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총구가 남자를 겨눈다. 아니, 나를 겨눈다. 내가 남자인지, 남자가 나 인지 알 수 없었다. 알 겨를도 없었고. 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었고 그 남자도 그러했다. 총성과 함께 귓가에 선명히 울려퍼지는 비명소리. 남자의 초점 잃은 눈동자를 끝으로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며칠 째 꾸는 꿈인데도 매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까지 내 앞에 펼쳐졌던 현실이 꿈인지, 아니면 지금 내가 겪고있는 모든 것들이 꿈인지 구분할 서 없을만큼 너무도 선명한 그날의 현장이었다.
옵션 B
"이름이 뭐라고?" "남이경입니다!" 짧게 자른 머리에 꽉 끼는 스포츠 브라를 하고 정장을 입은 나의 모습은 영락없이 나의 쌍둥이 동생인 박지훈과 같았다. "뜬금없이 신입이래서 뭐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나보다 10센치 정도 커보이는 남자가 다가와서 내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비실비실해가지고 제대로 하겠냐? 우리 팀은 빽, 낙하산 이딴 거 취급 안하는데." "아닙니다.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내 목을 가격하려는 그 자의 손목을 왼손으로 잡아 저지시켰다. 오- 하는 조롱인지 모를 감탄사들이 들려왔다. "놔라." 잡은 손목을 놓자 손목을 털며 뭐 저런 새끼가 다 있냐, 육두문자가 섞인 말을 하고는 제 친한 동료들에게 가는 그. 티내지는 않지만 아마 꽤나 아팠을 거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한 사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제히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다.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인사를 하고 나니, 꿈에서 보던 남자가 내 앞에 서있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 이곳의 막내였다는 옹성우라는 사람이 나에게 이곳의 규칙들을 몇 개 설명헤주고 있었다. 아까 내가 했던 행동 같은 건 여기서 용납이 안되니 앞으로는 절대 하지말라는 얘기까지 듣고, 궁금함을 참을 수 없던 나는 그에게 질문헸다. "선배님, 아까 그 분은 누구십니까?" "누구?" "그, 들어오시자마자-" "아, 그 분은 강다니엘 팀장님. 나잇대는 나랑 비슷한 걸로 알고있는데 고등학생 때 복싱 선수 생활하다 스카우트 돼서 오셨대. 적어도 10년은 넘으셨지, 거의 최고참." "아.." 강다니엘. 꿈에서 본 그 얼굴과 확실히 같았다. 그런 사람이 여기서, '그 사람'을 경호하고 있다니.. 꿈과 현실의 괴리감에 속이 안 좋아 차를 탄 것도 아닌데 멀미가 날 것 같았다. '황민현' 벌써 캄캄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퇴근하는 길에 걸려온 전화를 바로 받았다. "여보세요." - 어디야? "집 가는 길이요." - 오늘 괜찮았어? "네, 그 사람은 못 봤는데, 이것저것 알아낸 건 많아요." - 그거 말고. 너 괜찮았냐고. "네?" - 보고 받자고 전화한 거 아니야. 너 마음 복잡할 것 같아서. "... 전 괜찮아요. 지훈이는요?" - 별 일 없어. 너 시간 되면 집에 잠깐 올래? 아버지가 보자시는데. "네. 지금 갈게요." 쌍둥이로 태어난 나와 박지훈은 너무나 달랐다. 항상 남들보다 한 뼘 정도 큰 키에 어디가서 꿇리지 않을 힘을 자랑했던 나와 달리 지훈이는 허약체질에 병을 달고 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내가 지훈이의 기를 다 잡아먹은 거라고 했고 나는 그런 생각들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빠가 집을 나간 뒤로 엄마와 지훈이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어리지만 어른스러웠던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태권도, 유도, 주짓수 등등 안해본 게 없었고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 이름 왔네." "안녕하세요 아저씨." 우리 가족의 정신적, 물질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황민현의 아버지는 정신과 의사이자 엄마의 동네 친구다. 엄마는 민방위 훈련 날이면 미치곤 했다. 벌벌 떨며 머리를 쥐어 뜯고 비명을 질렀다가도 사이렌 소리가 끊기면 아무일 없었다는 듯 기억을 못하는 엄마가 질렸는지, 아님 더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아빠는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내가 고등학생 때였을 거다. 야자를 하고 지훈이와 함께 돌아가는데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갑자기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처 대학교에서 불꽃놀이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바로 집으로 뛰쳐가서 엄마를 찾았지만 거실에도, 방에도 엄마는 없었다. "엄마! 엄마!" 옷장 문을 열어제꼈을 때였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더 날카로운 것이 이마를 스쳐지나갔다. 식칼을 쥔 채 옷장에 쭈구려 앉아 떨고있는 엄마를 바라보던 내 시야가 빨갛게 번져왔다. 나는 내 이마가 베인 것보다 엄마가 다칠까 바로 칼을 뺏어 바닥으로 내던졌다. "박이름!!" 지훈이가 내 얼굴과 바닥에 떨어진 식칼을 번갈아봤다. 나는 턱 끝까지 흐른 피를 닦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 길로 엄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거기서 동네 친구였던 황민현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어때, 뭐 분위기라던가." "그냥 몇 가지 알아냈어요." 아저씨는 어렸을 때 '그 사람' 때문에 부모님을 잃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그에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나를 이용한 것이라 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아저씨는 나를 여기까지 키워낸 장본인이다. "강다니엘이란 사람을 팀장으로 운영되고있고요. 그 사람 최근방에서 경호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총 인원은 저 포함 6명이에요." "생각보다 많지 않구나." "네. 이렇다 할 인물은 없는데 강다니엘, 그 사람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아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자고가라는 말에 알겠다고 답한 뒤 아저씨의 서재를 나왔다. 박지훈이 물을 마시려 막 방에서 나왔을 때였다. "어우, 너 머리 아직도 어색해." "잘생기지 않았냐?" "어. 나 같애." 며칠만에 만난 건데도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할 얘기가 많았다. "너 근데 어쩌자고 거길 들어간 거야?" "그냥 이것저것 알아보는 거지. 아저씨가 준비하시는 거." "위험한 거 아니야? 엄마한테도 말 안했잖아." ".. 괜찮아. 너 엄마한테 말 흘리기만 해라." 내가 직접 그에게 복수를 하려고 거기에 들어간 것을 아는 건 아저씨와 나밖에 없다. 황민현은 대충 눈치를 챈 건지 아저씨가 말씀하신 건지 뭔가 알고 있는 낌새였지만 말이다. 숨통을 억죄던 브라를 벗어던지고 손님방 침대에 누웠다. 피곤한 날이어서인지 금세 잠에 들고 말았다. "일단은 일보 후퇴하게. 저 새끼들 지금 광주 시민들 씨를 말려버릴 작정인 것 같은디." "여기서 끝내면 진짜 끝이란게요." "어쩌겄냐, 지금 총맞은 사람만 백 명이 넘어야." "아저씨가 그러시면 학생 연합만이라도 할 건게, 알아서하세요." 남자는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에는 확신만이 가득차 있었다. 이번에는 그와 함께 시위현장 1열에 서있었다. "계엄령을! 해제하라!" 발포 명령에 옆에 있던 동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남자도 어깨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오전 4:17 어두운 방 안에서 생각보다 밝았던 핸드폰의 불빛이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이깟 악몽 때문에 충분히 잠자지 못하고 깨어났다는 사실이 기분을 엿같게 만들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아까 꿈에서의 장면이 떠올라 잠에 들지 못했다. 두려움을 잊은 듯 보였던 그 단단한 눈빛이 떠오르자 몸서리가 쳐졌다. 나는 밖으로 나와 냉수 한 잔을 전부 비웠다. 깨질 듯한 차가움이 목구멍을 넘어가고 나서야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싱크대에 기대어 잠깐 서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름이야? 거기서 뭐해?" 황민현이 자다 깬 몰골로 걸어나오며 말헸다. "아, 목 말라서 물 마시러요." 그가 잘 때 무척이나 예민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쉽게 깨는데, 불까지 켜다니 말 다했다. "깨워서 죄송해요.." "아냐, 나도 목 말라서 나온 거야." 그는 그답게 사람 좋은 말을 하며 웃어보였다. 그리고 정수기를 온수로 바꾸고 반 컵정도 받고 찬 물을 조금 더해 적당한 온도를 맞추었다. "이름아." "네?" "너.. 아버지가 너를 거기로 보낸 정확한 이유 말해줄 수 있어?" 아저씨가 말씀 안 하셨나보다. 황민현은 '나는 너를 걱정해.' 라는 눈빛으로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늘 해오던 것처럼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그냥 정보 캐내는 스파이 같은 거죠." "그래? ... 요즘 아버지가 뭘 계획하고 있으신 건지 알 수가 없어." 전 알아요. 아저씨는 그 자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저도 물론 동참했고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황민현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묻어나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 다치게 하기 싫어. 아버지가 위험한 일 시키면.. 그냥 못하겠다고 해. 나한테 꼭 말하고." 나는 차마 황민현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의 손에 들린 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새벽에 일어난 탓에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자 허리에 무전기를 차고 있는 강다니엘이 보였다. 나는 큰 목소리로 깍듯이 인사했다. 꿈에서 본 얼굴과 완전히 같았지만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까딱하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일찍 출근하시네요?" "아, 뭐. 신입도." "전 좀 일찍 눈이 떠져서 일찍 나왔습니다." 강다니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널부러져 있는 짐을 정리했다. 그가 복싱 글러브를 집어든 찰나를 놓치지 않고 내가 물었다. "복싱하세요?" "어. 아침에 잠깐." "오, 저도 복싱 좋아하는데."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집요하게 말을 걸어댔다. "혼자하시는 겁니까?" "어." "스파링 상대 해드릴까요?" 그 말에 강다니엘이 약간의 관심을 보였다. 나는 그 때 바로 다시 말했다. "혼자 샌드백만 치고 있으면 지루하긴 하잖아요." "내일부터 나와." "예?" "옆에 체육관 있지. 거기로 5시반까지." "... 네! 알겠습니다!" 새벽 5시부터 강다니엘과 복싱을 한다는 사실이 썩 맘에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이 자와 가까워지는게 내 일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을 하고, 오늘 일정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집앞에서 보초를 서거나 하는 비생산적이고 끔찍한 일은 의경이나 직업경찰이 하지만 더 신경쓸 것도 없어보이는 외부의 시선을 신경쓰는 그 자는 바깥 외출을 할 때는 다른 경호팀-현재 내가 소속된 팀 말이다-을 항상 달고다녔다. 외출할 때마다 경찰을 몰고다니는 꼴을 보인다면 언론이나 여타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 자가 강다니엘과, 다른 덩치 큰 경호원과 함께 나왔을 때부터 경호가 시작되었다. 그 놈의 평온한 면상을 보니 치가 떨려오며 당장 달려가 가슴에 총구를 겨누고 싶었다. 물론 아저씨가 그런 것을 절대 원하지 않기에 나는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자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추악스러운 뒷통수가 검은 차 속으로 사라지고 강다니엘이 그의 차 앞 좌석에 탔다. 다른 경호원들은 뒷 차에 나눠탔고. 나는 옆자리에 탄 옹성우에게 물었다. "선배, 선배는 어떻게 여기 올 생각을 하신 겁니까?" "하는 일에 비해 보수가 세서?" 옹성우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킥킥대며 웃었다. "좋은 거 알려준다- 이제 막내 탈출했다 이거지?" "저 이제 후배도 생겼습니다-" 그는 내 어깨에 자기 팔을 두르며 말했다. 나는 멋쩍게 웃어보였고. 그의 바깥 외출은 정말 별 게 없었다. 호텔로 들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가 뭔가 작은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방 앞에서 서있었고, 그게 오늘 할 일의 끝이었다. 옹성우가 한 말이 격하게 이해됐다. 물론 몇몇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지만 막내인 나는 그저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지겹게 하루가 지나고, 내일 새벽부터 운동을 해야한다는 사실에 바로 집으로 향했다. 물론 아저씨네가 아닌 내 자취방으로. 번호키를 누르고 들어간 그곳에서는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방에 불을 켤새도 없이 매트릭스에 몸을 던졌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더보기 |
오랜만이에요! 시간 날 때마다 틈틈히 쓴 글을 들고 왔어요 성덕은 아니지만 .. 재밌게 봐주세요 !! 다음편은 시험 끝나고 올라올지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