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다행히 사진 속 그 여자가 맞았다. 사내는 조심스레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내민 손이 무색해질 만큼 여자는 쌀쌀히 대답하며 혼자 일어섰다. 겉보기엔 자연스럽지만 어딘가 서툰 일어였다. 그에 사내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여자가 분명 그 아사코 유즈키일 거라고.
보안부로부터 직접 받아온 도청장치였다. 초소형 사이즈로 개발되었기에 가방에 대충 던져넣어도 들킬 가능성이 희박했다. 서로 목례 후 지나쳐 가면서 사내는 일부러 여자의 가방에 몸을 밀착했다. 그리고는 쇼퍼백 안에 장치를 슬그머니 넣었다.
별로 자연스럽진 않았는지 여자는 얼마 안 가 가방을 확인했다. 사실 여자의 행동들은 이미 모두 감시되고 있는 채였다. 이 프로젝트 중 가장 요주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누굴 만나고 어딜 가는지, 언제 집에 들어가는지까지 철저히 기록되었다. 특히나 왕세자의 숨겨진 아들인 오와다 카츠오를 만날 때는 더더욱 그 감시가 심해졌다.
"잘 달았습니다. 소리 확인해주세요."
사내는 골목을 돌자마자 남방 속에 매달아놓은 이어셋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최대한 긴장을 억누르려고 했는데도 식은땀이 흘렀다. 저번에 맡았던 일이 제 실수로 물거품이 되어버리면서 부담감이 배가 된 탓이었다.
[어어, 진영아. 수고했다. 얼른 와서 밥 먹자. 깐쇼새우 시켜놨어.]
"새우요? 형!"
[아, 참. 너 새우 못 먹지. 미안, 미안.]
진영은 입을 삐죽이다가 마지못해 괜찮아요. 하고 대답했다. 차로 돌아가는 내내 진영은 조잘조잘 떠들었다. 넘어지는 연기 되게 잘하지 않았어요? 완전 속은 것 같은데. 아마 그 가방 버릴 때까지 장치는 그대로 있을 걸요. 하도 티가 안나서.
10. truth or dare
도시 외곽에 있는 한적한 레스토랑까지 차로 20여분. 나는 안전벨트만 계속 만지작 대고 있었다. 말끔한 차 내부엔 그에게서 나는 특유의 향이 났다. 고등학교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진 않았는데 조수석에 앉으니 불현듯 궁금해졌다. 여자친구가 생겼을까. 하고.
황민현은 운전이 참 능숙했다. 그러면서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네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차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주위가 점점 어둑해졌다. 나는 대뜸 물었다.
"여자친구는 생기셨어요?"
그와 가장 가까웠던 때라고 생각되는 고등학교 적에도 쉽게 뱉지 못한 말이었다. 그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어떨 것 같은데."
"헤어지긴 했는데 얼마 안 됐을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그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여주는?"
"저는 어떨 것 같아요?"
"글쎄. 고등학교 때도 인기 많았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이따금 누군가를 좋아하긴 했어도 그와 연애를 하고 싶단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일본인이었거나, 일본 혈통이었거나, 그 전에 먼 곳으로 가버린다거나 했으니까.
다시 정적이 흘렀다. 서로 답을 말하진 않았어도 대강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아니요.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나겠어.
레스토랑엔 우리 뿐이었다. 딱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깔끔한 인테리어와 분위기. 뭐 먹을지 고르자는 말과 함께 그가 내 앞으로 바짝 붙었다. 그의 향이 풍겼다. 나도 모르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에게도 내 향이 닿았을까 해서.
"되게 오랜만이다. 이 향기."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간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만 같아서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나도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그쵸. 저도."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설레이는 느낌. 그러면서도 한편에는 찝찝한 기억이 있었다. 옹성우의 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보던 그 표정.
"솔직히 많이 놀라셨죠."
내가 뭘 묻는지 단번에 알았을 텐데 그는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나를 피해 냅킨 위로 도망쳤다.
"조금."
정말 당연한 건데,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어딘가 쓰렸다. 죄책감이라고 해야 할까. 수치심이라고 해야 할까.
이어지는 정적에 그는 웨이터를 부르고선 음식을 주문했다. 나는 웨이터가 가자마자 그에게 비아냥대듯 말했다.
"저도 놀랐어요. 선배가 절 별로 반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어서."
"여주야."
"저랑은 다르게."
나도 모르게 화를 내버린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이 좋질 않았다.
"어떻게 그 집에서 반가울 수가 있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안다. 이번엔 내가 도망쳤다. 또 다시 치솟는 피해의식에 부정적인 해석들이 마구 피어올랐다. 그깟 돈 때문에 신념을 저버린 거야? 그 앞에선 조선이고 뭐고 상관 없는 거야? 그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설렘도 정말 잠시일 뿐이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선 말했다. 선배, 죄송한데 저 먼저 가볼게요.
내가 가게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그는 빠른 걸음으로 내 뒤를 따랐다. 여주야. 여주야.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은 체도 안하고 주차장 앞까지 오자 결국 그는 내 팔목을 붙잡았다.
내가 가게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그는 빠른 걸음으로 내 뒤를 따랐다. 여주야. 여주야.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은 체도 안하고 주차장 앞까지 오자 결국 그는 내 팔목을 붙잡았다.
"데려다 줄게. "
"제가 그 집에서 일하는 게 왜 선배가 기분 나빠하실 일이에요?"
"내가 바랬던 그 재회가 아니었으니까."
나와 같은 생각. 그래서 더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미안해. 내 말에 기분 나빴다면."
"……."
"집까진 데려다주게 해줘."
들썩이던 심장께가 가라앉았다. 그가 조수석 문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차 문을 열어주었다. 분명 이렇게 끝날 게 아니었는데. 지금도 그는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돌아가는 내내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와 대화를 할 때면 맞지도 않는 부품들을 억지로 조립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그만큼 그리워했으면 이제는 행복히 사랑만 하면 되겠지, 하는 보상심리가 오히려 그와 나의 사이를 넓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집 근처에 다다르자 그는 시동을 끄며 조용히 말문을 텄다.
"천천히 해보자."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다. 내가 물었다.
"뭘요?"
"그냥, 다."
맞아. 지금 돌이켜보면 전부터 우린 닮은 구석이 많았었다. 생각이든, 뭐든. 나는 그제서야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
그가 웃었다. 다음의 약속은 없었어도 머지않아 보겠단 확신이 들었다.
집 바로 앞엔 주차장이 없었기에 차에서 내린 뒤 조금 걸어야 했다. 그가 내 바로 오른편에 섰다. 가까이 붙으니 새삼스레 큰 키가 실감났다.
"고등학교 땐 이 동네 자주 왔었는데."
영화가 겹쳤던 그 날 이후로 그는 학교에서 날 마주칠 때마다 말을 걸어왔다. 밥은 먹었냐, 시험은 잘봤냐 하는 평범한 얘기부터 이번주엔 무슨 영화를 볼 거냐는 것까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그래. 뭔데?"
"고등학교 때, 왜 저였어요?"
"뭐가?"
왜 하필 나였을까. 그런데 뭐가? 사실 나도 몰랐다. 그래서 대답을 않았다. 그냥 그렇게 묻고 싶었다. 왜 나였느냐고. 어쩌면 그 모든 게.
그가 잠시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눈높이는 맞지 않았어도 아까 메뉴를 고르던 때보다 더 가까웠다. 가로등 밑으로 비치는 짙은 눈썹, 눈동자, 검은 머리칼.
"아."
"……."
"그치. 여주였지."
나는 입을 닫았다. 뭐가요? 하고 물으면 그는 전부라고 대답해버릴 것만 같아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나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시선을 길 위로 돌렸다. 지금 이런 대화를 해도 될 타이밍인지 생각해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에게 갑작스런 작별인사를 고해야 했다. 골목 어귀 한편에서 김재환이 담배를 피고 있었기 때문에.
"데려다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들어가볼게요."
왠지 모를 불안감. 그를 얼른 돌려보내고 싶었다. 급한 마음에 다짜고짜 꾸벅 인사를 했다. 그는 그에게서 한발짝 떨어지는 내게 성큼 다가왔다.
"여주야."
"오늘 좀 피곤해서…"
말 끝을 흐리면서 무의식중에 김재환과 그를 번갈아 본 모양이었다. 그가 내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려 김재환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선이 느껴졌는지 김재환 역시 이쪽을 쳐다보았다. 내가 아니라 황민현을 보고 있었다. 흥미로운 눈으로.
"네, 친군데 잠깐 저희 집에…"
김재환을 보면 왜 이렇게 불쾌감이 드는 걸까. 단순히 양심 때문에?
"왜 그래? 괜찮아?"
분명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황민현인데 김재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김재환은 계속해서 황민현을 바라보다 담배를 껐다. 그 자체가 왠지 모르게 위협적이었다. 정보를 다 캐고 온 거면 황민현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겠지. 머릿속에 김재환의 시계 문양이 스쳐지나갔다. 무장단체의 그 그림이.
"나중에 연락 드릴게요. 그땐 꼭 밥 먹어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붙잡힐세라 얼른 그를 지나쳐갔다. 김재환은 여전히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걸어갔다. 김재환은, 김재환이 소속돼 있는 그 독립 단체는 황민현을 적으로 보고 있을까? 황민현도 언제든 표적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 나는? 나도 언제든 타겟이 되려나?
그리고 그와 내 거리가 일미터 조금 남짓 남았을 때, 김재환이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늦었네."
"응. 여태 안 들어가고 뭐 해?"
"담배 좀 피느라."
"아."
핵심 없는 대화. 누가 먼저 말을 꺼낼지 벼르기라도 하듯.
"누구야? 남자친구?"
대답은 삼킨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모르는 척 하는 게 진짜일까, 연기일까 의심하면서.
"그냥 친한 선배."
"그래?"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 나에 대해선 어디까지 캔 걸까. 고등학교 때 황민현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까지? 아님 그 이전도?
"여기 계속 있게?"
"한 대 더 피려고. 먼저 들어가."
그는 말을 마치고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갈 동안 끝까지 불은 붙이지 않았다.
아, 어쩌면 더 피겠다는 말조차 거짓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