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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 25 >
며칠 전 새벽에 본 그 남자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꿈이었을까. 꿈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내 정신이 너무나 또렷했다. 그렇다고 진짜라기에는 믿기가 힘들다. 장난스럽게 내게 인사를 하던 남자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태풍이 오는 날에 5층인 우리 집을 창문을 통해 들어온 것도 그렇고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고 느낌에 쎄했다. 악마가 아닌가 싶었다. 경찰에 또 신고를 해봤자 얻는 것도 없을 테지만 나는 또 신고를 고민했다. 내가 핸드폰을 들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보고 112를 치는 순간 눈앞의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남자가 없어진 것을 알아 챈 즉시 활짝 열린 창문으로 뛰어갔다. 창밖에는 비바람만 몰아칠 뿐 거기를 다니는 사람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체감 상 1분도 안 되는 그 시간이 꿈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찝찝한 느낌은 있었지만 넘기기로 했다. 고민 끝에 정국에게도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 때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나를 괴롭히는 통에 마음이 흔들린다. 말하면 걱정할 게 분명한데.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말을 해야 하는 건가. 가뜩이나 요즘 피곤해 보이는 녀석이라 말하기도 미안하다. 아 머리 아파. 쭈그려 앉은 채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 꺼내요?”
옆으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남자치고는 작은 손으로 언제 나온 지 기억도 없는 자판기 밑의 음료수를 친절하게도 직접 꺼내주었다. 자판기 앞에서 누른 음료수를 꺼내려 쭈그려 앉았다가 불현듯 드는 그 때의 생각에 음료수를 꺼내지도 않고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니.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구나. 캔을 건네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이네요.”
순간 굳어지는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 근육에 힘을 줘야했다. 또 만났다. 박지민 실장.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 가려는데 실장님은 나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괜찮아서 다행이에요.”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깜빡거리는 실장님은 나에게 말을 덧붙였다.
“그 날 화재요.”
“아…….”
“괜찮냐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여주 씨 연락처도 없고.”
“화재가 나기 전에 저도 후문으로 빠져나갔어요.”
“진짜 다행이다. 그 때 먼저 나가버리는 게 아니었어요. 여주 씨한테는 미안한 일만 생기네요.”
그가 내가 미처 받지 않은 캔을 따서 건넸다. 시원한 소리가 났다.
“그 분이 여주 씨 엄청 걱정하셨어요. 불길에 뛰어드려는 걸 겨우 막았어요.”
정국을 말하는 듯했다. 전정국도 나를 걱정했구나. 세나를 붙잡고 나갔으면서. 그 얘기에 대한 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감각을 통해 전해주었기 때문에 굳이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세나는 내가 아는 애잖아. 민세나와 나의 관계는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내 앞에 있는 병원 실장의 집으로 입양된 소식은 좀 놀라웠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걔는 걔만의 사정이 있는 거고.
“무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박지민 씨가 악수를 청했다. 와이셔츠 소매 사이로 보이는 손목 위에 찬 고가의 시계가 빛났다. 치프샘께 들은 말로 정의하자면 박지민 씨는 낙하산이었다. 실력 있는 낙하산. 호감형인 외모에 젠틀한 성격이라 여자 간호사 분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친해지기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좀 나와는 보이지 않는 거리가 있는 사람 같다. 악수에 응했다.
“실습도 조금 있으면 끝나겠네요.”
“네.”
“인턴 지원 우리 병원에 할 거죠?”
우리 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보통 이곳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윤기 선배도 그렇고. 나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아는 선배들도 많고 이곳에서 실습을 했으니 편하긴 할 테지만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게 여겼던 일이 조금 꺼려졌다. 단순히 박지민 실장과의 미묘한 관계만은 아니었다.
“세나는 내년에나 복학할 생각이래요.”
궁금하지 않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클럽에서부터 느낀 점인데 이 사람은 말을 잘 이어나갔다. 이제 말이 끝날 것 같으면 또 다른 말을 꺼내곤 했다. 지금처럼. 나는 이번에도 대충 답했다.
“네…….”
“세나가 여주 씨랑 친구란 얘길 해줬어요. 뒤늦게 그 이야길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두 사람을 소개시켜주려고 했네요. 괜한 친절이었죠?”
친구. 친구는 아니다. 그냥 대학 동기. 민세나는 아니, 이제 박세나일까. 세나는 나에게 대학 동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휴학을 해서 얼굴을 못 본지도 오래되었으니 내 범주 안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지금 갑자기 존재감을 다시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민세나는 예뻤다. 그리고 나와 닮았다. 내가 좀 더 마르고 차가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정말 똑 닮았을 것이다. 화장을 열심히 하고 좀 신경 써서 예쁜 옷을 입고 나가는 날이면 하루에 적어도 두세 번은 민세나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한창 외모를 꾸미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새내기 시절에는 외모적인 부분으로 세나 닮았다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야했다. 성격이 정반대였다는 사실이 그나마 민세나와 나를 구분해주었다. 민세나는 도도하고 차가웠으며 나는 마냥 밝았다. 그리고 민세나가 나랑 닮긴 했어도 훨씬 예뻤다. 그건 나도 인정했다. 예쁜데 특유의 성격 때문에 외모로 주목받기는 했어도 다른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질 못했다. 처음엔 나랑 닮았다는 이유로 친해져보려고 했던 나도 결국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동기 사이로 관계를 정의해야했다.
민세나와의 사이가 묘하게 틀어진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 둘은 오묘한 관계를 유지했다. 민세나의 입장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우리의 사이가 뒤틀린 건 민세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봤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속으로는 묘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사이. 친해지려고 다가갔을 때 차갑게 내쳐버리는 건 그 아이의 성격이니 어쩔 수 없다고 그냥 그러려니 이해했다. 그래도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말을 걸고 밝게 인사를 하는 나에게 돌아오는 건 민세나의 그 차갑고 딱딱한 말이었다. 그 태도는 사람을 지치게 했다. 얼마 못 있어 나는 그 애와 친해지는 것을 포기했다. 그것만이라면 좋았다. 마음이 상하긴 해도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민세나와 나를 둘러싼 갖은 소문이었다. 내가 민세나를 따라한다는 뜬소문이 돌았다. 입는 옷이나 화장품. 뭐 그런 것들. 그 정도 가십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 사실이 아닌 소문에 상처받는 성격은 아니었고 내 편인 사람들도 적잖이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문제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했다.
“이번 여름에는 다이어트나 좀 해보자.”
아무 의미 없이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친구들에게 한 말이었다. 친구들은 이번에는 몇 일가냐면서 놀려댔고 나 또한 먹성이 좋은 내가 얼마 못 있어 포기할 거란 사실을 잘 알았기에 웃으면서 반응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상의 사소한 수다에 터무니없는 의미가 부여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동기들의 대부분이 듣는 교양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야 여주 다이어트한대.”
“오, 살 빼게?”
“너 정도면 다이어트 안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동기들의 말에 여름이고 하니 마른 몸매가 좋다고 대답한 나였다.
“그럼, 여주 완전 세나랑 똑같아지는 거 아니야?”
“그치, 세나 짱 말랐지.”
세나를 보며 몇 마디 씩 던지는 동기들에 휩쓸려 나도 세나를 향해 엄지까지 치켜들며 거들었다.
“그러니까 세나 몸매 완전 부러워.”
대수롭지 않게 흘러가던 동기들과의 대화의 맥이 뚝 끊긴 건 그때였다. 우리 가까이에서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제 할 일을 하고 있던 세나가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넌 내가 마른 게 좋아 보여?”
“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향해 쏘아붙였다.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니 그만 풀어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이 아픈 게 부럽냐고 너는.”
완전히 싸해진 공기를 남겨놓은 세나는 그 길로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그와 함께 소문은 더해지고 더해져 일파만파로 커졌다. 민세나에게 지병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동기들은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없었고 그런 의미로 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픈 애에게 막말을 한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화장이 옅어지고 기본에 충실한 패션을 고수하게 된 것도 그 때부터였다. 나는 강의실을 나간 세나를 쫓아 바로 사과를 했고 세나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내 사과를 받았다. 당사자인 우리 둘은 그렇게 사건을 끝냈지만 제 3자인 다른 사람들은 그러질 못했다.
나를 두고 악질의 소문이 퍼지긴 했지만 그것도 썩 견딜만했다. 내 인성을 운운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그 정도 수준 밖에 못 미치는 사람들이니까 오히려 그들이 더 안타까운 것이었다. 나의 도덕성이 성격이 오해 투성이인 그 몇 마디로 명확하게 결론나지 않는 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당사자인 세나와 내가 잘 풀었으면 그걸로 그만이다. 더불어 소문의 명줄도 그리 길지 않았다. 민세나와 내 관계가 묘하게 뒤틀리도록 직격타를 날린 사건은 세상에서 우리 둘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애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일까지 다시 꺼내게 만든다.
그 때 보았던 죽음의 불길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동기들끼리 갔던 엠티에서 머물렀던 별장에 화재가 났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화재 당시에 별장에 있지 않아 피해를 면했다. 민세나 빼고. 그 애는 도망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로 그곳에 있었다. 새빨간 색을 자랑하며 민세나를 집어 삼키려던 그 불길에서 죽음의 문턱을 스스로 넘으려 한 그 아이를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용기로 불길에 뛰어들었는지는 나도 의문이다. 죽기 위해 발버둥 치던 민세나를 나는 결국 다시 살게 만들었다. 내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온 민세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나를 원망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게 민세나든 누구이든 사람은 살려야하는 게 맞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 세나를 예전처럼 대하기는 힘들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잡하게 밀려와서. 내게 들이닥친 다양한 감정들을 추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세나를 마주하는 걸 힘들어할 때. 혼란스러움을 잠재워준 건 다름 아닌 그 아이였다. 민세나가 휴학을 했다.
이후로는 별 사건 없이 학교를 다녔다. 각자 공부하느라 바빴고 민세나를 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그 애의 존재감은 차츰 줄어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 존재감이 아주 작은 파편이 된 상태에서 그 애를 몇 년 만에 본 것이다. 나는 그 애에 대해 잘 몰랐다. 워낙 자기 얘기를 안 하는 애였으니까. 아프다는 것도 그 말을 통해서 알았고 뜨거운 불길 속에 남아 죽음을 선택하려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휴학을 한 사이 입양이 되었다는 것도 박지민 씨를 통해 들었다. 아무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고 관심도 없었지만 그 애의 등장은 날 또 묘한 느낌에 휩싸이게 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잘 알고 있다. 갑자기 등장한 세나의 탓도 아니고 과거의 사건 때문도 아니다. 내게 오던 전정국이 나 말고 그 애의 손을 잡았다는 것. 세나의 등장도 그 애와 관련해 겪었던 사건들도 아닌 그 조그만 사실 하나가 나를 옭아맸다.
항상 예쁜 말 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달이네요:)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