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트라즈 붓을 쥔 손이 힘겹다. 당겨오는 팔은 더더욱 어깨를 무거이 짓눌렀다. 바람 또한 세차게 불었다. 한 구석이 구겨져 바람 따라 일렁이는 도화지. 그 속에 제 못난 얼굴이 비추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어 학연은 고개를 숙였다. 속죄하는 알카트라즈 감옥의 죄수 마냥 그리 제 자신을 가라앉혔다. 심연의 바닥 끝까지 몰아 넣었다. 무언가를 그려내는 것이 좋았다. 세상 만물을 담아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게 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화가. 거창하면서도 쓸쓸한 단 하나의 단어를 목에 걸었다. 그림을 곧잘 그렸기에 학사 단상에 올라 표창을 받기도 하며 수상 따위를 독차지 하기도 했다. 때론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을 보며 웃었다. 그림에 마음을 빼앗긴 가련한 시대상. 완벽하지 않은 미학에 그 가치가 더욱 높게 평가되고 있는. 이제서야 인정 받는 비운의 화가. 저는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붓을 일그러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성 벽면에 화려히 걸려 있는 그 누군가의 그림처럼 빛나리라, 그리 생각했다. 현실은 혹독했다. 행복과 자만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최고라고 생각했던 ‘화폭에 담는 실력’은 ‘밥 벌어 먹는 것’이 되어 곁에 남았다. 남루하기 짝이 없는 나무 이젤. 길 한복판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는 것에 불과한 소박하디 소박한 인생으로 전락했다. 채광을 뿜던 꿈은 으스러진지 오래였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얼굴께로 쏟아지는 노을빛이 노랗게, 또는 붉게 타올랐다. 학연에게 직업병이 있다면 뇌의 명령보다 손가락 끝이 더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아름답다, 라고 생각하기 전에 간사한 붓이 먼저 동작했다. 유려한 선 몇 개를 긋자 그럴싸한 그림이 탄생했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으로는 노을을 쫓으며 쉴 새 없이 팔을 움직였다. 밥 벌어 먹는 것에 불과한 보잘 것없는 손이라고 해도 감각은 여즉 죽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신만만했던 시절. 그 때처럼 학연은 눈꺼풀을 슬며시 감고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오른손에는 여전히 진갈색 붓을 쥔 채로. 들어차는 파도가 일렁임을 느끼며. 그림 되나요. 자그마한 소리가 공백이 여문 길을 울렸다. 손에서 떨어진 붓이 굴렀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동태를 살피자 그 종착점은 낯선 검지 손가락 마디였다. 울퉁불퉁한 마디를 지니고 있는 길게 뻗은 그 손가락은 이내 붓을 집어 들고서 몸을 일으켰다. 학연의 시선이 올곧게 그를 향했다. 제 텅 빈 손바닥이 낯설었다. 붓을 건넨다. 학연은 손을 뻗어 그를 받고선 자그마한 목소리로 감사의 표시를 전했다. 오똑 솟은 콧날을 지닌, 눈썹이 짙은 남자는 그에 가벼이 웃었다. 의아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임이 틀림없는데 어딘가 익숙했다. 익숙함이 온몸을 갉아 먹으려 들었다. 여전히 그림이 볼 품 없네. ……. 텅텅 비어서는. 학연의 동공이 크기를 키워갔다. 무언가에 세게 얻어 맞은 듯한 기괴한 감각이 불어치는 파도 마냥 제 자신을 감싸 안았다. 남자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미완성의 캔버스 위로 그의 그림자가 빈틈없이 드리워졌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콧대 높은 남자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비릿한 금붕어의 아가미를 봄직한 느낌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네가 뭔데 함부로 입을 놀려.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혓바닥 위를 우회했다. 나 기억 못 해요? 또다시 웃으며 입을 놀린다. 이유를 알 수 없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눈동자. 어딘가 낯익으나 뇌리에 선명하지만은 않은 얼굴이었기에 학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낯짝에 내리쬐는 석양은 더욱 환히, 그러나 어두운 면을 가진 채 여전히도 타올랐다. 벽장 괴물 호흡할 수 있는 곳이었다. 금붕어의 아가미가 물 속에서 끔벅이며 헤엄치듯 학연에게는 당연했다. 좁은 방. 침대 너머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지나 커다란 파열음이 났다. 부모라는 사람들. 그 여자와 남자는 매일 언성을 높였다. 그들의 사나운 입술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 중엔 학연의 이름도 빼곡히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을 차단한 채 귀를 틀어 막은 학연은 입술 또한 깨문 채였다. 늘 생각했다. 신이 단 한 가지 실수한 것이 있다면 그녀의 다리 사이를 지나 탄생한 불쌍한 생명. 그것은 자신이었기에. 얼룩진 벽지보다 더 꼴 사납게 허물어진 제 마음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고서 더욱 양옆으로 벌어질 뿐이었다. 벽장을 찾아 들었다. 여닫이 문을 당기자 자그마한 공간이 저를 침범했다. 망설이지 않고 그 아득한 어둠 속으로 몸뚱아리를 밀고 들었다. 벽장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희미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숨쉴 수 없는 오지. 말라 죽을 것임에 분명한 이곳 밖의 세계는 불쾌했다. 또 왔니. 덜컹였다. 귓바퀴 부근이 뻐근했다. 귀를 잡아당기는 손길은 결코 투박하지 않았기에 학연은 놀라지 않았다. 응. 그저 작게 대답했다. 익숙한 듯이. 벽장괴물이 웃었다. 겁쟁이. 겁쟁이라서 숨는구나. 늘 그는 자리했다. 어두운 이 공간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도 그는 옆에 무릎을 쭈그리고 저와 함께 했다. 어깨를 두드려주지는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그 한 쌍의 눈은 두드림보다도 더 깊게 스며들어 따스하게 했다. 여전히 귀를 잡아당기고 있는 벽장 괴물에게 물었다. 겁쟁이가 잘못은 아니잖아. 그럼 울지 마. 어린 나는 어느새 부연 뺨 위로 고통의 산물을 점 찍고 있었나. 잘못이 아니니까 울지 마. 이번엔 어깨를 두드린다. 어깨를 넘어 목덜미로 전해지는 온기로 하여금 눈꺼풀이 감겼다. 벽장 문 새로 흐르던 빛 또한 옅어졌다. 부러진 연필 주름 진 손등은 그 어떤 거북이 등 껍데기였던가 우리매 짐까지 한 아름 고달프게 지어 가시는가 따스히 감싸주어 주름 사이에 빼곡히 들어 찬 당신의 눈물은 나의 옷자락을 훔치는 홍숫물이외다 무슨 시에요? 등 뒤로 들이닥친 목소리에 놀라 눈을 끔벅였다.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던 연필 끝이 부러지고 까슬한 자국이 종이 너머로 번졌다. 어색하게 웃고만 있는 학연의 모습에 재환은 좀 더 고개를 숙이고 시를 살펴보았다. 획 하나까지 긁어 내리던 시선은 종이 위에 얹어진 가무잡잡한 손에 머무르다, 팔꿈치에 닿았다가, 길게 뻗은 목덜미에 도달했다. 어머니구나. 그거. 옆자리에 자리를 내어 앉으며 말하는 재환을 바라보던 학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번진 연필 자국 위로 엄지 손가락을 굴리자 옅어지는 대신 거뭇하게 퍼졌다. 두어 번 하릴없이 그 짓을 반복한다. 정적이 이어졌다. 나는 산문을 주로 취급해서 시를 잘 못 써요. 누군가에 대한 감정을 함축해서 표현하기에, 내가 너무 커서. 넘쳐버릴 것만 같거든요. 그래서 못 쓰겠어. 학연의 고개가 이따금 재환을 향해 돌려졌다. 시는 우회적이었다. 하고 싶은, 또는 하고 싶었던 그 모든 감정을 하나의 단어로 축여 글자를 하나하나 그려가는 것. 그럼에 모순이 많고 설의와 역설 또한 잡다하며 시를 애정하는 이들 중엔 겁이 많은 사람이 많았다. 저 또한 그랬다. 사랑하는 이에게 진솔한 편지 하나 쓰지 못한 채 공책 한 귀퉁이에 1연, 2연 써 내려가는 겁쟁이. 그러므로 학연에게 오른손 중지에 박힌 굳은살은 결코 영광의 결과라고 말할 수 없었다. 솔직한 글을 쓸 수 있잖아요. ……. 시로는 그러지 못할 때가 많거든요. 이리 저리 돌리고 피하고. 왜 못 해요? 이재환이 순식간에 종이를 빼앗아 들었다.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로 주머니에서 제 연필을 꺼내 들어 몇 자를 적어 댄다. 이거 봐요. ……. 얼마든지 솔직해질 수 있는데.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늘 만큼 땅 만큼 그 열 다섯 자에 담긴 결코 특별할 것 없으며 서투르나,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글이 가슴으로, 눈께로, 귓가로 침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