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뗀 그는 한참을 내 눈을 바라 보다가는 깊게 한숨을 짓는다. 다시 나와 눈을 맞추던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저씨가 부처다, 진짜.
"미안해요, 감기 옮았을 텐데."
"그 뜻으로 얘기한 거 아닙니다, 아가씨. 얼른 코 잘 생각이나 해."
"잠이 안 와요…."
"얼굴이 새빨가네, 잠이 참 안 오기도 하겠다. 이리 와."
가만히 나를 내려다 보던 아저씨는 다리는 침대에 걸치고 상체는 눕힌 애매한 자세로 있던 제 다리를 올려 턱을 괴고 누웠다.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맨 채 아저씨에게로 다가 갔다. 아저씬 그런 나를 감싸 안아 토닥였다. 서로의 얼굴에 닿는 숨결이 여전했다. 고립되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내가 혼자가 아니다. 내 삶엔 나의 존재를 제외한 누군가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젠 깊이 콕 틀어 박혀서 빼낼 생각도 할 수 없이.
-
워후~~~~~ 오늘이 제가 썼던 글 중에 수위가 제일 높은 것 같습니다.
뭉이님 잼잼님 모카님 징징이님 정동이님 곰돌이님 세젤빛님 항상 사랑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