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너Ⅱ
그의 이야기
“오늘이 마지막이야.”
“…왜?”
“떠나려고.”
나를 둘러싼 세계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내 일상에 들이닥친 너는 마지막까지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구나. 담담하게 끝을 이야기하는 너에게 내가 지어 보일 수 있는 표정은 단 하나, 그밖에는 전부 숨겨야 할 것들 투성이었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기로, 내 모든 감정을 숨기기로 약속하고 시작한 관계니까. 그래서 너의 말에 한없이 가라앉은 내 마음도, 그런 마음을 가득 담은 눈빛도 보여주면 안 되는 그런 관계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숨을 한 번 고르고 나서 태연한 눈으로 너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네 눈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버린 나의 진심을 비추는 거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러고 보니 너는 전에도 떠날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몸을 나눈 날, 아니, 내가 처음으로 네게 마음을 쏟은 날, 너는 언젠가 외국으로 떠날 거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해본 소리인 줄 알았는데. 농담으로라도 떠난다는 그 말이 싫어서 홧김에 너를 끌어 안아버렸던 기억이 난다. 살짝 놀란 듯한 너의 표정도, 그 표정에 또 한 번 무너져버린 내 마음도 여전히 생생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떠날 거라는 말은 나로 하여금 너에게 조금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만들었으므로.
그 후 지하철역에 다다를 때까지 너와 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내가 한 가지 분명하게 기억하는 건, 지하철역까지 걸어오는 내내 공기가 참 차가웠다는 것 정도? 우리를 감싸고 있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고 싸늘했다. 사실 너와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라. 자주 가던 모텔에서 나와 한참을 걷는 동안 우리는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으니까.
아직 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나의 귓가에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방송이 들려왔다. 네가 이 지하철에 오르고 나면 정말 모든 게 끝일 거란 생각에, 그제야 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너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너에게 내가 던진 질문은 바보같기 그지없었지만.
“뭐, 할 말 같은 건?”
네가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마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겠지. ‘마지막 대화가 될지도 모르는데, 저런 멍청한 질문을 하다니.’ 하고. 그리고 이토록 어리석은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너는 또다시 예상치 못한 말을 입 밖에 내었다.
“후회할 거야.”
네 입에서 나온 후회라는 단어는 내 마음을 정신없이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후회할 거라고? 그리고 그때 든 생각.
내가 여기서 널 이대로 보내고 나면 정말이지 평생 후회하겠구나. 언제까지일지 모를 기약 없는 그리움 속을 한참 동안 헤매겠구나.
“누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플랫폼의 발자국 스티커를 따라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널 마주한 나는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내가?”
멍하니 땅만 보고 있던 네가 별안간 고개를 들어 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나의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니.”
“그러면.”
곧이어 들려온 너의 목소리.
“내가. 내가 후회할 거야.”
너는 네가 매사에 시원한 성격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너의 진심을 전부 꺼내 보인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고. 내가 여태까지 알던 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쿨한 네가 좋았다. 그러나 후회할 거라는 말을 뱉어내는 너의 눈빛은, 내가 알던 너와는 달랐다. 너를 보내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설프게 내 시선을 피하는 너의 눈빛에서 내가 느끼는 것과 같아 보이는 아쉬움을 보았다. 자꾸만 땅바닥으로 시선을 떨구는 너는 결코 쿨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네가 좋았다. 여태까지 알고 있던 시원시원한 너보다, 그 찰나의 순간 발견한 누구보다 미련 가득해 보이는 네가 좋아서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잡고 있던 네 팔을 끌어당겨 너를 껴안았다. 나에겐 가지 말라는 말을 건네는 것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 네가 가버리고 없는 내 하루를 상상하는 건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 혹시 그쪽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거짓말처럼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 예고 없이 찾아온 너란 계절을 이렇게나 허무하게 보낼 자신이 나에겐 없었다. 너와 감정을 나누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지만 역시나 이성이 감정 앞에 제 역할을 다 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너를 빈틈없이 끌어안은 채 눈을 질끈 감고 네가 나를 밀쳐낼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는데,
역시나 너는 내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여자였다. 내 허리를 휘감은 너의 온기가 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문득 안는 걸 좋아하냐는 내 질문에 수줍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말하던 너의 대답이 떠올라 너를 더 꽉 껴안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미 너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모든 순간을 망가뜨리고 있었다는 것을.
언제부턴가 난 네가 감추고 있는 수많은 비밀을 알아내고 싶어 안달 나 있었고, 네가 간직한 비밀들에 나라는 존재가 들어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조심스레 품어 왔었다. 그리고 비로소 너의 비밀 속 한 페이지가 나라는 사람으로 빼곡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너의 마음도 나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를 둘러싼 세계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너의 도움 없이는 이 세계를 다시 일으킬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너에게 이제는 내 마음을 고백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사랑을 하면 상대에 대한 생각을 감히 떨칠 수 없다.
상대의 모든 것을 탐험하려 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 하나의 시대이므로….
- 이기주, 언어의 온도 中
+ 먼저 올라온 '파트너'의 각 부분들을
성우의 상황에 대응시켜 쓴 글입니다.
++ 안녕하세요, 글잡에서 옹성우 장편 빙의글 '나의 행복에게'를 연재 중인 즈믄입니다.
제가 나날이 작가님의 '파트너'를 너무나도 인상깊게 읽어서
작가님께 허락을 받아 성우의 이야기를 올리게 되었어요.
우선 흔쾌히 허락해 주신 나날이 작가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영광이에요:)
원작에 누를 끼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드는데,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