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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 48 >
그가 집에 들어오질 않았다. 어제 혼자 집에 돌아오고 일어났더니 시간이 훌쩍 지나 해가 머리 위에 떠 있는 데 그가 없다. 항상 사라지는 새벽도 아니고 아침도 아니고 오후인데 그가 어디에도 없다. 왜 없는 거야. 좁은 집이 휑하니 넓어보였다. 전정국 하나 없다고. 같이 집에 올 걸 그랬나. 집에 안 들어올 줄이야. 일어나고 몇 분 째 전정국 생각만 하고있다.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어제 내가 잘못한 건가 싶기도 하고 돌아오면 사과부터 해야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왜 들을 사람은 오질 않는 걸까. 벽에 걸린 화관 다섯 개와 선반에 가지런히 놓인 장미 두송이를 쳐다보았다. 인정해야겠다. 나는 지금 그가 보고 싶다.
빨리 씻은 다음 옷을 대충 갈아입었다. 갈아입은 옷도 무척이나 편한 복장이긴 했지만 잠옷을 입고 외출을 할 수는 없으니까. 전정국을 찾으러 나갈 셈이었다. 어디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아는 게 없지만 집에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건 싫었다. 혹시나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전정국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 석진 오빠에게 전정국이 오면 알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꽤나 기다렸는데 안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눌렀다. 강우도 집에 없는 건가. 조금 더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뜨려는데 둔탁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지러 간다며…….”
내 얼굴을 보고 힘없는 목소리를 낸 건 다름 아닌 전정국이었다. 놀라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불규칙하게 빠른 숨소리도 그렇고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까지. 문고리를 잡고 있는 손은 조금 떨리는 듯했고 그는 문에 기대다시피 서 있었다. 아픈 건가.
“무슨 일이야.”
그가 힘들게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귓가에 들리는 약한 음성에 괜히 마음이 약해지면서도 그가 내뱉은 말은 달갑지 않았다. 방금까지 아픈 그의 모습에 걱정되던 마음이 살짝 접혔다. 무슨 일이냐니.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우리 집이 아니라 이 집에 있는 이유는 뭐고 내가 찾아온 것이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만드는 그 태도는 뭐고. 밀려오는 서운함에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그의 손이 손잡이에서 미끄러졌다.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닫힌 문을 재빨리 열었지만 이미 문이 잠겨버린 후였다. 문을 세게 쾅쾅 쳤다.
“전정국, 문 열어봐!”
문 안쪽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손에 땀이 찼다. 아프다고 생각했을 때 가만히 있지 말고 바로 뭐라도 했어야했는데. 그 한 마디가 뭐라고 욱해서는. 오히려 화를 낼 사람은 내가 아닌 그였다. 클럽에서부터 그런 식으로 행동한 건 나였으니까. 돌이켜 보니 사과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저 안에서 아파서 앓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미안함은 더 커졌다. 문을 계속 두드렸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국아!! 문 좀 열어줘.”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하게 문 좀 열어봐.”
“전정국!!”
이쯤 되니 안에서 쓰러져 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가 아플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는데. 악마라도 아플 수는 있지. 약을 사러 가야 하나. 약을 사오면 우리가 먹는 약인데 약발이 들어? 그가 아픈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갑자기 코가 시큰해졌다. 무슨 일 생기는 건 아니겠지. 석진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고 끝까지 기다렸지만 오빠는 전화를 받질 않았다. 그 다음에 건 전화도. 막막한 느낌에 손이 조금씩 떨렸다. 마지막으로 강우에게 전화했다.
- 누나?
강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감정이 터져버릴 뻔했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를 모르겠다. 불안정한 목소리로 강우에게 비밀번호를 물었다.
- 일이공사요. 석진 형 생일.
“아... 고마워.”
호흡을 가다듬으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경쾌한 음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바로 앞에 그가 쓰러져 있으면 어쩌나한 걱정은 기우였다.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있는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작위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선명하게 방 안을 뒤덮고 있었으니. 그는 침대에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바닥에 불편하게 앉아 침대에 기대고 있었다. 들썩이는 그의 등을 보자 눈에서 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속상해 죽겠다.
“많이 아파?”
내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가 살짝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 손을 댔다. 차가워.
“어떻게 온 거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는 나를 가만히 보고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약한 신음을 듣고 있으려니 미안한 마음이 나를 꾹꾹 찔렀다. 나 때문에 일부러 앓는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서툴지만 그를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내 손길에 놀란 듯 한 그는 순순히 나를 따라주었다. 내 도움이라기 보다는 내가 하려는 대로 그가 일어나서 침대에 누운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그의 몸에 이불을 꼭 덮어주었다.
“몸이 너무 차가운데.”
이불을 하나 더 덮어줘야할 것 같았다. 다른 이불을 찾으려고 몸을 일으키자 그가 내 손에 깍지를 꼈다. 그의 손도 역시 차가웠다.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 이렇게 차가워.”
“그러니까.”
목소리에서부터 아픔이 전해져 눈썹을 구겼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불 더 가져올게. 잠시만.”
“그거 말고.”
“응?”
“너.”
“나?”
“이게 더 따뜻한데.”
그가 깍지를 낀 손을 흔들었다. 뭐지. 내 손이 따뜻해서 그런 건가.
“일단 이불 하나만 더 가져오고 손잡아줄게.”
내 말에 정국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퍼졌다. 웃는 것도 힘들어 보여. 미안해 죽겠다. 빨리 이불 하나 더 가져와야지. 조심스레 깍지 낀 손을 빼내려고 하자 더 세게 잡아오는 그였다. 세게 잡는다고는 해도 이내 힘이 풀렸다. 얼마나 아프면. 손을 빼고 가려한 때였다.
“가지 마.”
뒤돌아서 정국을 보았다. 금방 올 거라는 말을 해주려고 입을 여는데 그가 먼저 핏기가 싹 가신 입술을 열었다.
“이불보다 정여주가 필요하다고.”
“......”
또 흔들린다. 내가 필요하다는 그 몇 마디로 날 흔들어 놓는다. 잠시 동안 말 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픈 건 전정국인데 내가 더 아픈 듯한 착각이 든다.
“나 말하기 힘들어. 그러니까 그냥 와.”
아픈 주제에 힘은 어디서 난 건지 내 손을 확 잡아서 자기 옆에 눕혀버렸다. 내가 순순히 그가 하는 대로 누워버린 것도 맞지만. 그가 내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울긴 왜 울어.”
“그냥... 너 쓰러진 거 아닌가 해서...”
“이렇게 걱정할까봐. 그래서 못 들어갔어.”
“많이 아파?”
“아픈 거 안 알려주려고 했는데.”
“그걸 왜 숨겨.”
“너 걱정할까봐. 그런데 네가 아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가 나를 확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 내가 완전히 들어가서 쏙 안겨버렸다. 차가운 그의 몸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해도 아무 말도 안하고.”
“몸은 왜 이렇게 차가워.”
“네가 녹여줘. 따뜻하다.”
더 이상 가까울 수도 없는 거리에서 그는 몸을 더 밀착시켰다. 쿵쾅대는 심장에 괜히 그의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말았다.
“병원에 가보면 안 돼?”
“무슨 병원이야.”
“약은?”
“안 통해.”
“그럼 어떡해야 낫는데?”
“네가 나한텐 약이야.”
“그게 무슨…….”
“정여주 의사 맞네.”
“지금 농담이 나와?”
“그 때 의사가 쓸데없다고 해서 미안.”
“말 돌리지 말구.”
“정여주가 내 주치의하면 되겠다.”
위에서 들리는 그의 숨결에 귀를 기울였다. 신기하게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가는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정말 내가 도움이 되고 있는 건가. 내 체온이 그에게 전해지고 있는 걸까.
“그 남자는 누구야.”
“남자?”
“클럽에서 만난 놈.”
“아......”
내 머리 위에 턱을 파묻은 그의 무게가 느껴졌다. 무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닌 그의 존재를 알려주는 적당한 무게. 그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그냥, 신경 쓰지 마. 그렇게 가버려서 미안.”
“알고 있네. 그 놈이 이상한 짓은 안 했어?”
“응.”
“또 클럽가면.”
안고 있던 팔을 살짝 풀고 내게 눈을 맞춘 정국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와 내 입술이 맞물렸다. 내 아랫입술을 깨문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소년다운 그의 눈과는 반대로 덮쳐오는 그의 입술에서는 소년스러움이라곤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눈을 감고 감각을 그에게 집중했다. 편안하고 따뜻했다. 그를 끌어당겼다. 숨이 가빠지면 그가 숨을 불어넣어주었고 그렇게 서로의 호흡을 나누었다. 조금 긴 키스가 이어지고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여기서 안 끝나.”
그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쳤나봐. 귀까지 빨개지는 것 같다. 그의 시선을 회피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뭐로 끝날 줄 알고.”
날 놀리는 그의 말에 헛기침을 해댔다. 잔뜩 붉어진 얼굴은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 부끄러운 마음에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부끄러워하면서 클럽엔 무슨 용기로 갔대.”
“너야말로 여자 도와주러 갔잖아.”
“여자?”
“윤주인가 뭔가 하는 여자. 그래서 잘도와주셨어요?”
“윤주 아니고 윤수인데. 남자고. 스토커새끼 처리하면서 만난 경찰놈.”
윤수를 윤주로 들은 거야? 미친. 헛다리 제대로 짚었네. 아 창피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귀여워 죽겠네.”
“......”
“다짜고짜 화부터 내서 미안.”
“갑자기 무슨 사과야.”
“그래도 우리가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건 심하잖아.”
“그럼 뭔데?”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 머리칼을 정리해준 그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따스함이 가득 느껴졌다. 사랑받는 느낌. 사랑하는 느낌.
“사랑해.”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도 감사합니닷(*'▽'*)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