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랑 약속을 잡았다.
대다수의 여자들이 그렇듯이, 약속 시간을 정하는 것에서부터 메뉴 선정에까지 걸리는 시간은 참 길고 길었다.
매일 방 안에서만 뒹굴거리던 탓에 기름이 잔뜩 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우리가 정한 메뉴는 치킨.
저녁으로 한 마리 시원하게 뜯기로 했다.
치킨.
......치킨.
01. 엔치킨 프라이드
w. 행정우편
"어머 야, 집에서 매일 뒹굴거리더니 얼굴 하얗게 뜬 거 봐."
"시끄러워. 파우더야 멍청아."
"제발 부탁인데 네 피부색에 맞는 화장 좀 할래? 얼굴만 하얘서 난 무슨 가오나시인줄 알았다."
"넌 파마나 다시 해. 멀리서 걸어오는데 무슨 예수인줄."
맞을래. 주하가 까만 네일을 고양이마냥 바짝 세우며 위협했다. 제 딴엔 파마가 나름 잘 나와서 만족한 듯 한데 내 눈에는 예수나 다름없었다.
늬가? 하는 표정으로 비웃어주니 주하가 약이 올라서 씩씩댔다. 이거 십만원짜리 머리야!
어이쿠, 십만원이나 하셨어요? 대단하네~ 그렇게 창의적으로 십만원 날리는 사람은 또 처음이다 야.
하하,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서로의 외모에 대해 끊임없이 지적하며 우리가 다다른 곳은 엔치킨 프라이드. 하룰종일 폰만 붙들고 사는 주하가 찾아온 맛집인데 주인이 그렇게 잘생겼댄다.
모양새는 일단 합격점이었다. 통나무로 만든 듯한 외관에 간판도 센스있게 잘 달려 있었다.
딸랑, 하고 문을 열었다. 약간 어두운 실내에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 곳곳에 달려 있어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손님이라곤 우리 둘 뿐이었다. 종업원도 보이지 않아서 그냥 갈까 생각하던 찰나에, 가게 곳곳을 둘러보던 주하가 내게 손짓했다.
주방에서 까만 피부의 키 큰 청년이 종업원들하고 옹기종기 앉아서 별그대를 보고 있었다.
까만 남자는 뒤에서 정말 쉴새없이 떠들었다.
와 김수현 진짜 잘생겼다. 전지현누나 진짜 예쁘다.
유부녀인데 진짜 장난 아니네. 대박 진짜.
종업원들은 이골이 난다는 듯
맞아요, 그러게요, 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주하랑 나는 인기척을 내고는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눈빛을 교환했다.
잘못 온 거 아냐?
여기 맞아. 엔치킨 프라이드.
그럼 저 사람이 그 소문의 차학연이냐? 젊은 나이에 창업해서 돈냄새 좀 맡는다는 그 잘생긴?
ㅇㅇ마즘.
저렇게 말 많다고 블로그 후기에 있디?
조용히 말해 바보야.
니 목소리가 더 커 병시나.
뭔 지랄이야.
조용히 해. 온다.
"주문하시겠어요?"
와, 가까이서 보니까.........잘생겼는데 까매....나는 잠깐 이성을 잃고 차학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주하가 테이블 밑으로 내 다리를 툭 치지 않았으면 언제까지고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을 만큼, 차학연은 잘생겼다.(그리고 까맸다.)
내가 자신을 계속 응시하자 그는 살풋 웃어보였다.
헐. 뭔데 미소 내스타일. 취향저격.
주하는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차학연이 건네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제일 잘 나가는 게 뭐에요?"
"어......기본이 제일 잘 나가는데요, 이번에 새로 메뉴 하나 생겼거든요. 그것도 인기몰이 좀 하고 있어요. 순살떡강정."
"그럼 그걸로 주세요."
"음료는 필요 없으세요?"
"콜라? 콜라 하나요."
"알겠습니다~20분 정도 걸리니까 잠시 기다려주세요."
주하는 능숙하게 주문을 하고 발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쳐다봤다.
"뭐."
"뭐가."
"왜 빨개지는데."
"안 빨간데?"
"뭔 소리야. 원숭이 엉덩이마냥 불그죽죽하구만."
티나냐. 나는 두 손으로 뺨을 식혔다. 잘생겼어.
말투도 조근조근하니 내스타일이야.
키도 크고.
피부도 까만게 나랑 딱 맞네.
"20년동안 세상에 없는 줄 알았던 남친이다, 주하야."
"뭔 뻘소리야."
***
분명 양이 많았다.
치킨에 가래떡에 감자튀김까지 얹은 덕에 족히 3인분은 돼 보였다.
하지만 주하와 나는 치킨이 나오던 그 순간부터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치킨을 마시기 시작했고,
20분 만에 바닥을 드러낸 접시는 휑하기 그지없었다.
"나 치마 터지겠다."
"내가 그 작은 거 몸에 꾸역꾸역 입고 나올 때부터 알아봤다."
"지는."
"내가 뭐."
주하는 그렇게 말하며 백으로 슬며시 배를 가렸다. 뱃살도 없는 자식이......
우리가 정신없이 칼로리를 섭취하는 동안 가게 안은 손님이 꽤 들어차서 말소리로 가득했다.
주하와 나는 콜라를 드링킹하며 치킨과 한몸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치느님과의 영접이란 역시.
무방비 상태로 배를 두드리고 있는데 은은한 조명 위로 스윽, 그림자가 생겼다.
"메뉴는 괜찮으셨어요?"
사람이 인기척이 없어!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위에서 울리는데 정말 먹던 콜라를 그대로 뱉어낼 뻔 했다.
나는 놀라서 눈가가 빨개질 정도로 기침을 해댔다. 이 격정적인 기침소리에 주변 테이블의 시선이 집중되는 걸 느꼈다.
아 쪽팔려. 그래도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난 다음 순간,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가 내 등을 토닥였기 때문이었다!
멋쩍게 웃으며 등을 살살 두드리는데, 거짓말 안 하고 정말로 승천하는 기분이었다.
살다살다 외간 남자한테 등 두드림도 당하는구나. 황홀해 죽을 것 같았다.
주하는 기침에 딸꾹질까지 하는 날 한심하게 쳐다봤다.
멍청이.
.......나도 알아.
차학연은 그렇게 내 기침이 멎을 때까지 등을 토닥이다가 뭘 더 묻기가 곤란한지 그냥 그대로 가 버렸다.
우리도 한바탕 소동을 부린 후라 더 앉아있기엔 눈치가 보였다.
카운터에는 알바생이 있었는데, 우리가 계산을 하려고 하자 그가 또 다가왔다.
또 딸꾹질 할 뻔 했다. 잘생긴 사람이 계속 옆에 있으니 숨쉬는 방법도 까먹을 지경이었다.
6번 테이블이시죠, 하고 알바생이 물었다. 차학연은 알바생의 어깨 너머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순살떡강정 하나랑 콜라 하나, 해서 만 칠천......"
"콜라 계산에서 빼드려. 서비스였어."
나니? 주하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다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까 콜라 그냥 시켰는데?
나와 주하의 시선이 맞닿았다.
서비스야?
아닌데?
뭐야 이 사람, 우리 시험하나?
말하지 말고 먹고 튀어?
야 그래도 이미 먹은건데 말은 해야지.
누가 말해?
니가.
씽. 왜 내가 말해. 난 얼굴로 주하에게 찡찡거렸지만 결국 계산은 주하 몫이었다.
나는 내 최대한의 고운 목소리를 뽑아내려 애를 쓰며 말했다.
"콜라요, 서비스 아니고 그냥 시킨 건데....."
"에이, 내가 그냥 줬다고 쳐요. 그 뭐 얼마나 한다고."
아 하느님. 차학연은 생글생글 웃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윙크도 했다. 느끼한데 멋있어.
주하는 그럼 나쁠 것 없다는 듯 카드를 내밀었다. 띠리릭 소리와 함께 우리의 뱃속으로 사라진 치킨이 액수로 빠져나갔다.
카드를 긁고 영수증을 떼는 내내 차학연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흥분되게 이 사람이.
수고하세요, 하고 가게를 나섰다. 그는 손수 문까지 열어주었다.
막 나가려는 참에, 그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다음에 또 오면 그땐 샐러드 서비스 해드릴게요. 꼭 다시 와요.
.......앞으로 평생 치킨만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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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글은 진짜 생판 처음이라서 어색하네요 껄껄 이것도 독방에서 엄청 짧게 조각글 썼던 거 다시 들고 온 거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주하는 계속 나올 예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