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연인을 위한 세가지 조건 上
벚꽃이 만개하고 꽃내음이 폴폴 날리는 화창함의 시작이자 연애하기 좋은 날씨인 '봄'이라고 해서, 그것이 사랑을 시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부 할당되는 것은 아니다.
늦은 새벽, 안개가 가득 끼고 하얀 달만 덩그러니 비추고 있는 어두운 한강 주변의 도로가. 그 위에는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삐뚫게 주차 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단단한 유리창을 넘어 넘실거리는 강물의 경치를 안주 삼아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핸들의 표면을 엄지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시종일관 정면만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이 어두운 새벽보다도 더 어둡고 차가웠다.
"날씨 존나 좋다."
"......."
"꽃도 아주 그냥 예쁘게 폈네."
벚꽃이 흩날렸다. 그는 단정한 얼굴을 하고서 자리가 잘 잡힌 붉은 입술로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그것은 그가 감정적으로 위험한 상태임을 보여주었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그런 좋지 못한 상태 말이다. 평소에 욕을 하지 않는 그로써는 엄청난 변화였다. 지금 이 근처에 그저 조깅이나 운동을 하러 온 애꿎은 사람들도 그저 눈엣가시였다. 모조리 다 없애버리고 싶은 심정, 딱 그 짝이였다.
그가 그런 기분으로 이 곳까지 혼자 온 것은 아니였다. 조수석에는 다른 남자도 앉아있었다. 아무 말 없이 옷 소매자락만 잡고 꼼지락 거리는 또 다른 그는 운전석에 앉아 욕을 내뱉는 남자의 애인이였고, 올해로 무려 사귄지 2년이나 된 연인이였다.
"꽃도 피고, 날도 좋고, 뭐 하나 빠짐없이 다 좋은데."
"......."
"너는 뭐냐."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해 잔뜩이나 화가 나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와중에도 그의 연인이 자신이 처음보는 모습에 놀랄까 싶어 아주 간신히 모든것을 절제하고 참아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낸 땅 끝을 파고들것만 같은 미친 저음에, 우측에 앉아있는 남자가 조용히 눈만 올려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도 딱히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듯 조금은 슬픈 표정을 하고 다시 눈을 내리깔자 그의 이마에 핏대가 올라왔다. 씨발. 지금 내 질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거니.
"뭐냐고?"
이를 꽉 물고 씹는듯이 발음하는 그가 이번에는 제대로 남자의 옆통수를 쳐다보며 물어왔다. 처절하기까지 들리는 억지스러운 발음 끝에는 고요한 헛웃음도 섞여있었다. 금방이라도 불꽃이 튀어나올것 같은 뜨거운 시선을 한 몸으로 받아내던 작은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저 입술만 물고 있었고, 그럴수록 남자는 자신을 내려다 보는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무섭다,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라고 그의 표정에 써있었다.
"야."
"......"
"대답 안해?"
"......"
두 번이나 소리없는 메아리가 돌아왔다. 남자가 결국 참지 못하고 대답을 하지 않는 남자의 손목을 잡아 채 자신의 코 앞까지 끌어 당겼다. 순식간이였다, 두 시선이 맞닿은 순간은.
"너 죽고싶지."
"용서해줘 루한아!!!!!"
결국 남자의 굳게 닫힌 입술이 열렸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뜨거운 시선이 끝내 맞닿게 되자, 그의 표정에 심히 놀랐는지 눈물까지 급작스럽게 고이게 해가며 용서해달라고, 살려달라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놓아주지 않고 욕만 중얼거리는 남자의 이름은 루한. 눈썹이 움찔거리자, 고운 이름에 흠집이 생길것처럼 이례없는 무서운 표정이 삐져나왔다.
"..용서?"
"......"
"내 말은 뭘로 들었어? 한 번은 가능해도 두 번은 안된다고 했지?"
"내가 미쳤었나 봐. 나, 내가 잠시 정신을 잃었었나봐. 네가 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어..나 좀 용서해줘 루한아..응?"
"개소리야, 이건 또. 내가 너 봐주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또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뒷통수 맞아주라고? 아, 이번에는 몇 대나 후려치려고?"
"루한아. 그게 아니라..."
"내가 너 봐주면. 안보는 사이에 또 언제 어디를 가서 일 칠지 모르는데. 뭘 해달라고? 내가 널 봐줄거 같아? 감히 네가 지금 나한테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할 그런 상스러운 말이 나와?"
"루한아, 내가 그럼 어떻게 해야 봐줄거야..? 응? 어떻게 할까...매일 밤마다 네 옆에 있을게..자, 봐봐..내 핸드폰에 있는 이 사람들 번호 다 지울게..응? 응?"
그리고 그 연인의 이름은 김민석. 루한 못지 않게 새빨갛고 작은 입술을 가지고 있는 매혹적인 생김새를 가진 남자였다. 머리만 길면 여자라고 해도 믿을수 있을 정도로 하얀 얼굴은 가진 그는 달빛을 받아 몸체 자체가 더 창백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루한이 민석에게 미친듯이 쏘아붙이자 민석은 진심으로 당황했는지 오히려 제 손을 풀러내고 루한의 손목을 바로 잡으며 얼굴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용서해달라, 다시는 안그러겠다,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보다, 하는 모든 자아 비판을 내뱉으며 태생부터 올라가있는 눈꼬리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루한의 표정은 더욱 더 썩어들어갈 뿐이였다.
"김민석."
"지금 너네 집으로 갈까..? 그럼 나 용서해줄래..?"
"..그만하고."
"어떻게 하면 되지..? 내가 오늘로 부족하면 평생 네 옆에 있게 해도 돼..."
"너, 그만하라고."
"나랑 같이 있자.."
"...하."
"..내가 미안하다구...응..?"
"닥치라고. 그럴수록 넌 더 싸지는거야. 내가 다른 새끼들이랑 같아보여? 고작 널 하룻밤에 용서하라고? 지금 너를 나한테 팔아 넘기겠다는거냐? 그런 의도야? 어!?"
"..안그럼 안 용서해줄거잖아..!"
"뭐..?"
"내가 어떻게 하면 용서해줄건데..!"
"넌 씨발!!!!! 지금 내 얼굴을 보고도 용서해줘, 이해해줘!!! 그런 거지같은 말이 나와?!!?!!?! 처음부터 잘못할 생각이 없었어야지!!!!"
"...아, 아까부터 소리는 왜 자꾸 지르는데!!! 고막 터지겠네! 그러니까 내가 미안하다고..!!!"
루한은 자신을 향해 발끈하는 민석을 보며 기가차 헛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이렇게 생각했다.
뻔뻔한 놈. 뻔뻔하다 못해 정신 나간 놈. 아주 네 말대로 정신이 저-기까지 날아갔구나.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그래도 그런 네가 아직도 예뻐보이는 나는, 너보다 더 정신 나간 놈이냐? 넌 왜, 날 너한테 집착하는 그런 나쁜 새끼로만 만들어. 아, 진짜 다 죽여버리고 싶다.
"김민석. 내가 지금 다시 말하는데,"
"......."
"...그렇게 억울한 표정 지으면서 쳐다보지 마. 죽여버릴거야. 입 닥치고 들어."
"......."
"너, 핸드폰 내놔. 네 말대로 번호는 다 지워줄게. 지금은 내가 눈에 뵈는게 없으니까 그렇게 할건데, 나 그걸로는 쇼부 못쳐."
"..응..?"
"내 앞에서 전화 해.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하라고. 물론 그걸로만 이 일이 끝난다고 생각 하면, 알지? 넌 등신인거야."
"....아, 씨.."
"그 뒤는 그거 먼저 끝낸 다음에 생각해."
말을 마친 루한이 짜증난다는듯이 민석에게 잡힌 손목을 털듯이 차갑게 털어버리고, 민석을 내팽개쳤다. 민석은 힘없이 조수석에 밀려나면서도 머리를 앞에 박으며 끙끙 앓기 시작했다. 루한 화를 풀어주는게 먼저긴 한데.. 씨발, 아!! 번호 없앤다는 말은 하지 말걸..
루한은 차의 시동을 걸고 격하게 핸들을 돌리며 또 다른 어딘가로 향했다.
처음 루한과 민석은 아는 지인의 소개로 만나 친구로 시작된 평범한 사이였다. 지금 이렇게 테이블 하나를 두고 전화번호를 지우느냐, 마느냐에 대한 씨름을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던 오래 전 과거의 이야기다.
루한은 2년 전,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대학 행사 후 뒷풀이를 하던 중이였다. 신나게 술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그들의 다른 친구 무리들이 그 술집에 몰려들어왔다. 유명한 가게라 우연히 만나게 된건 딱히 대수롭지 않았다. 어쩌다 두 무리가 합석을 하게 됐는데, 그 사이에는 루한이 처음 보는 얼굴들도 함께 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민석이였다. 결론적으로, 대충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으려는 술에 잔뜩 취한 루한의 시선을 멈추게 한 사람이였다. 그의 기준에는 민석이 엄청난 뉴페이스였다. 그냥 뉴페이스가 아니라, 아주 엄청난 월드 뉴페이스였다. 유니크한 눈매와 오묘한 미소가 루한을 집중시켰다. 그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투명한 유리 사이로 힐끔힐끔 민석을 바라보았다. 아, 오밀조밀하게 잘 생겼다. 예쁘게 생겼어. 어- 웃는 얼굴은 더 특이하다. 왜 저러지? 어떻게 저러지?
그가 술과 함께 속으로 내내 삼켜낸 말이였다.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이 대체 어디서 나온 말인지 도통 이해해본적 없었다. 그건 루한과 민석의 인생의 굴레와도 같은 공통점이였다. 하지만 루한은 민석의 처음 웃는 얼굴을 보자마자 1에서 100까지의 모든걸 다 이해해버렸다. 왜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건지, 폴 인 러브는 도대체 언제 누굴 만나서 하는건지. 나는 경험할 수 있는건지. 그런게 있기나 한건지. 하지만 겪어보니 알게 되었다. 약속된 사랑은 없다. 그냥, 정말 어쩌다 우연히 찾아오는게 사랑이였다. 그래. 그것도 단 몇 초만에.
그리고 그로부터 두 사람은 정말로 단 2개월만에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민석 역시 루한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을 미친듯이 뚫어져라 쳐다보기에 한 번 웃어줬더니 루한의 얼굴이 빨개지는게 포착되었다. 민석은 그때 눈치를 챘더랜다. '아, 뭐야. 너도 나 좋아해? 시시해.' ..그때는 제 콧대가 하늘을 찔렀던 미모 절정의 시기였음을 인정했다. 보다보니 괜찮고, 눈이 마주치자 홱 고개를 돌리는 모습도 꽤 귀여워 루한에 대한 관심이 점점 호감으로 변해갔다. 그 후로 민석과 루한이 사석에서 만나게 된 시간이 늘어나면서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랑 사귀자.'
'....응?'
'사귀자고. 나 너 좋아한다.'
"루한아.'
'놀라지도 않네. 너, 아무래도 남자한테 고백받는거 지금 내가 처음이 아닐거 같아. 맞지.'
루한의 당돌한 고백이였다.
'눈치 진짜 빠르네? 뭐. 그렇긴 한데..'
'....진짜라니까 뭔가 기분 더럽네.'
'어?'
'아..아니야. 그래서 나랑 사귈거야, 말거야.'
'음...'
'.......빨리.'
'....그래. 좋아!'
'사랑해.'
당돌함을 넘어선 폭풍같은 고백이였다. 민석은 대뜸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껴안는 루한을 보며, 앞으로의 길이 조금 두려웠다. 처음부터 헌신하는 사람은 좀 재미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자신에게 제 발로 찾아와주는 루한이 고마워 사귀었던게 5개월. 그리고 그를 알아가면서부터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지 1년 하고도 5개월이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민석은 정말로 루한이 단 한 번도 싫었던 적이 없었다.
루한의 거칠면서도 안전한 운전을 통해 24시간 운영하는 술집에 겨우 들어온 두 사람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얼굴을 마주본 채로 본격적인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민석은 긴장한 탓에 목이 말랐는지 웨이터에게 음료를 가져다 달라 주문했지만 루한은 다 필요 없다며 알아서 가져오라는 말로 웨이터를 빠르게 돌려 보냈다. 민석이 루한을 흘긋 쳐다보고 입맛을 다시며 볼을 긁적였지만서도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루한에게는 무척이나 기분 더러운 자리임에 분명했다.
"존나 술 집 분위기 하나도 안 변했어."
"..목 말라.."
"조용히 안해?"
"..........흐잉.."
"야. 그거 내놔."
"...정말 이래야 돼?"
"네가 먼저 뱉은 말이야. 지금 이 상황에 너한테 결정할 여부 따위가 있다고 생각해?"
"......."
"줘."
뜸들이지 않고 바로 시작된 대화의 주제는 살벌 그 자체였다. 그동안 민석이 외로움을 핑계삼아 루한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난게 사건의 시작이였다. 루한 모르게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할 비밀이였건만, 어이없게도 친구의 제보로 루한이 그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였다.
재밌는건,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였다. 경우가 조금 다를 뿐. 아마도 6개월 전, 선을 넘을 정도로 대학 후배에게 잔뜩 휘둘렸었던 민석이 생각났다. 루한은 눈을 감으며 조용히 떠올려보았다.
그때는 개인적으로 바쁜일정들과 권태기가 겹쳐서 찾아와 서로에게 무관심했던 시기라 예민함보다는 이해심이 먼저 나왔던(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루한은 초범은 원래 잘 돌려보내는거라며 민석을 잘 타이르고 넘어갔었다. 물론 마음 깊은 곳에서는 화가 났지만, 미안한 마음도 앞섰다. 내가 평소에 잘 해주지 못했구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두 번째. 민석에게는 얼마 전 세 명의 사람이 한 번에 스쳐 지나갔다.
"..크리스가 누구야."
"옆집 살던 아저씨.."
"몇 살."
"자세히 기억은 안나지만..아마도 서른 셋?"
"뭐? 이름도 존나 외국인 같은게 나이도 개많이 쳐먹었네."
"외국인 맞대. 중국어도 좀 하더라..그런데 실제로 보면은 그렇게 안보이는데.."
"뭐라고?"
"......."
"..그래..그러니까 네가 넘어갔겠지..여지가 있겠냐."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루한의 눈빛은 냉정했다. 그는 민석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진 않았지만 충분히 지금껏 연락을 오래 한것처럼 보이는 최근 통화 목록을 보며 또 다시 입술을 씹어댔다. 그 중 아직 지우지 못한듯 보이는 '크리스'라는 낯선 이름 세 글자에 루한은 헛웃음을 지으며 당장이라도 핸드폰을 부숴버릴 기세로 민석에게 물었다. 하지만 눈치없이 대답하는 민석을 보자 그냥 그를 먼저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어릴때와 지금은 달랐다. 연애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제는 미래의 결혼까지 생각해야 할 예민한 나이에, 초범이고 지랄이고 어쨌든 애인이 바람이 들었다는건 누가 봐도 죄임이 분명했기에 루한의 화는 두 배가 되었다. 좋게 타일렀더니 이제는 대놓고 그런 짓을 했단다. 미쳤나. 내 귀에 들린거면 대놓고 한 짓이지 뭐야.
그들의 친구인 종대의 제보로는 민석이 집에 들어가기전 누군가와 만나 가볍게 껴안는 정도가 아니라, 딥허그를 했다고 했다. 상대의 입술은 그의 정수리에 아예 누가 박아놓은듯 한참이나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했고, 민석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며 격한 애정표현을 했다고 했다. 루한은 반응했다. 씨발 그게 지금 키스야 섹스야? 키스가 애들 장난이야!!?!!!?!
"영어는. 잘 하디?"
"..알아듣지 못할만큼?"
"존나 난 중국어 제패한다. 딱 기다려."
".....일단 한국말부터 잘 해주면 안돼?"
"그래서. 너랑 껴안은 새끼가 크리스인가 구리수인가 그 새끼 맞아?"
"......."
그리고 그런 루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했던 민석의 핸드폰은 루한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그 안에 남겨져 있는 모든 번호는 모조리 지워버려야 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루한 본인을 뺀 모든 번호를 말이다. 이젠 친구들 번호도 남겨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루한이 민석에게 말한 첫 번째 조건이였다.
별거 아닌것 같았지만 민석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거기에 나만 알고 있는 야식 집이랑 은행이랑 피씨방이랑 치킨집이랑 별거 다 저장 되어있는데. 경비아저씨..나 이제 택배 받을때 어디로 부탁해..
"야. 너 머리는 왜 달고 다니냐."
"너 보려고.."
"그럼 나만 봐야지. 왜 그런 헛짓거리를 해. 나로는 부족해? 뭐가 그렇게 부족했어? 어?"
"......."
"우는척 하지마."
"..안울게."
"이건 또 누구야."
"..아, 그건..백현이?"
"나한테 물어보는거야? 이름만 말하면 내가 알아먹어? 그래서 씨발 이 새끼는 누구냐고."
"욕 좀 하지마! 주위에서 쳐다봐..걔는 우리 학교 후배. 내 과 후배인데, 되게 멍멍이 같아서 귀여워."
"아, 그래? 그러세요. 네. 아주 존나게 귀엽겠네요~!"
"...루한아..이제 그만 하고 나 좀 봐주면 안돼..?"
"뭐라구요? 민석아. 아직 정신을 못차리셨어요?"
어느샌가 루한의 옷 소매를 잡고 눈꼬리를 최대한 내리며 미안한 감정을 표출하는 민석이 루한의 눈에는 그저 웃길 뿐이였다. 어이가 없으려니, 헛웃음이 자꾸만 터져나오자 민석은 자신의 어리광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따라 웃었다.
"진짜 죽고싶냐고."
그것은 역시 착각에 불과했다.
"......."
"두 번 용서는 없다고 했어."
"루한아..."
"씨발. 생각해보니까 또 좆같은게, 세상의 반절이 여자인데 왜 죄다 네 주위에는 남자들 뿐이냐?"
"그게.."
"닥쳐. 이 씨발!! 왜 이렇게 한국에는 게이들이 많은거야!?! 씨발. 씨발!!! 네가 문제야!!!! 웃지 말라고 했잖아. 어디 가서 눈웃음 살살 흘리면서 웃지 말라고 한 내 말은 대체 어디로 들은거야?!?!?"
"...소리 좀 지르지마..씨..!"
"..씨이? 너 지금..씨?"
"루한 미워. 존나..존나 미워..씨.."
어쭈.
이 놈이 오늘 세기의 미친놈 기네스를 찍을 기세네.
"앉아라."
"번호같은거 다 지워도 네 성에 안찰거 알아!!"
"뭐?"
"..그러니까 네가 용서해줄때까지 나 안나타날거야!!!!"
"야."
와~ 저게 진짜 돌았나보다.
루한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홧김에 자리에서 일어난 민석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민석은, 루한을 얕잡아 본게 아니다. 그냥, 이냥저냥 몰래 쏘다닌것이 안걸릴줄 알았던 것이다. 민석이 몸을 웅크리며 슬쩍슬쩍 자리를 피하려 하자, 루한의 입에서는 결국 믿을수 없을만큼 소름돋는 말이 튀어나왔다.
"..가 봐."
"........"
"내가 용서할때까지 안나타난다고? 그래. 그래 봐."
"...루한."
"난, 끝까지 너 봐줄 마음 없으니까 네 맘대로 해보라고. 그리고, 네가 알아서 오기 전까지는 나는 너랑 만났던 그 남자들 싹 다 죽여버릴거니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판단해. 가. 꺼지라고. 꺼져버려 김민석."
"..헐.."
"경고했다."
민석의 눈에는 루한이 아닌 루한의 탈을 쓴 무서운 짐승이 앉아있는것만 같았다. 아직도 제 잘못을 가슴 깊이 뉘우치지 못한 민석이, 울기 직전의 모습을 보이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이렇게 해서라도 나도 널 용서하고 싶다고.. 아. 진짜 다 죽여버리고 싶다.."
그 후 루한은 웨이터를 다시 불러 소주와 맥주를 나발로 불며 밤새도록 그 자리에 있었다. 민석의 핸드폰은 아직 자신의 손에 들린 채였다. 아, 씨발. 김민석한테 연락도 못하잖아 이러면.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손님. 일어나세요. 손님."
"..므야.."
"영업시간 끝났습니다. 새벽도 지났어요."
"...시방..내 이름 뜻이 새벽사슴인데...새벽이...무슨....므..."
"일어나시라구요."
밤새 술 기운에 떡이 되어 결국 술집 안에서 새벽을 보낸 루한은 종업원의 손에 의해 등 떠밀려 일어나게 되었다. 잔뜩 기름지고 밤새 운 탓에 퉁퉁 부어 못알아볼줄 알았던 루한의 얼굴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나름 말끔한 얼굴로 가게 밖으로 얼굴을 들이민 루한은 공복인 배를 어루만지며 인상을 팍 썼다.
"하..얼굴이 존나 붓긴 했지만 잘 생기긴 했다."
루한은 술이 아직 덜 깬 머리를 붙잡으며 차창 유리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고 알 수 없는 말을 해댔고, 차키를 꺼내려 주머니를 뒤지는 순간 차키보다 무거운 묵직한 무언가가 잡히자 꺼내어 그것을 쳐다보았다.
"....아..이거 나한테 있었지..참.."
민석을 욕하면서도 피식, 비웃음을 흘린 그가 운전석 문을 열려던 순간, 우두커니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급히 민석의 핸드폰으로 메세지 창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기좋게 비밀번호가 걸려있었고, 루한은 곰곰히 생각했다. 내가 애초부터 이럴줄 알고 비밀번호 걸어놓은거야, 이거. 찾아가서 한 대 때릴까.
그러다가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생년월일을 누르니 단 한 번에 쉽게 풀리자 루한은 조금 의외라는듯 코를 한 번 먹고는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너란 새끼, 존나 중독같은 새끼. 이러니까 예뻐하지."
그리고 민석의 바람 1호남 크리스의 번호를 찾아 빠르게 문자를 쳐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마에 핏대가 서기 시작했다. 크리스라니. 영어에 중국어라니. 개짜증나.
'이따가 집 앞 카페에서 만나자. 어때?'
루한은 썩소를 날렸다. 한 편으로는 어금니를 꽉 물고 주먹을 쥔채로 차 안으로 들어가 차가운 시트를 쿵,쿵 내리쳤다. 엉덩이 존나 추워.
하..꼭 오늘이여야만 한다. 루한이 차 키를 꽂으며 입술을 질겅질겅 씹고 자꾸만 터져나오는 헛웃음을 막지 못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 나 왜 눈물이 나려고 하지.
그 후로, 문자를 보낸지 얼마 되지 않아 답장이 바로 도착했다.
- 허니, 카카오톡은 질렸어? 문자라니. 역시 매력이 넘쳐. 우리 큐티한 허니라면 언제든지 가능. 몇 시에 볼까?
"...지랄하고 자빠졌네. 메세지 무시하냐? 구리수 새끼. 넌 씨발 존나 구려."
루한은 곰곰히 생각하다 빠른 속도로 문자를 쳐 내려갔다.
'지금 당장.'
바람난 연인을 위한 조건중 첫번째. 네 주위에 있는 모든 새끼들은 모조리 다 차단하는거다. 이건 날 위해서도, 그 새끼들을 위해서도 아니야. 존나 김민석 너를 위한거지. 아무도 널 탐내지 못하게, 나만 가질수 있게 할거다. 크리스 새끼. 속으로 존나 기대하고 있겠지. 내가 봐도 예쁜 내 애인인데 네 눈에는 얼마나 예쁘겠냐. 오늘 이후로 눈독 들이면 죽여버려 진짜.
"김민석은 죽어서도 나만 봐야돼."
그가 차에 시동을 걸고, 백미러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진짜 죽이지는 않을거니까, 김민석 너는 이 일만 끝나면 다시 나한테 와라. 그냥 딱 죽이기 직전까지만 만들테니까.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는지 똑똑히 두고 봐.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유리를 뚫을 기세였지만서도, 내심 민석이 아침밥은 먹었는지, 어제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걱정이 되는 루한이였다. 입에 손가락을 물고 걱정을 하던 도중 띠링- 하고 또 다시 두 번째 문자가 도착하자 루한이 운전대를 잡고서 핸드폰을 낚아채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 좋아. 그럼 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카푸치노 시켜놓고 있을게~
"..싫어."
'시르다. 나는 녹차라떼 시켜줘'
"하, 난 녹차라떼 짱팬이라고. 존나 문자는 최대한 김민석같이 해야돼."
그렇게 루한의 차는 소리소문도 없이 민석의 집 앞으로 돌진했다.
-
네..이렇게 연인에게 집착하는 싸이코물 탄생했습니다..
처음에는 진지하게 시작했는데 갈수록 미쳐가는 루하니를 보며, 저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고 합니다. 얘넨 현실에도 이럴거에요. (?)
이전에 쓴 '작은 새에게 키스를' 이것은 나중에 장편으로 연재하기 위해, 잠시 보류하려고 삭제했어요ㅜㅜ 기다리셨던 분들 계시다면 죄송..어느쪽으로 절해야 하죠..?
이 글도 단편이고, 가볍게 즐겨주시면 될것 같아요.
그럼 또 들고 오겠습니다!!!!!!!!!!!!!
녹차라떼 좋아하는 루한이 힘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