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날 혼자서 짐을 들고 오려니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축축해졌다. 찝찝한 건 딱 질색인데. 그래도 일하던 출판사가 갑작스럽게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살고있던 집과도 멀어졌기 때문에 급하게 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날 밤 퇴근 후 할 일 없이 어플을 들여다 보고만 있다 마침 자신의 집 빈 방을 세 놓은 사람이 있어 곧장 연락을 했다. 다음 날 등기부까지 확인 후 바로 계약까지 끝냈고. 사정상 오늘은 사진으로만 접하고 실제 집까진 아직 못 보여준다고 해서 미심쩍긴 했다만 서글서글한 남자의 얼굴이 사기는 아닌 거 같고 계약금 또한 집에 들어간 후에 지불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뭐, 손해 볼 건 없겠지. 혼자 사는 것도 적적하고, 어차피 챙겨갈 짐도 크게 없으니까 괜찮겠다 싶어서.
그게 벌써 일주일도 더 된 일이던가. 대리인이 나왔던 탓에 아직 같이 살 주인공의 얼굴을 보지 못 한 게 함정이지만. 뭐 하는 사람이길래 자기 집에 세놓으면서 계약하는 자리에 코빼기도 안 보여? 생각할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 궁금증은 뒤로 하고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아낸 뒤 앞에 놓인 주소 팻말을 확인했다. ㅇㅇ로 ㅇㅇ길 9, 여기인가? 사진으로만 봐도 넓겠다 싶었던 집이지만 실제로 보니 훨씬 더 커보였다. 주택이라 그런지 담도 높네.
“분명 집에 있을 거라고 그랬는데...”
계약할 때부터 자신이 대리인이라며 걱정 말고 궁금한 건 모두 자신에게 연락주라던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니 자동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집주인은 뭐 하는 사람이길래 뭐 하나 하는 게 없어. 짐을 내려두고 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말하니 자신은 익숙한 듯 아마 못 들었을 거라며 0009가 비밀번호니 치고 들어가라더라. 대체 누가 집주인이야..
“0009? 집 안 털리는 게 신기하네.”
낑낑거리며 짐을 들고 들어간 집안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넓고 깔끔했다. 이건 마음에 드네. 그렇게 생각하며 집안을 둘러보는데 단연 내 시선을 빼앗은 것은 넓고 높은 벽 한 면을 꽉 채운 책꽂이의 책들이었다.
“와... 무슨 책이 이렇게 많아.”
책이 좋고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어서 자연스레 이 쪽으로 진로를 정했던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책꽂이 쪽으로 다가가 책들을 훑어보았다. 어, 연애의 결핍? 연애의 결핍은 몇 년전부터 빠르게 떠오른 신예작가 RM의 데뷔작이었다. 모든 출판사들이 출판권 계약을 따내려 애썼으나 작가의 정체를 아무도 알 수 없어 이북으로만 출판됐던 책. 나도 편집장 님이 RM의 흔적이라도 잡아오라고 했었는데... 건진 정보 하나도 없이 일이 끝나 엄청 까였었다.
그리고 작가 RM은 여전히 이북으로만 출판을 하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작가의 책은 냈다하면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에 책으로 출판했다면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근데 이게 책으로 있네. 심지어 표지까지 완벽하게 디자인 된 정말 온전한 책의 형태였다. 이쪽에서 일하는 나도 모르게 책이 출판되기라도 했나? RM의 소식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그쳤을 때 등 뒤에서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뭡니까, 당신.”
굉장히 낮으면서도 부드럽지만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런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저보다 한 뼘은 커보이는 남성이 안경을 고쳐쓰며 미간을 찌푸린 채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하도 매서워 하마터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작은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했다.
“아니, 저 오늘부터 여기서 살기로 했던 사람인데요...”
제 말에 남자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한숨만 내쉬더니 책꽂이 가까이에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호석, 진짜...”
대리인 이름이 정호석인가? 나는 내 잘못도 아닌데 남자의 눈빛이 매서워 괜히 눈치를 보고 있었고 자연스레 책꽂이에서 멀어지자 남자는 조금 풀린 표정으로 턱짓했다.
“저 쪽 방이에요. 시끄러운 건 질색이니까 조심하고, 그거 말곤 알아서 생활해요. 어차피 마주칠 일 별로 없을 테니까.”
남자는 제 할 말만 하고서는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겨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뭐야...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세들어 살 사람 구해놓고 반응이 뭐 저래. 괜히 기분이 상한 여자는 일부러 짐이 든 캐리어들을 달그락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그순간 남자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순탄치만은 않은 둘의 첫 만남이었다.
“성가시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