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시즌 2
W. Bohemain Heal
지금 창문을 열면
너의 향기가 섞인 여름의 냄새가 난다.
09: 남사친이 앞집으로 이사를 왔어요
***
"너는 어디에 있을 건데"
"서로 갈 거야"
"얘 혼자 두고?"
"같이 있을 순 없잖아"
온전한 비밀은 없다. 물 먹은 솜이 되어 울다 잠든 ㅇㅇ를 우선 순영의 침대에 눕혔다. 오래 봤는데, 미묘한 대화가 오랜만에 껄끄럽다. 순영이 ㅇㅇ와 의식하며 피했어도 승철은 둘 모두와 만났다. 한 쪽으로 손해 보고 싶지 않았다, 둘 다 놓고 싶지 않았으니까. 왜 같이 못 있는데, 물어야 할까. 솔직히 묻지 않고 이미 알았다. 순영도 알았다, 너무 파란 하늘을 푸른 밤을 끼고 교복을 입고 함께 보냈던 시간 속에서 꼭 지금과 같은 그 때가 다시 왔다는 거.
애매한 침묵은 진절머리가 났지만 둘 모두 어떤 말을 해야하는 게 맞는 지 복잡했다.
***
"엄마아... 물...."
물잔이 손에 들렸다. 따끔거리는 목을 축이고 다시 물잔을 내미니 물잔은 다시 손에서 떠났다. 떠났다고? 급하게 올려다 본 시선엔 하품을 연달아 하는 권순영이 있었다. 여기 권순영 집인가, 나 여기서 잔 건가. 권순영은 금새 물잔을 아일랜드 식탁에 놓아두고 침대 옆에 앉았다.
"네 집 고쳐놨어. 그래도 당분간 여기 써"
아, 너였구나. 나를 꽉 안아준 사람이. 권순영은 정말 졸려 보였다, 끝까지 졸진 않았으나 피곤한지 자꾸 목부근을 매만졌다. 내가 나가야 하나, 네가 나가라 해야 하나. 우선 엉망이 된 머리부터 묶은 후 협탁에 놓인 권순영 안경을 집어 썼다. 또 뭘 해야 할까. 조용히 방 안을 둘러 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취향도 바뀌고 습관도 바뀐, 나랑은 달라진 점들이 방 안 곳곳에 붙고 진열 돼 있었다.
"....나 짐 가져올까"
"같이 가"
제발 불편한 동행이다 이건. 오지마 오지마 마음으로 한 천 번 외치면 뭐하나, 등 뒤에 딱 붙어 따라 오는데. 권순영은 대신 비밀번호를 꾹꾹 쳤다. 거실에 있을게, 방 안에 들어오니 참고 참은 숨이 터져 나왔다. 불편해 질식사 할 뻔, 내 것이 네 것이고 네 것은 내 것이었는데 옷들과 잔가지 물건을 집어들 때마다 기분이 고르지 않게 뒤틀렸다. 물건을 끌어 모은 뒤 문을 열자 너는 금새 몸을 구긴 채 잠들어 있었다. 깨우고 싶지 않아 조심히 문을 닫고 나왔으나 나는 너무나 멍청했다.
"..비밀번호"
중요한 건 방금 나온 내 집 비밀번호도 모르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었다. 잠금 장치를 고치고 설정한 건 권순영이니까. 결국 앞집도 내집도 못가는 정말 멍청한 상황에서 나는 문에 머리를 박았다. 가끔 나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이 머리로 검사가 됐을까. 문에 쿵쿵 머리를 박고 있었는데 문이 열렸다.
"아, 아"
"뭐해?"
제대로 박았다. 이마를 부여잡고 주저 앉으니 권순영은 급하게 같이 주저 앉았다. 야 봐봐, 큼지막한 네 손이 내 손을 붙잡아 떼어두고 그는 쭈구린 걸음으로 한 두발짝 다가왔다. 사실 네가 너무 커져서 보이지 않았으나, 혹이 날 예정인 나의 상처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 정도는 알았다. 살짝 너를 올려다 보았을 때 까딱 넘어졌다간 네 엹은 입술 깨에 닿을 거리였다, 잔잔한 고요가 인다. 바람이 이번엔 네 이마를 슬쩍 끌어안았다 날아가버렸다. 분명 내 상처를 보고 있었던 거 같은데,
"아, 아퍼 가"
너를 밀었다. 아까 숨을 전부 몰아 쉬지 못했나보다, 나도 나를 모르게 참았던 숨을 토하고 어줍게 몸을 일으켰다. 너 역시 애매한 상황에 같은 태도로 몸을 일으켰다.
넌 왜 내 앞에 있는 걸까, 함께 여름을 맞은 횟수와 맞먹을 그리움의 여름 속에 너는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렇게 아주 갑자기 나타나고 갑자기 그때로 돌아가자고 손잡아 끄는 것처럼 물리적으로 가까워져 있을까. 또 의문이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왔다, 말하라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도망치듯 아무 일도 아니었을까. 묻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내뱉으라고 아우성이다, 가만히 좀 있어. 울음과 치솟는 감정에 이마를 짚었다.
"ㅇ,울어? 야,"
"...비밀번호 좀 알려줘"
"아퍼? 다시 봐, 봐"
"알려줘 비밀번호"
한 걸음 물러섰다. 마음을 큼지막한 벽으로 밀어 물러세웠다, 그 애는 당황으로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직접 문을 열었다. 그냥 무진장 아프니까 누워 있을래, 나는 생각보다 거짓말에 능한 어른이고 싶었다. 문은 조용히 잠겼다, 그와 동시에 몸이 무너져 내렸다. 노을 같은 보조등이 켜졌다 꺼지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신발장을 비추었다. 구두 그리고 운동화, 슬리퍼 네 신발이 띄엄띄엄 서 있었다. 너는 이기적이었다.
***
지우개 가루는 다시 지우개가 될 수 없다. 그 여름은 다시 여름이 돼지 못하고, 그때 우리는 우리가 돼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거기에 어쩌다 입수해 수영도 못하고 가라앉고 있는 내가 문제일 뿐.
"아니 선배가 빠지니까 왜 엄마가 그래, 난 싫다니까? 아,"
늦었다, 내가 모르는 약속에. 한 쪽엔 구두를 신고 다른 한 쪽은 들고 마저 끼지 못한 귀걸이를 꽂아 넣으며 신경질을 뿌렸다. 반대쪽 귀걸이가 복도로 통통 튀어 도망갔다. 구두는 높이를 버티지 못하고 굴렀다.
"아니? 나중에, 우선 나가. 끊어"
지금 들어오는 건가, 부딪혀 신발만 봐도 알았다. 앞에 서 있는게
"어디가?"
너인 거.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네 집에서 뭘 망가뜨린 것도 아닌데 말이 안 나왔다. 피곤한 눈이 위아래를 쓸었다. 이쯤이면 너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권순영은 답도 듣지 않고 한 쪽 무릎을 꿇어 앉아 귀걸이를 주워 건네고 신발을 가지런히 세웠다. 한 발로 서 있기 뭐해 구두를 마저 신고 내민 귀걸이를 받았을 때 넌 일어섰다. 다시 한 번 나를 내려다 보았다. 마주친 너의 눈은 아무 입장도 써넣지 않은 눈이었다.
"예쁘네, 잘 갔다 와"
네가 다시 가버렸음 좋겠어.
*
"좀 괜찮아?"
약속은 무슨, 나가지 않았다. 저는 연애도 결혼 생각도 없습니다를 약 한 두시간에 걸쳐 언짢은 표정으로 표현하기보다 더 예의차린 문자가 나았다. 제대로 꾸몄는데 하나도 아쉽기는 커녕 들어가긴 이상하고 법원으로 가기엔 용모가 너무 이상해 돌다 돌다 최승철을 만났다. 이제야 영화를 봤고 저녁을 샀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 애의 집 안에 있는 게 이상했고 마주칠 확률이 높아진 게 발걸음을 꽉 묶었다.
"뭐가?"
"너 저번 새벽에 울었잖아"
"아 그거"
괜찮지. 근데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울었던 날을.
더 이야기를 하려다 입을 물었다, 또 돌고 돌아서 그때 그 애의 품으로 생각이 갈무리 지어진다. 대신 공원을 걸었다. 딱 모든 밤이 이렇게만 흘렀으면 좋겠다, 더위가 물러서고 눅진하지 않은 바람이 천천히 쏟아졌다. 일정한 걸음으로 함께 걸었다, 날이 황홀해 생각 보다 많은 이들이 공원에 분포했다. 대부분이 커플이었다는 게 좀 외로운 점이었지만.
"너는 왜 연애 안해?"
"나?"
생각해보니 그랬다. 대학에 가선 다른 과보다 밤샘과 더불어 일찍히 타국을 들락거려 연애는 사치라 했고, 일을 시작하곤 일이 좋아 싫다고 그랬다. 이제 숨 좀 돌릴 수 있지 않아? 한국으로 들어왔겠다, 컬렉션까지 시간도 남아 돌겠다. 그냥,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이는 너에 앞에 막아섰다. 권순영만큼 너도 커져 있었다. 꽤 높은 힐을 신고 있었음에 불구하고, 나도 네가 보기엔 컸을까 이전보다. 조금은 더
"진짜 궁금해서 그래, 너 정말 연애 안해?"
***
-승철 시점-
두 번째 동창회였다. - 나는 과제/ 짧은 ㅇㅇ의 문자로 이름을 불러 체크하는 이에게 짧게 전달했다. 사정 있어서 못 온대 ㅇㅇㅇ. 걔는 매번 빠지더라, 작은 모임에서조차 아주아주 가끔 얼굴을 비춘다며 서운함을 토로하는 대화 속에 사정이 있다잖아, 대신 이야기를 전했다. 권순영과 너는 약속이라도 한 듯 번갈아 빠졌다. 그래서 오늘은 권순영이 온 걸까.
두 번째 여름 방학에 ㅇㅇ는 애인이 생겼다. 그 앤 매번 정말 예뻤다, 활짝 웃은 미소가 예뻤고 작은 이야기에도 기뻐했다. 스물을 스물 답지 않게 보내고 너에 곁에 있었을 때보단 나았다. 생각보다 오랜 연애를 했다고 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군대를 가며 자연스레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복학을 했을 때쯤, 늦여름이었다. 막판에 하늘이 부서져내렸다, 모든 것을 흩뿌렸다. 빗줄기는 억세다 못해, 아팠다. 내가 너에게 가 건넨 우산을 건넬 수도 없게 엉엉 울었다, 이미 달려가 마주한 얼굴 역시 퉁퉁 부어 있었으나 이 막판의 빗줄기처럼 너도 더 울어 다 쏟아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나보다 싶었다. 그냥 네 앞에 우산을 기울여 주었다, 그러니 너는 다시 울었다. 미약하게 술냄새도 베어 있는게 혼자 마신 티가 났다.
"집에 가자"
그리고 너는 다시 동창회를 빠졌다. 하나 정도 무언가 바뀌었다면 그 애는 더이상 권순영에 대해 무심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학교를 다니고 같이 도서관에서 밤을 샜다. 꼭 술을 마셔야겠다며 시험기간에 내 옷자락을 꼭 쥐고 끌어 가지도 못하면서 당길 때도 너의 얼굴은 다시 생기가 있었고 작게는 꽃이 핀 거 같았다. 과잠으로도 막을 수 없다며 내 자켓을 뺏어가는 얼굴에서 계절과 맞지 않게 여름이 왔다.
몇번 ㅇㅇ는 과팅을 했다. 할 때마다 전화가 왔고 나는 그 애의 엄마가, 오빠가, 여자사람친구가, 아주 가끔은 남자친구가 되었다. 슬금슬금 빠져나오고 나서 항상 나에게 달려와 등에 매달려 안기거나 업혔다.
"점점 연기가 늘어? 응? 누나가 맛있는 거 쏜다!"
그 이후로 너는 연애 아닌 연애를 딱 한 번 더 했고, 똑같이 울었고 나는 그 앞에 서 있었다.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눈물이 범벅된 얼굴에 옷소매라도 끌어당겨 닦아줄 수 있었다. 괜히 화를 내고 돌아 걸어도 잡아 닦아주었다. 한 잔 하러 가자, 너는 웃었으니까.졸업을 앞두곤 미친듯이 바빴다, 일어나 전화를 걸어야 너는 일어났고 혹시라도 지각을 하면 너는 오후에 잠시 얼굴을 비추고 지도교수에게 불려갔다. 여튼 차곡차곡 너와 시간을 쌓았고 졸업을 했다. 권순영과 등을 돌린 시간에 어쩌다 보니, 아니 나는 굳이 그 시간 하나하나에 스며들고 싶었다.
네가 어쩌다 어른이 되어버렸을 때도, 그렇게 교복을 벗은 티가 아닌 정말 사회인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애 옆에서 그 애를 이해했다. 보상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옆에 있는 시간 한 개 두 개가 좋아 떠날 생각을 차마 하지 못했다는 말이 맞아 떨어질 거 같았다.
그냥 네가 좋았으니까. 친구로써 안아준 적이 몇 번 없었던 게 미안해서, 시간과 같이 노력이라는 것을 조금은 해보면 친구가 될 줄 알았으니까.
*
"너는?"
"응?"
"연애 안해?"
"연애는 사치야"
"이제 사치 아닐 때도 된 거 같은데"
최승철은 웃으며 머리를 헝클었다. 너 곧 서른이야, 알아?
이게 아프게 나이 공격을 한다. 조금 더 발 뒷꿈치를 들어 똑같이 네 머리를 헝클였다. 올라 올 줄 몰랐는지 어이 없게 웃는 너에 나도 웃었다. 그냥 이러고 있는 게 뭐가 웃긴 건지 잘 모르겠는데, 즐거웠다.
가자, 데려다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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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번외는 승철이 시점이었습니다.
지지부진한 전개를 끝내고 빠르게 돌아오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