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상 아침 운동을 나오니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말없이 몸을 풀고 샌드백을 몇 번 두들기고 나서 링 안으로 들어갔다. 강 팀장은 미트(손에 끼는 샌드백)를 가지고 들어왔고. "아, 저 주세요." "됐어." "아니면 스파링해요, 팀장님." "그럼 너 오늘 출근 못 해." 이유있는 자신감에 차있는 얼굴이 밉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미트를 손에 끼고 자세를 잡는 강 팀장에 할 수 없이 나도 자세를 잡았다. 그대로 미트에 주먹을 날렸지만 그의 팔은 뒤로 물러나긴 커녕 거의 미동도 없었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미트를 때리고 나서 주먹질을 멈추었다. 그는 나를 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제법인데." "감사합니다." 허억 소리를 내며 숨을 고르는 나를 뒤로 하고 링 밖으로 나간 강 팀장은 자신의 글러브를 낀 후 다시 링 안으로 들어왔다. "스파링 하자." 인정 받은 기분에 헤실거리며 웃다가 문득 든 경계심에 표정을 굳혔다. 이 사람과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해야한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며 뻐근한 목을 풀었다. 헤드기어(머리 충격 방지)를 하고 스파링을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다르구나.' 이 자가 나를 봐주고 있다는 것과, 내가 최선을 다 하고있음을 알았다. 물론 강 팀장은 복싱 선수 출신이었다고 하지만 어쩌다 맞은 한 대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는, 마치 괴물 같았다.
그가 때린 한 방에 나는 링의 끝으로 밀려났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다시 자세를 잡는 나에게 다가오던 그는 내 앞에 멈춰서서 나의 왼 팔뚝을 한 번 툭치고는 링 밖으로 나갔다. "수고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강 팀장은 윗옷을 벗어던지고 샤워실로 향했다. 뽀얗고 넓은 등판을 보며 멀뚱히 서있자 그는 들어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 씻냐?"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웃통을 훤히 드러낸 채 저런 말을 하니-물론 그는 아무런 의도가 없었겠지만- 나도 모르게 불순한 생각이 들었다. "팀장님 나오시면 들어가겠습니다...!" "같이 씻어도 돼." 낯이 점점 뜨거워지는게 느껴져 나는 정말 괜찮다고 빨리 둘러대고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그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 차리자. 를 몇 번 되내이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정장까지 챙겨입고 나오자 강 팀장이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색과 흰색의 말끔한 정장과 땀내가 배여있는 체육관의 풍경에 이질감을 느낄 때 쯤, 강 팀장이 나를 발견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 아침은 안 드십니까?" "원래 안 먹는데." "한국인은 밥심인데.." "... 가, 밥먹으러." 그와 나는 체육관 근처 국밥집으로 향했다. "역시 선수는 다르십니다-" "너는 깡말라보이는데 은근 맷집 세더라." "안 해본 운동이 없어서요. 운동하면서 많이 맞기도 했고. 핫뜨, 뜨!" 얘기 도중 나온 국밥에 성급하게 한 입 떠넣자마자 혓바닥을 데였다. "아, 아 혀 데였어요." 강 팀장은 찬물을 내 컵에 가득 따르며 환하게 웃었다. "넌 원래 경계심이 없는거냐, 아니면 뭐 친화력이 좋은 거냐?" "예? 아.. 뭐, 어차피 웬만한 사람들은 힘으로 이기니까 경계심 같은 건 없고.. 운동 이곳저곳 다니면서 되게 사람들하고 쉽게쉽게 친해졌던 것 같네요." "친한 직장 동료가 없거든, 나는. 뭐.. 친구도 어릴 때 친구 빼고 없고." "아.." ".. 왜 그런 지는 모르겠는데 나만 보면 다 눈 피하고 도망가더라고." "저는 왜 그런 지 알 것 같습니다. 팀장님 눈빛만 보면 최홍만도 때려눕힐-" "신입, 최단 기간에 해고 당해보고 싶어?" "아닙니다!" 그는 나에게 장난을 걸며 아이처럼 웃어보였다. 어쩌면, 어쩌면. 이 사람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옵션 B
강 팀장과 내가 함께 출근하자 무전기를 체크하고 있던 팀원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미간을 찌푸리거나, 제 눈이 잘못된 건 아닌지 비벼본다거나 하는 동작을 취하면서 말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싸해진 분위기를 깨려 내가 먼저 밝게 인사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팀원들은 강 팀장에게 인사를 했고, 각자의 일을 계속했다. 옹성우가 나에게 다가와 얼굴을 바짝대고 말했다."너 강 팀장님이랑 왜 같이 들어와? 왠지 오늘 늦게 출근하시더니, 그것보다 너 무슨 일 없었어? 맞진 않았어?" "맞긴 맞았는데.." 헙, 하고 제 입을 틀어막는 옹성우였다. "장난이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 뒤로 며칠간 강 팀장과 나는 운동을 계속했다. 엄마와 아저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정말-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미간을 팍 찌푸린 채 걸어들어오던 그의 첫 인상과는 정말 거리가 멀게,
항상 해맑은 강아지 같은 웃음을 달고 사는 그였다. 강 팀장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꺄르륵하며 웃어댔다. 원래 웃음장벽이 낮은 건지, 아니면 사람들하고 얘기를 하도 안 하다보니 이렇게 변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팀장님 저 오늘은 안 봐드립니다." "아 또 허세부린다 진짜." "그동안은 다 연기였죠-" 나는 까불거리다가도 스파링을 시작하고 강 팀장에게 몇 대 맞은 뒤 바닥에 넘어지면 "죄송죄송죄송죄송해요!!"하며 몸을 굴려 주먹을 피했다. 그런 내가 재밌다는 듯 그는 한참을 웃어댔고, 나의 민망한 웃음과 함께 운동을 끝냈다. "아, 팀장님 오늘 퇴근하고 뭐하세요?" "별 거 없는데?" "그럼 저 술 사주시면 안됩니까?" "그래, 뭐." 이게 다 작전을 위한 일이야, 라고 치부해버리기에 '술 사주세요'라는 말은 강 팀장에대한 사심으로 가득한 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강 팀장을 더 알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하루종일 퇴근만을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이럴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죄책감과 욕심이 머릿 속에 반반씩 가득찼다. 하늘이 캄캄해졌다는 건 퇴근시간이 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퇴근하자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총알같이 나갈 준비를 했다. 지잉- 그 때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확인하자 문자 하나가 와있었다. 황민현 이름아 지금 좀 볼 수 있을까? 너 데리러 왔는데. "아.." 나의 탄식소리에 강 팀장이 불쑥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혹시 핸드폰 화면 속의 내 이름을 볼까 황급히 화면을 숨겼다. "저, 팀장님.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런데, 술 다음에 사주시면 안될까요?" ".. 그래, 가 봐." 강 팀장의 눈에 아쉬움이 비춘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조금 더 생각할 겨를없이 나는 황민현에게 향했다. 골목을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서자 건너편에서 나를 바라보고있는 황민현이 보였다. 초록불이 켜지고, 평소와 같은 걸음으로 걸어가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긴다리를 휘적거리며 빠르게 다가왔다.
"..." "..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왜이리 안 좋아요." 그는 내 손목을 살짝 잡고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을 건넜다. 어디가냐는 나의 물음에도 동요하지 않고. 황민현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한적한 공원에 들어서서야 그는 나의 손목을 놔주었다. "왜 그러는데요." "나 다 들었어." ".. 뭘요." "아버지한테 못하겠다고 해."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황민현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했지, 너 다치게하고 싶지 않다고. 아버지가 위험한 일 시키면 못하겠다고 하라고." "..." "이름아." ".. 뭔데요." "어?" "오빠가 뭔데요." 나의 말에 그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입을 떼려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내가 원해서하는 거고, 내가 다치는 거 싫으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면 되잖아요. 나 다치지 않게." "..." "아저씨 때문에 하는 거 아니에요. 엄마, 우리 엄마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데요." 나는 이마를 덮고있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넘겼다. "이 흉터, 누구 때문에 생긴 건데요. 내가 누구 때문에 매일매일," "..." "악몽에 시달리는데요." ".. 악몽?" 내 꿈에대해 누군가에게 말한 건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흥분했는지 얼떨결에 내뱉은 말이었다. "악몽이라니, 자세히 말해봐." "... 아니에요." "아버지한테 말씀드리기 전에, 빨리." "하아.. 네, 말 그대로 악몽이요. 매일매일 5월의 광주에 떨어져요, 저는. 거기서 어떤 남자랑 함께 시위하고요, 총 맞고 쓰러지고, 곤봉으로 맞아 얼굴이 다 터지는 광주 시민들을 눈 앞에서 보고요. 어제는, 어제는.." "그만해도 돼." 황민현은 나를 자기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미안해. 이름아, 내가 미안해."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그에게 의지해서 나는 그동안의 설움과 아픔들을 눈물로 모두 쏟아냈다. 눈물을 그치고 벤치에 앉아있는 나에게 황민현이 생수를 사와 건넸다. "네가 이렇게 힘들어 하고있을 줄 몰랐어." "..." "네가 원한다면 도울게, 최선을 다해서." "고마워요." "그래도 네가 다치거나 하는 건 싫어. 정말." 그는 바짝 올라간 눈꼬리가 쳐져보이도록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밤공기가 서늘하게 뒷목을 감싸왔다. 오늘도 평소같은 하루를 보내며 퇴근만을 기다렸다. 강 팀장과의 술 약속을 다시 잡았기 때문이다. 오후 9:00 "정리합시다-" 속으로 예스! 를 외치며 신나게 무전기를 풀어버렸다. 강 팀장의 표정도 밝아보였다. "팀장님, 갑시다!" "신났네 신났어." "팀장님이랑 처음 마셔보는 술 아닙니까-" "술은 잘 해?" "적당히 하는데. 팀장님은 잘 하시죠?" "어떻게 알았지." "딱, 보면 압니다-" 시내로 나간 우리는 대학생들이 바글거리는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까지 본분을 잊지않았다. "팀장님은 어쩌다가 경호팀 일을 하시게 된 거예요?" "복싱 선수 생활하다 스카우트 됐어. 고등학생 때.. 뭐, 운동 계속하기에 집안사정이 좋지 않아서. 회장님이 날 살리셨지." ".. 회장님 밑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이 뭐라고 하셨어요?" "말 안 했어." "네?" "알잖아. 어떤 분인지. 아마 엄마가 알았으면 돈이고 뭐고 못하게 하셨을 거야." "..." "그냥 정말, 대기업 회장님 경호라고 했어. 가끔 티비 출연할 뻔한게 좀 위험하긴 했지." "팀장님은 회장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세요?" "음. 어떤 사람이 볼 때는 가혹한 독재자, 살인마.. 겠지. 나한테는 은인같은 분이면서도 아직까지 무섭고, 다가가기 힘든 존재. 회장님은 나를 가끔 손자처럼 대하시는데.. 나는 아직." "... 그렇군요." 무거워진 분위기에 그가 말을 돌렸다. "아, 나 이번주 금요일에 아침 운동 안 한다." "에? 왜요?" "아니, 아예 출근을 안 해." "..." "할아버지가 아프셔서, 부산 내려가봐야 할 것 같아." "아.." 머리가 딩- 하고 울렸다. 강다니엘이 자리를 비운다. 그것은 곧 나에게 기회가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우리는 내일 출근을 위해 이만 술자리를 접어야했고, 나는 아저씨를 만나야했다. 이성적으로라면 그래야했다. 그런데, 나의 발길은 자취방으로 향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서 생각했다. 왜 망설이고 있는 걸까. "강의건!!" 대학생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달려왔다. 강의건. 이라고 했다. "미친놈들이 니만 눈에 불을 키고 찾는당게, 어째 귓구녕에 니 이름이 들어간 진 몰라도! 니 여깄으면 안되야 지금!!" "... 맞아죽는 일 있어도 안 토낀다캤지." 그 남자는 상의를 탈의하고 어깨에 붕대를 칭칭 감은 상태였다. "어차피 언제 뒤질지 모르는 목숨이여." "니는... 니는 우리헌테 중요헌 사람인 거 모르냐." "누군 중요허고 누군 안 중요허냐." "그래도 니는 다르잖어. 니 없음 안되야 우리.. 제발 의건아.." 그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떨궜다. 그는 빨간 피가 번진 붕대를 칭칭 감은 몸 위에 흰 셔츠를 걸쳤다. 그리고 이 상황이 고통스럽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면이 전환되었다. 높지 않은 건물, 달빛이 좁은 창 안으로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계단 한 구석에 앉아있는 강의건, 그 앞엔 군복을 입은 사내가 그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천벌 받을 것이여, 인간도 아닌 새끼." "빨갱이 새끼가 말이 많아!!" 군인은 자신을 증오스럽게 쳐다보는 강의건의 가슴팍에 총구를 가져다댔다. 두 눈동자에는 혼란스러움과 살기가 공존했다. "계엄령을!! 해제..!!" 탕- 둔탁한 소리와 함께 군인은 총을 떨어트렸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그는 강의건의 뒤집어진 눈깔을 한 번 보고, 피로 물든 그의 가슴팍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듯 주위를 돌아다녔다. "빨갱이 새끼니까.. 빨갱이 새끼는 사람이 아니지..!! 하하하하하..!!!" 그는 곧 미친 사람처럼 자리를 떴고 건물 한 켠에는 강의건의 시신이 싸늘하게 버려졌다. 민주화 영웅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꿈에서 깨어났다. 지독하게 나를 괴롭히는 그 꿈에서. 내가 겪고있는 현실과는 너무 달라서, 그래서 나를 고통으로 몰아가는 꿈에서 아마 영영 깨어난 것 같다. 까닭도 모른 채 눈물이 흘렀다. 그의 마지막 눈빛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하.. 하아..." 잠깐이라도, 강다니엘을 향한 사적인 마음으로 대의를 저버리려한 나를 꾸짖기라도 하는 듯, 그의 까만 눈동자가 밝게 나를 비추었다. 망설임이나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외쳤다. 그래서 두려웠다. 나는, 그와 같이 엄청난 신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엄마를 그렇게 만든 사람에대한 복수심이었을 뿐. 이게 맞는 길일까, 정말.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누르고 귀에 가져다대자 몇 번의 신호음 끝에 핸드폰 너머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이름아. ".. 아저씨." "때가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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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까진 올리고 시험 준비를 하하하하ㅎ하ㅎ하 진짜 공부 안하고 글만 쓰면서 살고 싶네요 .... 읽어주신 독자님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