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겐 모든 게 생소했다. 어쩌면 여주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축제와 같은 즐거운 게 있다면 친구들과 놀러 가거나, 함께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마는 '친구'가 되어버린 이들과 함께 즐겁게 놀러 다닐 수 있다는 것. 이건 여주에게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의 대다수의 시간이 혼자였고, 노는 건 사치였다. 그런데 음양세계로 오고, 아이들을 만나니, 무영세계와 상황이 아예 반대였다. 혼자 있는 시간은 극히 드물었으며, 놀 시간은 별로 없었지만 논다는 것이 사치가 되지는 않았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샌가, 여러 사람들과 밥을 먹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웃음도 지을 수 있게 된 자신을 본 여주는 어리둥절했다. 왜 이렇게 바뀌었지. 고작, 한 달 있었는데, 왜 백팔십도로 바뀐 걸까. 여주는 옆에 있던 얼굴들을 쓱 둘러보았다. 다들 사격 게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여주는 그 모습을 보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심이나 설움이 섞인 한숨이 아니라, 그냥 주위 상황이 허탈해서 나오는 한숨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 이렇게 바뀐 원인은 눈에 불이라도 뿜어낼 것처럼 소리 지르고 있는 이들 때문이지 않을까, 여주는 그렇게 추측했다. 아직 여주는 '친구'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위에 있는 그들이 바로 '친구'인 것인데.
".... 말도 안 돼"
"패자는 입을 다물도록. 그리고 조용히 달고나나 살 것"
"아, 부승관. 되게 자신만만해서 너한테 걸었는데...."
한창 열을 올리던 사격 게임 내기가 끝났는지 승관과 한솔은 나라를 잃은 것 마냥 얼굴에 퀭해져 있고, 석민과 성연은 방방 뛰고 있다. 은우는 그 옆에서 크게 웃고 있었고. 은우가 살짝 떨어져 있던 여주를 보더니 여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 그림이 '청춘'이라는 단어를 담고 있는 것과 같았다. 누누의 목줄을 사고 돌아온 순영은 그 모습을 보더니 슬쩍 웃음을 지었다. 항상 혼자였어서 저런 구도는 별로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나름 저런 구도도 괜찮네.
순영이 무리에 합류하고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내기에서 진 승관과 한솔이 달고나를 사러 가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거리는 참 화려했다. 한복의 다채로운 색상들이 길거리에 색채감을 더했고, 흩날리는 분홍색 꽃잎이 풍경을 더욱 낭만적이게 해주었다. '양지의 거리'의 건물들은 어쩜 다 그렇게 반짝반짝하는 지, 밤하늘에 별이 필요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여주야!"
눈이 풍요롭던 참에 더욱더 풍요롭게 해주는 인물이 등장했다.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높게 치켜들어 올려야 하는 큰 키와 눈이 풍요롭지 않을 수가 없는 확실한 이목구비. 방송부가 다음 달, 코너에 인터뷰를 할 유력 인물 삼인에 들어가는 사람. 여주 앞에 선 인물이 곧 무슨 말을 할지 여주도 알고, 아이들도 알았다. 아, 순영은 모를 수도.
"밖에서 처음 보는 것 같아. 그래서 그런지 더 좋아졌어"
"역시, 넌 논리가 없어"
"좋아해, 여주야"
여주의 태클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제 할 말을 하는 민규였다. 다들 이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던 눈치라 별 감흥은 없었지만 순영은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처음 보는 모습, 주인이 한 남성에게 고백을 받는 모습. 꽤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 표정. 안 웃을 수가 없었다. 고백받은 사람의 표정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표정. 역시, 우리 주인님. 근데 별로 아무런 타격이 없는 저, 남학생의 모습. 정말 재미있는 상황에 하마터면 육성으로 크게 웃을 뻔했다.
"여주야, 저거 먹어봤어? 저거, 진짜 맛있어"
"아, 그래?"
"한 번 먹어볼래? 내가 사줄게"
"됐어. 별로 안 당겨"
"그래? 그럼 저건? 저건 우리 엄마 딸이 좋아하는 건데, 난 한 번도 안 먹어봤지만 맛있대"
"아까 먹어봤어"
어느 순간, 같이 다니게 된 민규였다. 맨날 차이는 데 꾸준히 고백하는 걸 보니 이상한 사람 같긴 하지만 심성이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기에 다들 내버려 두었다. 같은 학년, 석민과도 꽤 친하고 어색함은 없었다. 그렇지만 민규와 여주와의 대화는 마치 창과 방패 같았다. 민규가 창, 여주가 방패. 옆에서 듣고 있던 순영은 정말 간절하게 큰 소리를 내서 웃고 싶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크게 웃으면 자신한테 시선이 올 게 분명하기에 참았다. 아직은 이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싶으니까.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주인. 난 저곳에 볼 일이 있으니 나중에 방에서 만나도록 하지"
재밌게 여주와 민규를 지켜보던 순영은 벌컥 여주의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순영 탓에 걸음을 멈추게 된 여주였고, 그에 따라 하나 둘, 발걸음을 멈추었다. 승관은 그것도 모르고 주위를 구경하며 계속 가다가 빠르게 뛰어 돌아왔다. 순영이 응시하고 있는 곳은 좁게, 샛길처럼 나있는 골목이었다. 순영의 말에 여주는 같이 가도 되지 않냐고 말을 하였다. 여주와 순영의 대화를 들은 민규는 다급하게 여주에게 물었다.
"호, 혹시 저기로 가려고?"
"왜. 안 돼?"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저기 좀, 으스스해 보이고.... 또, 되게 이상한 가게가 하나 있다고 그러던데, 괜히 지나갔다가 화라도 당하면 어떡해"
여주와 순영의 행동을 주의 깊게 보던 민규는 한마디 던졌다. 여주는 그에 불퉁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민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소심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옆에서는 동조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중 머리가 떨어질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사람은 승관과 석민이다.- 순영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뒤도 안 돌아보고 골목길로 향했다. 여주는 그런 순영의 뒷모습을 보다가 아이들에게 '그럼 너네는 여기 있어. 나는 갔다 올게'라고 말하며 순영의 뒤를 따라갔다.
"아, 김여주! 쟨 뭐, 겁도 없어!"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니 막다른 벽이 나타났고 그 벽 앞에 누가 봐도 음침해 보이고, 다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집이 하나 나왔다. 문에는 '영업합니다.'라는 붉은 글씨가 적혀진 명패가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흙더미를 만들어 그 위에 나무판자가 하나 꽂혀 있었다. 나무판자에도 붉은 글씨로 가게 이름이 써져 있었는데, 가게 이름이 '1004의 집'이었다. 그걸 본 아이들은 얼굴이 아예 하얗게 질려 있었다.
'비주얼로 봐서는 천사의 집은 무슨, 악마의 집이라고 해도 믿겠는데?'라고 생각한 이들은 여기서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집에 다다르니 순영은 잠시 이제야 아차 싶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터라, 가게 주인의 성격을 잊고 있었다. 얘네, 같이 들어가려도 괜찮으려나. 순영은 힐끗 아이들을 보니 한솔과 여주 빼곤 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따라오진 않겠군.
"악!"
갑자기 열린 문 때문에 성연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놀랬고, 다들 비명만 안 지른 것뿐이지 다소 놀란 듯했다. 순영과 여주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지만. 순영이야 그렇다 쳐도, 여주는 무영세계에서 이런 집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동네에서 살았던 지라 별 무서움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정겨울 정도. 문이 열린 가게의 내부는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영은 손에 들려 있던 불을 '후'하고 입김을 불어 껐다. 한 줌의 불이 사라지니 빛이라고는 달빛 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순영이 양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가게 안속으로 들어가니 여주도 빠르게 따라 들어갔다. 뒤에서 아이들은 따라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따뜻함이 가득 넘치는 청춘 만화 영화 속 한 장면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음침한 공포영화물을 찍게 되다니. 아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여주까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문이 느리게 닫히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모습에 헉하고 놀랐고 은우가 뛰어 들어가자 나머지도 바로 뒤따라 들어갔다. 이들에게 여주의 존재감은 굉장한 듯 보였다.
아이들까지 다 들어가자, 바로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밖에서 지켜본 오두막집에서 불이 켜졌다. 문 밖으로 빛이 새어 나올 정도로 밝은 불빛이었다. 그리고 불빛과 대조 되게 문 앞에 있던 명패 위에 빨간 글씨로 써져있던 '영업 중입니다.'라는 문구는 '영업이 끝났습니다.'라는 문구로 바뀌었다.
-
"여주님, 맞죠?"
"어. 나 맞아"
외관에서 보인 환한 빛은 안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컴컴한 어둠 속에 있게 된 아이들은 불이라도 만들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주술이 발동되지 않은 덕에 그냥 아무것도 안 보인 채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정말 어둠은 짙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무엇인지 아이들은 뼈저리게 느꼈다. 앞으로 걸어 나가니 어둠 속에 적응된 눈 덕분에 사람 형체가 하나 보였고, 성연은 귀신같이 여주임을 알아챘다. 다들 여주를 보자마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안정감을 느낀 덕분에 여주 곁에 서서 무서웠다고 찡찡대고 있었다.
물론, 여주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한솔은 순영의 행방을 물었고 여주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모른다고 답했다. 성연은 물기 있는 목소리로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 많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걸어가 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데다가, 여주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던 모양인지 성연에 말에 동의하고 문 쪽으로 다시 향했다. 순영이야, 알아서 잘 나오겠지. 괜히 일신이겠어. 여주는 뒤를 슬쩍 돌아보곤 아이들을 뒤따랐다. 얼마 걷지 않아 문이 있는 곳에 다다랐고, 민규가 성큼성큼 걸어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너, 뭐 하냐"
".... 잠시만 좀 기다려봐"
"너, 문 하나 못 열어?"
"야, 이게 내가 못 여,는 게 아,니라 안 열리,는 것 같은데...!"
문 앞에서 꼼짝 못 하고 있는 민규의 모습에 석민은 한심하다는 말투로 민규를 구박했다. 민규는 석민의 말에 반박하며 문고리를 잡고 온 힘을 당해 잡아당겼지만 문은 비웃기라도 하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민규는 씩씩거리며 문을 열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석민은 혀를 한 번 차고선 민규를 옆으로 밀쳤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고 잡아당겼다. .... 어라. 큰소리 떵떵치던 석민은 당황했다. 정말 안 열리기 때문에. 덜컹덜컹하는 것도 없이 정말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진짜 안 열리는데....?"
"그 말은.... 지금 우리 여기에...."
"갇힌 거야?"
석민의 말에 승관은 입으로 내뱉기도 싫다는 듯이 띄엄띄엄 말했고, 승관이 말하려던 말 중, 가장 핵심적인 말을 은우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밖으로 소환하고 있던 신수들이 하나둘씩 낑낑대며 쓰러졌다. 그리고 불빛을 내뿜으며 소환이 해제되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아이들은 아까보다 배의 공포심을 느꼈고, 다들 겁에 질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한솔이 가만히 있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요"
"...."
"....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소리.... 저만 들려요?"
한솔의 말에 다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숨죽인 채, 청각에 모든 집중을 동원하였다. 어둠 속에서 아주 작지만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였다. 한솔과 민규는 자신의 신수인 사자와 늑대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몇 번 들어보았지만 이 소리는 자신의 신수와는 다른 짐승의 소리였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철끼리 부딪히는 소리, 또, 탁, 탁, 탁 거리는 소리도 났다. 아마, 무엇인지 모르는 짐승의 발걸음 소리겠지.
사실, 짐승 정도는 공포심을 주기에는 강하게 자라온 아이들이라 별 상관은 없었지만 가까이 있어야 얼굴이 보이는 칠흑 같은 암흑, 주술도 제대로 발동되지 않는 공간. 이 두 가지 설정 덕분에 짐승을 경계하기에 충분했다. 뭐, 말이 좋아 짐승이지. 만약 짐승 형태를 띤 요괴라면? 더욱 골치 아파진다. 가뜩이나 주술이 발동되지 않는데, 요괴라니. 최선의 상황을 생각해보았지만 '최선'은 없었다. 그래서 다들 이 생각만 했을 것이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점점, 발자국 소리가 커지더니 짐승의 숨소리까지 크게 들려왔다. 아무리 어둠에 적응된 눈이라지만 어느 정도 가까이 있지 않은 이상 보이지 않았다. 즐거운 축제날, 왜 우리는 공포 영화를 찍고 있어야 하는가. 승관은 남몰래 한탄도 했다. 그때, 주위가 밝아졌다. 여주와 아이들 주위로 둥글게 불이 타올랐다. 마치, 불로 만들어진 원 안에 가둬두겠다는 듯이. 갑자기 밝아진 주위에 아이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겨우 눈을 뜨니, 불길 사이로 짐승의 정체가 보였다.
"저거, 개 아니야?"
"개? 개가 원래 머리가 세 개였나?"
"아, 그럼 개가 아닌가"
"멍청이들아"
"...."
"저거 지옥견이잖아"
석민과 민규의 멍청한 대화에 은우는 어이없음과 동시에 공포가 깃든 목소리로 말하였다. 지옥견. 머리가 세 개가 달려 있으며 눈매가 매우 사납고, 성격은 흉악하기 그지없는 '요괴'이다. 지옥견의 속성은 '화(火)'로, 화와 관련된 주술은 기본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여주 무리를 둘러싼 이 불길도 지옥견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지옥견은 성격이 흉악하긴 하지만 다른 요괴와 달리 악을 추구하는 성향은 아니기에 훈련만 잘 시키면 아무런 문제 없는 요괴라 교도소를 지키는 개로도 쓰인다. 뭐, 그건 훈련이 잘 됐을 때, 이야기고. 지금 눈앞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거로 봐서는 여주와 아이들을 위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천사의 집이라면서, 키우고 있는 개는 지옥견이라니. 완전히 모순이었다. 정말 까딱했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네, 주술 사용해서 해치우면 되잖아? 왜 멀뚱거리고 있어"
여주는 아직 주술을 사용해보지 않은 것인지, 아이들에게 주술을 사용하라고 이야기했고 그에 아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설명을 들은 여주는 혀를 한 번 찼다. 어떻게 되먹은 천사의 집이 이딴 거지. 욕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주술을 쓸 수 없었기에 어떻게든 도망가려 했지만, 주위에 있는 불길은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다 태워버리겠다는 듯이, 조금만 움직여도 거세졌다. 승관은 다시 한 번 한탄했다. 즐거운 축제날, 요괴의 밥이 되게 생겼구나. 골목길로 들어갈 때, 강력하게 여주를 말리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는 승관이었다.
"내가 음양세계는 잘 알지 못해서 그런데 주술 발동이 안 되는 장소가 있어? 여기가 그 장소야?"
".... 잘 모르겠어. 웬만하면 발동이 안 되는 곳은 없어"
여주의 물음에 은우가 대답했다. 은우의 대답을 들은 여주는 바로 다른 질문을 했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건 은우가 아닌 민규였다.
"그런 주술이 있긴 한데, 워낙 어려운 주술이라 퇴마사 활동을 오래 한 사방신 정도가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어"
"그럼 그걸 푸는 주술은? 없는 거야?"
"영력을 사용한 사람보다 영력이 강하면 풀려"
민규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찢어질 것 같은 지옥견의의 목 주위에 있는 가죽이 세 마리 모두, 찢어졌다. 지옥견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들어 민규를 향해 입을 벌렸다.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진 일이라 민규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멍하니 지옥견의 입속만 쳐다보고 있었다. 눈앞에 드리워진 혀에 끼인 백태를 보고서도 '죽음'이란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화장패(火障牌)!"
지옥견이 만들었던 불과는 다른 불꽃이 여주 무리를 감쌌다. 화장패(火障牌), 불길로 된 벽으로 방어 주술에 해당된다. 화장패? 다들 놀라 누가 한 건가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무리의 맨뒤에 있던 여주가 왼손을 쭉 뻗어 화장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주님!"
승관과 성연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여주의 이름을 소리쳤다. 두 명의 눈에는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곧,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릴 것만 같았다. 한솔과 은우는 입을 벌리고 여주를 쳐다보고 있었고 석민과 민규는 여주를 쳐다보며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주도 자신의 주술이 발동할지 안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막 저지른 거라 제법 당황한 상태였지만 표정을 빠르게 가려 주위를 보고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 웃음을 지었다.
"웬만하면 나보다 영력 강한 사람 없잖아"
누구한테 배운 건지 능글맞은 목소리로 허세를 떨고 있는 여주였다. 다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럴 상황이 아닌 거 알지만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김여주, 웃겨 진짜. 석민은 자신의 영향인가 싶어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민규는 얼빠진 표정으로 여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주야, 나 지금 너한테 백아홉 번째 사랑에 빠진 것 같아"
"힘 빠지니까,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마"
지옥견은 쉬지 않고 붉은 벽에 몸을 날렸다. 몸을 박고, 튕겨나가고, 박고, 튕겨나가고, 박고 튕겨나가고. 행위의 반복이었다. 여주는 힘들었다. 안 그래도 정신을 바로잡아야 방어벽을 유지하는데 이렇게 강한 요기와 물리적으로 부딪히는 것은 정신을 가다듬는 걸 힘들게 했다. 여주와 이름 모를 사람의 영력이 부딪히는 덕분에 주술의 효력이 비교적 약해진 덕분에 2학년인 석민과 민규, 은우는 공격 주술까지는 무리더라도 손에 물을 만들어 낼 수는 있었다. 주술 때문에 많은 양은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수도꼭지를 세게 튼 정도는 되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불길에 보내고 있었다. 다행히, 지옥견이 여주의 방어막을 깬다고 정신없는 덕분에 불길은 훨씬 약해져 있었다.
여주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들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이렇게 영력이 센 것인지 자신의 영력으로는 이 사람의 영력을 먹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여주였다. 끈기가 강한 건지, 무식한 건지 모르겠는 지옥견이 달려들 때마다 벽의 파동이 심장까지 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짜증 났다. 제발, 좀 포기해라. 아, 여주와의 마음과는 다르게 지옥견 덕분에 벽에 금이 가버렸다. 옆에 있는 1학년들은 입술을 꽉 깨물고 여주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안타까웠고, 화가 났다.
"이제 그만하지?"
어디선가 순영의 목소리가 들림에 동시에 여주의 방어벽이 붕괴되면서 여러 갈래의 불꽃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필, 지옥견이 달려들 때, 깨지는 바람에 여주의 얼굴로 달려들었다.
"날 조롱하는 건가"
"...."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 하는군"
지옥견이 달려드는 것과 순영이 여주 앞으로 날아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순영은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한 손으로만 지옥견의 가운데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지옥견은 괴로운지 이빨을 감추고선 정말 강아지 마냥 낑낑거리며 울고 있었다. 어느새, 불길도 서서히 사라져 갔고, 소환이 해제되었던 신수들도 다시 소환됐다. -주인이 자발적으로 소환 해제를 한 것이 아니라 타의로 해제된 것이기 때문에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여주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순영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것인지 심통도 낫지만 순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여주였다. 천사의 집 내부는 이제야 환한 형광등이 켜졌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일신님. 저는 일신님의 주인이 얼마나 강한지 보고 싶어서 그랬을 뿐. 별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일신의 주인이 골탕 먹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오해를 사게 해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장난은 그만 둘 테니 그만 저의 귀여운 아이를 놓아주시는 게 어떠실런지요?"
순영은 손에 쥐었던 지옥견을 그녀 앞으로 던졌다. 십 년 만에 본 그녀는 여전했다. 정말 지독히도 나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애들을 보면 골려주고 싶어서 안달이라니. 나이도 썩 먹었으면서 이제 그 버릇은 고칠 때도 되지 않았나. 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던져진 지옥견은 낑낑거리며 자신의 녹이 슨 철창으로 된 케이지로 들어갔다.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길래 지옥견이 있는 케이지 속, 벽과 바닥은 피로 보이는 자국들이 그렇게 많이 묻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분이 주인이시군요. 이름이 여주님... 맞으시죠?"
"...."
"엄마의 얼굴에 아빠의 눈이라...., 굉장히 매력적인 얼굴이네요"
"손 치워요"
여자는 여주에게 바짝 다가와 무릎을 굽혀 여주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여주의 얼굴에 얹어진 와인색 매니큐어가 칠 해진 긴 손톱은 꼭 여주의 얼굴에 상처를 입힐 것처럼 날카로웠다. 민규는 그게 거슬렸는지 여자의 손을 쳐냈다. 땀에 푹 젖은 앞머리가 민규의 눈을 가렸지만 제법 사나워 보였다.
아까까지 자신들에게 벌어졌던 일의 원흉이 눈앞에 있는 여자라서 그런 것인지 경계심도 깊어 보였고 여주를 만지는 것조차 싫어 보였다. 여자는 흥미로운 눈빛을 하며 민규를 쳐다보았고 여주를 둘러싼 주위도 쓱 둘러보았다. 다들 민규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 아니. 지금 이 늑대의 눈빛은 좀 다른가? 여자는 빨갛게 칠해져 있는 입꼬리를 올렸다.
여주가 순영 뒤를 따라오기 바로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자면, 순영이 가게에 들어갔을 때는 아이들과 다르게 바로 환한 불빛이 순영을 반겼다. 그리고 한 쪽에서 요새는 잘 볼 수 없는 상당히 예스러워 보이는 방직기를 만지며 옷감을 짜고 있는 여자도 순영을 보더니 환한 웃음으로 순영을 반겼다. 실로, 서로가 오랜만에 보는 서로의 얼굴이었다. 근 이십 년 만인가 순영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순영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혀 예의를 표했다.
"오랜만입니다, 일신님"
"그래, 요새도 좋은 옷을 만들고 있는 것 같구나"
"십구 년 전, 일신님이 지켜주신 세상 덕분에 다행히도 지금까지 평화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순영은 여자가 만들던 옷감을 손으로 훑었다. 튼튼할 것 같은 촘촘히 짜여 있는 실과 손끝을 사로잡는 부드러운 질감이 그녀의 실력은 여전하다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순영의 칭찬에 여자는 낮은 목소리로 순영의 공으로 돌렸다. 하지만 순영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일신님이 지켜주신 세상' 이 말이 순영의 귀에 거슬렸다. 순영은 옷감을 훑던 손길을 멈추어 뒷짐을 지며 여자를 등진 채 말했다.
"내가 지킨 세상이 아니다"
"...."
"재이가 지켜낸 세상이다"
".... 그렇군요"
순영의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무덤덤하게 묻어 나왔다. 둘 사이가 고요해졌다. 순영은 십구 년전과 변함없는 가게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고, 여자는 그 자리, 그곳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러다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어떤 기운에 숙였던 머리를 들어 날이 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쥐가 들어온 모양이네요"
여자는 올라간 눈매를 하고선 벽난로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 모습에 순영은 '설마'하며 자신도 여자 뒤를 쫓아 벽난로 쪽을 다가갔다. 가게에 있는 벽난로는 팔십 인치 티비 크기만 했다. 여자는 벽난로 위에 있던 성냥을 집어 들어 불을 켠 후, 벽난로 안으로 던졌다. 성냥에는 알 수 없는 검은 글씨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던져진 성냥에 의해 땔감은 빠르게 불타올랐고 희한하게 연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연기를 배출할 굴뚝도 없었다.
즉, 벽난로는 벽난로의 기능이 본 기능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초도 지나지 않아서 정말 티비처럼 무언가가 비쳤다. 그건 여주와 아이들의 얼굴이었다. 순영은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안 따라올 것처럼 굴더니 왜 따라온 거야. 여자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여자의 눈은 반짝 빛났다.
"어린아이들이네. 어떤 걸로 놀려줘야 하나"
"...."
"아, 일단 문부터 잠가야지! 봉쇄(封鎖)"
여자는 한 쪽 손을 문고리로 뻗어 주술을 걸었다. 문을 잠그는 주술이었다. 그 모습에 순영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 안 한 내 잘못이지. 여자의 얼굴은 자신의 눈에 비친 아이들보다 더더욱 아이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자의 눈이 저렇게 빛난다는 것은 얼마나 지독히 괴롭힐지 아는 순영은 말릴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장난을 좋아했다. 장난을 빙자한 괴롭힘이지만. 그런데 이 장난이 애정에서 나오는 장난이 아니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여자였다. 음,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더 맞는 설명일지도 모르겠다. 여자에게 사람이란 단지, 장난을 칠 유흥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생계유지를 위한 가게에서도 몇 없는 손님들한테 꼭 장난을 치는 여자였다.
여자의 장난은 이렇게 시작된다. 들어올 때, 무조건 여자가 만들어놓은 가상공간으로 들어가게 되고-인간, 요괴에게만 해당- 알아차린 여자는 바로 문을 잠근다. 그리고 그 가상공간에서 여자는 자신의 손맛대로 쥐락펴락한다. 주로, 공포심을 이용한 장난을 한다. 그럼 사람들은 겁을 먹는다. 여자는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즐거워한다.
이것이 여자의 장난 루트였다. 벽에 빈틈없이 빼곡히 이상한 주술이 쓰여있는 이유이다. 지금은 구석진 곳에 처박혀 옷만 만들고 있는 옷쟁이었지만 학창시절 때, 그러니까 음양학당을 다닐 때는 영력도 영력이지만 주술을 다루는 능력으로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정부에서 러브콜을 보내올 정도이니.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은 손도 못 쓰고 당할 수밖에.
"저기, 미안하지만 그 아이들, 내 일행이거든"
"...."
"빨리 내보낼 테니 좀 봐주는 건 어때"
".... 일신님의 일행이라고요?"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며 즐거워하던 여자가 순영의 말에 급격하게 굳었다. 그러더니 벽난로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던 여자는 접었던 무릎을 펴고 얼굴이 세 개가 달린 지옥견이 잠자고 있는 케이지로 다가갔다. 여자는 이런 무서워 보이는 가게에 담력 시험이라도 하려고 들어온 줄 알았던 학생들이 일신의 일행이라고 하니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지금 일신은 내가 장난을 칠 줄 아니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면 거기에 응할지 안 할지는 내 마음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일신이라고 해서 그만두게 할 자격은 없다. 그리고 전 주인이 아끼던 '나'니까 해코지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일신님과 제가 알게 된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어가는데 제가 사람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
"일신님께 실망했어요. 저는 나름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일신님께는 그저 전 주인이 아껴주던 이상한 애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나 보군요"
"그건 너무 비약...."
"그런 게 아니라면 제 장난을 막지 마세요. 일신님께서 먼저 실수하신 거니까 용서를 받고 싶으시다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세요"
그렇다면 일신을 놀릴 수 있다. 더 신나는데? 여자의 혀는 일신을 감싸고 자기 입에 담고 마음대로 놀렸다. 참, 무서운 여자였다. 일신을 쥐락펴락하다니. 여자는 말을 잇지 못하는 순영을 뒤로하고 철창 케이지의 문을 열어 지옥 견을 깨웠다. 순영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헤집었다. 아, 따라오지 말라고 말했었어야 했는데. 지금 후회를 해봤자 늦었고 이미 지옥 견은 여자의 손을 떠나 가상공간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엉켜있던 사슬로 된 목줄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풀어지고 있었다.
결국, 둘이서 벽난로를 쳐다보며 아이들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아이들의 표정을 보더니 소리를 내며 웃는 여자였다. 순영의 시선은 오직 여주를 향해 가있었다. 안 그래도 치켜 올라간 눈초리가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건 걱정스러운 시선이었다. 여자의 장난이 얼마나 질이 나쁜지 아는 순영이었다. 여자는 슬쩍 순영을 보더니 순영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일행이라니. 일신은 이런 귀여운 풋내기들과 어울려 놀지 않아. 어울리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을 테지.
"저 아이가 새 주인인가요?"
"...."
"닮았네요. 전 주인이랑. 그리고 그의 남편이랑"
"...."
"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여자의 눈썰미는 예리했고 예리함을 갖춘 눈빛은 더더욱 빛났다.
-
여자의 장난이 누구 하나 지옥 견에게 물어 뜯겨야 끝날 것처럼 보이자 순영은 가상공간 형성 주술을 강제로 풀어버리고 차원을 가로질러 여주한테 달려드는 지옥 견 앞에 섰다. 그리고 잽싸게 지옥견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여자는 순영의 행동에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마치 순영이 이럴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자의 성격은 여전히 지독했다. 나의 주인을 노리다니. 내가 마음 졸이며 다급한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내 주인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건가. 어찌 됐든 무엇이 목적이든 간에 날 농락하고 있는 사실은 변함이 없군. 순영은 이빨을 까득 갈았다. 순영의 개입으로 상황이 대충 정리가 되었다. 여자는 여주에게 다가가 여주의 얼굴을 검지로 쓸었다.
손 치워요. 민규에 의해 제지를 당했지만. 다소 세게 치워진 손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기분 나쁠 만도 하지만 여자는 피식하며 웃어넘겼다. 여자의 눈에선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의 위협은 귀여운 애교로 보였다. 여자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 계산대로 향했다. 아이들의 눈은 여자를 향해 쫓았다. 눈에 경계심을 가득 품은 채로.
여자는 그 시선을 즐겼다. 나도 너희를 경계해서 그랬던 것이니, 너희도 마음껏 나를 경계하도록. 가게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천장에 달린 가게와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어울리는 샹들리에가 좌우로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근데, 일신님.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인가요"
"뭐가"
"전 주인의 딸을 주인으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 해서요"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계산대로 들어가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그리고 순영에게 질문하였다. 그리고 그 질문에 모두가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했다. '전 주인의 딸' 이게 무슨 키워드이지. 여주는 바닥에서 일어서는 것도 까먹은 채, 멍해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당황하며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여주가 일신의 전 주인의 딸. 딸이라는 단어 앞에 붙여진 수식어의 영향력은 강했다.
여주는 대충 눈치로 자신의 엄마와 일신이 큰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 주인'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잠시 생각해보면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왜, 엄마가 순영을 '지켜주려' 봉인을 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신수와 주인의 관계였구나. 유대감이 깊을 수밖에 없었던 관계. 그게 그 둘의 사이였다.
여주는 대충 수긍했지만 주위 아이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일신의 주인이었던 것으로도 모자라 군인으로서 엄청난 유명세를 떨치던 그 '윤재이'의 딸이 '김여주'라니.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부모님까지 대단한 사람이라니. '윤재이'가 엄마라면 무기 제작에 천재라고 불리는 그 '김 형안'이 아빠라는 말인데.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왠지 여주가 더 커 보이는 듯했다.
"뭘 봐"
갑자기 집중된 시선에 여주는 인상을 찌푸린 채,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여주 다운 차가운 말 한마디도 날려주고. 다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너무나도 지극히 여주 다운 모습에 다들 웃음이 나왔다. 김여주는 그냥 김여주였다. 그 대단한 '윤재이'의 딸이 아니라 그냥 김여주. 커 보이던 여주의 모습이 다시 자신들과 비슷한 친구로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요. 저희는 그냥 권순영 따라왔던 거라서 여기에 볼 일이 없었어요. 권순영이 볼 일을 끝냈다면 저희, 나가봐도 될까요"
".... 다음에 올 때는 좋은 실을 가지고 돌아오마"
여자는 무언가를 찾은 듯 환하게 웃음 지었고, 여주의 말에 여주를 쳐다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 여자의 대답에 다들 하나둘씩 문밖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여주가 마지막으로 가게 문을 나설 때, 여자는 여주의 어깨를 잡았다. 여주가 깜짝 놀라 뒤를 홱 돌아보자, 여자는 여주에게 입고 가라며 한복을 건넸다. 여주는 받지 않고 멀뚱히 한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께름칙한 여자라 생각한 여주는 건네주는 한복도 께름칙해 보였다. 아, 그래도 한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건네주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 안 좋다 보니 여주는 자연스레 거부하는 표정을 지었다.
"거부할 필요 없어요"
"...."
"생전에 재이가 입던 축제 한복이에요"
"..... 엄마 거예요?"
"예전 기사들을 찾아보면 찍힌 사진들이 꽤 있을 거예요. 중요한 행사나 축제가 있을 때는 꼭 이 옷을 입었죠"
여주는 '엄마'라는 말과 덧붙여지는 거짓인 것 같지는 않은 설명에 긴장을 풀고 조심스레 한복을 받아들였다. 저고리는 흰 바탕에 빨간 매화꽃이 수두룩하였고 치마는 풍성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색은 매화꽃만큼이나 빨갰고 반짝이는 가루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치마의 끝자락에는 사람이 수를 놓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갈하게 학들이 짜 넣어져 있었다. 오늘은 즐거운 흐들꽃 축제날이니 입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여주는 여자의 재촉에 못 이겨 저고리에 팔을 넣었다.
"김여주, 왜 안 나와. 일신님, 기숙사로 돌아갔...."
".... 우와, 갑자기 웬 한복이에요?"
"혹시 그 이상한 주인 여자가 줬어? 뭔 이상한 주술이라도 걸려 있는 거 아니야?"
여주가 하도 안 나와서 기다리다 지친 아이들이었다. 석민은 다시 문을 열어 일신이 기숙사로 돌아갔다는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여주가 가게 밖으로 나오자 다들 입이 벌어졌다. 승관은 갑작스러운 여주의 한복 차림에 눈이 땡그래진 채로 물었고, 민규는 의심하기 바빴다. 한솔도 그에 동의하듯 여주의 한복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성연과 은우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여주의 모습을 입이 닳을 정도로 칭찬했다.
"의심 안 해도 되는 한복이니까 계속 그렇게 훑지 마. 기분 나빠"
"아, 죄송해요, 누나. 근데 그래도...."
"나 배고파. 군것질밖에 안 해서"
"배고파? 아, 또 근처에 내가 잘 아는 기가 막힌 맛집을 하나 알아요. 나만 믿고 따라와!"
여주는 이 눈빛들이 귀찮아 화제를 돌렸다. 진짜 배가 고프기도 했고. 천사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줄곧 까였던 민규는 그게 생각보다 꽁했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둬들이고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데리고 가서 만족한 얼굴을 보고 말겠어'라는 눈빛이 아주 강렬했다. 태클 거는 것도 귀찮고, 이때까지 먹었던 군것질거리들이 다 없어진 것처럼 배가 고파왔기 때문에 민규가 잘 안다는 가게로 향했다.
-
오우 쒯. 천사의 집 골목을 나오자마자 얼마 안 가 보이는 민규가 잘 안 다는 가게로 들어갔고, 여주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짜고 친 게 아닌가 할 정도로 가게에 테이블에는 모르는 얼굴들이 없었다. 해태들과 방송부의 콜라보레이션, 무영세계에서 고깃집 알바하다 본 아저씨들의 회식 분위기를 내고 있는 '더 에잇'의 남자 부원들의 모습-술도 안 들어간 주제에, 대단하다.-, 여주가 아닌 승관이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나가려고 한 원인, 일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온 학생회-원우는 없다.-도 있는 데다가, 신수 대결 상대였던 여학생의 무리까지.
이 정도면 민규가 잘 알고 있는 맛집이 아니라 음양학당 학생이 잘 알고 있는 맛집이라고 정정해야 하지 않을까. 여주가 들어서자마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들도 놀랬고, 그중에 해태들과 동시에 여주 앞에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와, 김여주! 너, 대박이다. 진짜. 나 있는 데는 어떻게 알고 따라온 거야?"
"얼굴만 개를 닮았는 줄 알았는데 개소리도 잘하네요, 부장"
"너, 속으로는 나를 이렇게나 좋아하고 있었구나? 말을 하지 그랬어어어"
"말꼬리 길게 늘이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부장. 어디서 애교 질이야"
"음? 현우는 원래 애교가 워낙 많은 타입이라...."
여주가 멱살 잡으려던 걸 승관과 성연이 양쪽에서 붙들고 말렸다. 여주님, 참아요! 무술부 부장이잖아요! 저번에 엎어치기 당했던 거 기억 안 나세요?! 무술 젬병인 주제에! 절대 못 이겨! 뭔가 기분 나빠지는 말에 여주는 둘의 팔을 뿌리쳤고 쒸익쒸익 거리며 가게를 나가려고 했다. 딴 거 먹어. 굳이 사람도 많은 가게에서 먹어야 할 필요 없잖아.
여주가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이번엔 해태들이 말렸다, '여주야! 저 새끼 신경 쓰지 말고 밥 먹어! 여기에 고기 다 먹고 해주는 볶음밥이 진짜 최고야! 그리고...' 중얼중얼 거리는 말에 뒤도 안 돌아보던 여주는 '으악'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승철이 현우에게 암바(...)를 걸고 있었다.
"아악, 항복! 악! 최승철!"
"백현우, 너 때문에 여주 나가게 생겼잖아! 안 그래도 사람 많아서 자리 없는 가게 많은데 여주 힘들게 돌아다니게 하지 마!"
".... 저기, 오빠. 여기서 밥 먹을 테니까 그만하셔도 될 것 같지 않으니까 더 하세요"
"아, 여주 네가 너무 착하게 대.... 어? 뭐라고?"
"더 하시라고요"
"아..., 아, 아 응...!"
"김여주, 이 악마야!"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무술부 부장 체면이 말이 아닌 것 같아 승철을 어르고 달래는 여주는 개뿔이. 아예 더 부추기는 여주였다. 혹시, 부원들의 반발을 살까 싶어 무술부 테이블을 슬쩍 쳐다보니 이미 부장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네들끼리 맛있게 고기를 구워 먹고 노래 부르고 할 거 다 하고 있었다. 부장이 정상이 아닌데 부원이 정상일 리가. 쯧. 여주는 계속 암바를 시전하고 있는 승철을 격려해주고 들려오는 현우의 외침을 무시한 채, 아이들이 자리 잡은 테이블로 가서 자신도 앉았다.
음양학당 학생들끼리 모이니 가게 안은 '소란' 그 자체였다. 이미, 너나 구분할 것 없이 가게를 하나 통째로 빌린 것 마냥 다 같이 이야기하고 먹고 놀았다. 학생회 사람들과 어느새 친분을 가지게 된 은우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밝게 웃으면서 대화하고 있었고, 방송부에 잡혀서 다음 달, '훈남과 나'의 코너 주인공이 되어달라고 부탁을 받고 있는 민규와 한솔도 보였다.
언제부터인지, 레슬링 대결이 되어버린 승철과 현우의 모습과 아예 심판을 맡은 민경, 그리고 경원에 붙잡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승관과 무술부에 끼여서 같이 노래 부르고 춤추고 난리란 석민과 성연....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참고로, 신수 대결 상대였던 여학생 무리는 여주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빨리 나갔다. 그럼 여주는 뭐하고 있냐. 승철을 제외한 해태들의 삼엄한 경호 아래 맛있게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여주야, 콜라 더 줄까?"
"아닝"
"오물거리고 있는 모습 너무 귀여워.... 사진 찍어도 돼?"
"아니용"
"알겠어! 발음 너무 귀여워...."
"이거 익었나?"
결경은 여주가 뭐가 부족할까 싶어서 이것저것 갖다 주고, 심지어 쌈도 싸주었고 나영은 마치 여주의 팬이 된 것 마냥 여주의 모든 모습들을 귀여워하고 있었다. 종현은 고기 굽는 담당을 자진해서 맡고 예쁘게 잘라 여주의 앞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처음엔 부담스러워 거부한 여주였지만 아까 주술사용으로 많이 배가 고팠던 여주는 말리는 것도 귀찮아 편하게 호의를 받아들였다. 뭐, 내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네들이 하고 싶다는데 그냥 놔둬야지, 어쩌겠어. 여주는 그런 생각으로 맛있게 냠냠 쩝쩝거렸다.
"오빠, 민현오빠는 언제 온대요?"
"모르겠어. 못 오면 연락 줄 텐데 아직 연락이 없네"
결경의 물음에 종현은 고기를 뒤집던 손을 멈추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민현에게 온 연락은 한 통도 없었다. 고기를 먹던 여주도 귀에 '민현'이라는 말이 들려오자 솔깃해졌다. 그렇지만 민현이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물어본다거나 그런 건 하지 않았다. 워낙 배가 고파서 젓가락질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에. 만약, 천사의 집에서 자신이 방어 주술이 아니라 공격 주술을 썼더라면 체력을 탕진해 젓가락도 들지 못할 정도였을 텐데 방어 주술을 써서 배만 미친 듯이 허기진 것 같았다. 방어 주술을 쓴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은 여주였다. .... 그렇게 혼자 사인 분을 해치우고 있는 여주였다....
".... 배불러, 여주야?"
"응, 이제야 살 것 같아"
결경이 여주가 헤집어 놓은 접시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고 여주는 만족한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허리를 뒤로 젖혀 의자 등받이에 기댄 후, 부른 배를 통통거렸다. 옆에선 나영이 귀엽다고 또 난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여주였다. 나보고 귀엽다는 사람, 우리 할머니 빼고 처음 봤어. 할머니도 10살 이후로는 귀엽다고 안 하던데. 여주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부른 배를 쥐고 천장을 보며 멍을 때리고 있었... 아니, 있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주위 풍경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지 뭐람. .... 아수라장이네. 저가 여기서 어떻게 밥을 먹었었는지 모를 정도로 시끄러웠다. 여주는 한 번 의식하니 귀에 때려박는 소음에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어 자리에 일어서 가게 밖을 나섰다. 문을 열고 밖에 나와보니 길거리의 소음보다 가게 안이 더 시끄러울 수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수천 명이 지나가는 길거리는 가게 안에 비하면 완전 도서관 수준이었다.
"아, 고기 냄새 배겠다"
여주는 코로 들어오는 시원한 공기에 숨을 흡 들이켰다. 그리고 가게에서 나오는 고기 냄새가 코에 들어가자 자신의 옷차림을 자각한 여주다. 여주는 빠르게 코를 한복에 파묻어 냄새를 맡았다. 음, 아무 냄새 안 나는 것 같은데. 코가 고기 냄새에 적응돼서 그런가. 여주가 계속 냄새를 맡아봤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사실, 여자가 한복에 걸어놓은 결계 주술 때문에 냄새는 전혀 베이지 않았다. 그걸 모르는 여주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여주야"
한복에 한참 코를 박고 냄새를 맡고 있을 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주는 옆을 보니 정말 오랜만인 민현이 보였다. 무술부를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봤는데 무술부를 들어가니 민현도 시간이 없고, 여주도 시간이 없는 바람에 일주일이나 보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얼굴이 당황스러웠지만 오랜만에는 보는 얼굴이라서 뚫어지게 보는 여주였다. 일주일 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은 살이 좀 빠진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오래 아이컨택을 하는 것에 당황한 건 민현이었고, 민현은 잠시 눈을 도르르 굴리더니 여주 눈높이 맞추었던 허리를 폈다. 여주의 시선은 자연스레 따라 올라갔다.
"한복 예쁘네"
"..... 예쁜데 내 거 아니야"
"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한복도 예쁜데 한복을 입은 네가 예쁘다는 의미였는데"
"미안한데, 진짜 오글거려"
그럼 왜 그렇게 말한 거야. 여주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이미 웃음이 나온 후였다. 그렇게 서로 웃으며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고 일주일간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길거리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왜 난데없냐하면 바람이야 불 수 있지만 봄바람은 잔잔하지 않은가. 봄바람보다 훨씬 거셌다.
아니, 봄바람보다 거센 게 아니라 그냥 엄청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남자 중에서 덩치가 큰 민현이 바람에 의해 몸이 밀려 나가버릴 정도였다. 그러면 여주는 어쩌고 있냐. 아예 날아갈 뻔했다. 다행히 민현 쪽으로 바람이 덕분에 민현의 품속으로 들어가 날아가는 일은 없었지만.
"뭐야, 음양 세계는 이런 바람도 불어?"
"음, 보통 이런 바람이면...."
".... 와. 이건 너무 한거 아니야?"
바람에 눈을 질끈 감고 정신을 못 차리다가 바람이 그치자 둘은 조심스레 눈을 떠서 서로를 살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할 말을 잃을 뻔한 둘이었다. 주위의 흐들꽃 나무에 있던 꽃들이 아까의 바람 탓에 꽃이 다 떨어져 버렸다. 흐들 꽃 나무는 겨울이 도래한 것 마냥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었다. 공중에는 분홍 꽃잎들과 함께 아직 피지 못한 초록색 봉우리들도 휘날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축제 1일 차인데, 이렇게 꽃이 다 떨어져 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여주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였다.
'꺄아아악-'
갑자기 어디선가 들리는 여자의 비명소리. 그리고 그게 신호탄인 듯, 여러 명의 비명소리가 겹쳐졌다. 그리고 길거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소리 지르며 어디론가 뛰어가며 방황하였다. 방황하는 거리, 사람들의 겁에 질린 목소리. 민현과 여주는 이 상황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여주는 당황스러움이 얼굴에 물들었고, 민현은 정신 차리고 주위 사람들의 소리에 집중했다.
'하늘에 저거 뭐야...!'
'저거 요괴지? 빨리 경찰... 아니 퇴마사 불러!'
축제날 요괴의 등장. 그것도 사람들을 한순간 공포로 몰아넣게 한 요괴. 민현과 여주는 바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3학년인 민현은 요기를 느낄 수 있는 수준이 되었기 때문에 바로 찾았고, 민현은 여주에게 친절히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민현의 손끝을 따라가서 보이는 것은 여주의 18년 인생에 있어서 처음 보는 형체였다.
분명 사람의 형체인데 등에 달린 엄청 큰 날개로 날고 있었다. 키는 족히 이 미터는 넘어 보였으며 살가죽에는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은 전혀 섹슈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징그러움에 인상만 찌푸리게 될 뿐이었다. 또한, 얼굴은 요괴를 처음 본 여주가 보기엔 토가 나올 정도로 징그러웠다. 이마로 보이는 곳부터 턱까지 오직 입으로 다 덮었다. 영화의 씨지로도 이렇게 징그럽게 만들지 못할 것임을 장담하는 여주였다. 입을 열 때마다 보이는 공룡의 이빨처럼 보이는 날카롭고 많은 개수의 누런 이빨들이 위아래로 부딪히며 딱딱거리고 있었다.
여주는 너무 놀라 말을 잃었다. 어느새 요괴는 낮게 날기 시작했고 사람들을 향해 그 큰 입을 딱딱거렸다. 약 두 시간 전에 본 지옥견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여보세요, 여기 양지의 거리 13 - 17번 길인데요. 크기가 큰 요괴가 거리를 헤집고 있어요. 빠른 출동 부탁드립니다"
"...."
"그리고 지금 당장, 30분 퇴마 허가증을 작성해주세요. 음양학당, 3학년 황민현입니다"
"....."
민현은 빠르게 휴대폰으로 경찰에게 전화를 걸어 신고했고, 아직까지 민간인인 학생이었기 때문에 퇴마 주술은 사용할 수 없는 걸아는 민현은 잊지 않고 퇴마 허가증까지 부탁했다.
퇴마 허가증은 퇴마 전문의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는 음양인들이 긴급 상황 시, 법적으로 퇴마 주술사용의 허락이 일시적으로 떨어지고 그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는 증서이다. 종류는 5분 허가증, 15분 허가증, 30분 허가증. 총 세 개가 있다. 만약 민현처럼 30분 허가증을 골랐다면 30분만 퇴마 주술을 사용할 수 있다. 이 허가증의 시간이 끝나면 최소 20분 후에 재발급을 받을 수 있으며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제한된다. 허가증의 시간이 끝났을 때 주술을 사용하면 바로 범법이 된다.
이 제도 도입 후, 초반에는 신청을 하는 누구에게나 증서를 써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증서를 써준 후, 좋지 않은 사건들이 연일 발생해 여론이 좋지 않아져서 요새는 경찰들이 거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민현의 경우는 달랐다. 어떻게 된 건지 '황민현'이라는 이름 하나로 자세한 상황도 묻지 않고 바로 발급을 받은 민현이었다.
민현의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종이 한 장이 민현에게 날아왔고, 민현은 주술로 바늘을 꺼내 자신의 왼손, 검지를 찔러 피가 나게 했다. 많이 해본 듯, 능숙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종이에 찍었고 종이는 빛을 내며 파란색 끈으로 변하여 민현의 손목에 묶여졌다. 허락이 떨어졌다는 증거였다. 민현은 여주의 어깨에 두 손을 얹어 여주와 눈을 마주했다. 다정하고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그의 눈은 진지해져 있었다.
"가게 안에 친구들 데리고 학교로 대피해. 제일 안전한 곳은 학교니까. 주술은 절대 금지야. 알겠지?"
".... 너는?"
"나는 수습하러 가야 돼. 나름 유서 깊은 음양학당의 신뢰받고 있는 전교회장인데, 저런 요괴를 놔두고 도망가면 수치스러운 일이지"
여주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민현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음양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른다지만 저런 크기에 흉측한 비주얼의 괴물은 누가 봐도 강해 보였다. 여주는 민현의 뒤를 흘끔 살폈다. 요괴는 어느새 땅에 착지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요괴의 날갯짓 한 번에 가게의 노점들은 엉망이 되었다. 여주는 다급하게 민현에게 물었다.
"저 요괴, 네가 해칠 수 있어?"
"오빠는 얼어죽을. .... 알겠어. 빨리 가"
더 붙들고 싶지만 뒤에 보이는 요괴가 결국 땅에 착지했고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요괴는 눈과 코가 없는 덕분에 그냥 아무렇게나 입을 들이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휘청거리며 넘어져 버려 가게들이 하나둘씩 부서지고 있었다. 위태로워 보이는 상황에 여주는 민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빨리 퇴마를 할 수 있는 누군가가 퇴마를 하는 게 피해를 더욱 줄일 수 있으니까. 민현은 여주의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요괴가 있는 방향으로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여주는 친구들이 있는 가게의 문을 열기 위해 몸을 틀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여주를 와락 하고 안았다. 놀란 여주는 손잡이로 향하던 손을 멈추었다.
"가만히 있어. 얼굴 뒤로 돌리지 마. 목 날아가"
여주의 귀에 바로 대고 들려오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는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웠고 끔찍한 느낌마저도 들었다.
민현은 여주를 뒤로하고 요괴가 난동을 부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모두가 한 방향을 향해 도망칠 때, 민현, 혼자 역방향으로 달렸다. 민현의 입안에서는 '제발, 아무도 다치지 마라.'라는 말이 맴돌았다. 그 사이에 요괴는 거리를 난폭하게 부수고 있었다. 이따금씩 쇳소리 섞인 비명을 지르기도 했고, 정말 사람이 물릴 뻔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날개가 한 번 날갯짓을 할 때마다, 바람이 워낙 거세 어린아이나 연약한 사람들은 쉽게 날아가기도 했다. 다행히 민현이 방어 주술을 사람들마다 씌워주는 덕에 다치지 않고 안전히 도망가는 사람들이었다.
"아, 저놈의 날개"
결계로 자신의 몸을 감싼다고 해도, 요기가 섞인 바람과 결계가 부딪히면서 큰 저항이 생기기 때문에 거센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앞으로 잘 나아가지지 않았다. 그에 민현은 평소에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짜증 난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 교장 선생님이었으면 고공간(刳空間) 주술을 사용했을 텐데. 민현은 당연한 것이지만 규원처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낙담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달려 나갔다.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고공간(刳空間) 주술 : 원하는 공간만큼 자른 후, 빠르게 원하는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주술. 자른 공간은 10초 이내에 닫힌다. 고급 주술 중 어려운 주술.
달리고 달려, 드디어 요괴 앞으로 도착하였다. 멀리서 봤을 때보다 훨씬 큰 크기의 요괴에 약간 움찔할 만도 한데, 민현은 어떤 흔들림도 없이 싸늘한 시선으로 요괴를 바라보았다. 세상 다정해 보이고 따뜻한 눈을 가진 민현이 이렇게나 매서울 수가 없었다. 다른 학생들이 이 얼굴을 알면 다들 까무러치게 놀랄 것이 분명했다. 민현은 퇴마를 시작하기 위해 자신을 감싸던 결계를 풀고 땅바닥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순간의 울렁거림과 함께 요괴와 민현을 둘러싼 반경 오십 미터 정도의 결계가 만들어 졌다. 퇴마를 치르다가 이곳을 지나는 다른 엉뚱한 요괴라던가, 사람이 다치면 안 되기에 하는 절차였다. 결계 속은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고, 오직 민현과 요괴만이 있었다.
요괴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쇳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다. 민현의 귀가 따끔할 정도였다. 아마, 자신이 세상에서 없어짐을 직감적으로 안 것이 이유겠지. 나름 불쌍해 보였지만 이미 인간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고, 위협을 가했으니 퇴마를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민현은 퇴마를 치르기 위해 교복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붉은 부적 종이를 꺼내 '주화'라는 언급 없이 검지 손에 불을 켜 부적을 태웠다.
그 사이에 요괴는 민현에게 점점 다가왔다.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달려드는 덕에 이리저리 넘어져 치였고, 결계에 몸이 닿은 덕분에 군데군데 탄 자국이 생겨났다. 민현이 들고 있던 부적이 다 태워지자 검 모양의 투명한 물이 생겼다. 민현은 물 형체를 한 손으로 잡았고, 곧, 물은 흩어지더니 검은색 검집이 민현의 손이 들려 있었다. 어느새, 민현의 코앞까지 다가와 위협을 가하는 요괴였다. 민현은 손에 검집을 들고 요괴를 빠르게 피했다. 요괴는 민현을 자신의 입안으로 넣고 싶은지 손을 휘적대며 이빨을 맞부딪히며 딱딱거렸다.
민현은 요괴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가면서 검집에서 검을 빼냈다. 검집에서 빼낸 검의 날에는 손잡이 부근부터 검의 끝까지 흰색 부적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져 있었다. 민현이 손에 쥐고 있는 검은 '퇴마검'이었고, 흰 부적 종이는 퇴마하는 데 쓰이는 부적이었다.
퇴마를 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의 방법은 입으로 주술을 외워 퇴마를 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의 방법은 자신의 무기를 만들어 퇴마 주술이 적혀 있는 부적을 붙여 요괴에게 공격하여 퇴마를 하는 것이다. 전자의 방법은 주술이 워낙 길고 복잡해서 전자보다 후자의 방법이 대부분의 퇴마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민현은 검을 세게 그러쥐어 피하는 것을 그만두고 요괴를 검으로 찌르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민현은 무언가가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원래, 퇴마를 하려면 그냥 무작정 검으로 요괴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요기를 읽고 요기가 나오는 심장을 잘라야 한다. 그래서 퇴마를 하기 위해 요기를 다시 읽는 민현이었고, 민현은 이상한 느낌에 뛰어가던 발을 멈추었다.
분명, 여주를 뒤로하고 달려들 때만 해도 강한 요기가 느껴졌는데 지금은 너무 미약한 요기가 느껴졌다.
민현의 눈앞에는 마치 이런 몸을 가진 적이 처음이라는 듯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요괴가 보였다.
한편, 여주는 길거리 속, 정신없이 모두가 동적인 상태일 때, 한 남자에 의해 혼자서만 정적인 상태였다. 모두가 흑백일 때, 여주만 색채가 있었다. 차마, 친구들이 있는 가게 문을 열려던 손도 멈추었다. 슬며시 고개를 내려다보니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는 창백한 사람의 팔이 보였다. 그리고 그 팔에서 느껴지는 한기는 모든 상태를 정지시켰다. 이거, 사람 맞아? 여주는 침을 조심스레 삼켰다.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조금씩 뒤로 돌렸다.
"가만히 있어. 얼굴 뒤로 돌리지 마. 목 날아가"
팔로 여주를 감싸고 있던 남자는 여주의 낌새를 알아채자마자 손으로 여주의 목을 그러쥐었다.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은 손이었지만 여주는 순간 숨통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귀 옆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끔찍했다. 이제껏 들어보지도 못한 저음의 목소리였다. 그냥 저음일 뿐만 아니라 갈라지는 목소리는 칠판에 손톱을 긁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목소리에 담겨 있는 죽은 시체 같은 목소리.
그래, 여주 뒤에 있는 남자는 마치 살아있는 죽은 시체와 같았다. 살아있는 죽은 시체. 눈처럼 새하얗고 사람의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손과 소름 끼치는 목소리. 그와 대비되는 목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남자가 내뿜는 뜨뜻한 숨결. 수식어가 서로 모순되지만 누구라도 그를 마주하게 된다면 납득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여주는 가게 손잡이로 향하던 손을 느리게 내렸다. 아무래도 가게 안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물 건너간 듯했다.
그때,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무영 세계에서도 많이 들어본 소리. 경찰차의 소리였다. 여주는 경찰이 이곳에 한시라도 빨리 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어서, 이 소름 돋는 남자를 잡아가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여주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 버리듯 여주의 뒤쪽으로 경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아무도 내려서 구해주지 않았다. 경찰은 보지 못한 것이었다. 여주와 남자를. 민현 쪽에 있는 큰 요괴를 잡으러 가는 것 같았다. 여주는 절망했다.
여주의 목을 잡은 남자는 얼굴을 절망한 여주의 어깨 위로 파묻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여주의 목을 간지럽혔다. 여주는 남의 행동에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자칫 움직이기라도 하면 제 목에 힘없이 감겨져 있는 이 손이 언제 제 숨통을 끊어놓을지 몰랐다. 여주는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는 여주의 목뒤에서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 코를 박아 계속 숨을 들이셔댔다. 그리고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아,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저 병신 새끼도 다시 다루러 가야 되는데...."
"...."
"아, 이 옷은 언제 봐도 너무 곱다. 그치? 새빨간 붉은빛을 띠고 있는 치마가 너무 매력적이야"
"...."
"그리고 이 좆같은 결계도 여전해. 역시 천사는 달라"
여주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압박에 고개를 내렸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던 건지 여주의 목을 감은 손이 아닌 다른 손은 흰 피부가 터질 듯이 칼을 세게 쥐고 여주의 옆구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쥔 것인지, 한복에 쳐져 있는 결계와 맞닿아져서 칼날이 들어가지 못해 칼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주 뾰족하고 날이 선 칼날이 눈에 들어오자 여주는 숨을 쉬는 것을 멈추었다.
한 번 들이쉰 숨을 뱉지를 못하는 여주였다. 여주의 심장은 마치 북소리처럼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정한 박자로 뛰더니 점점 박자가 빨라져갔다. 나, 결계가 아니었다면 죽을 뻔한 거야? 천사의 집에서 맛본 공포는 공포도 아니었다. 이게 진정한 공포였다. 눈을 제대로 뜨고 있으면서 앞이 캄캄했고, 등골에서는 땀줄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서 있는 두 다리는 곧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머리를 굴려 살 궁리를 찾던 여주는 이곳에 없었다. 모든 사고 회로 가 정지된 듯, 여주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공격 주술을 쓸 생각도, 손을 뿌리칠 생각도,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제대로 느꼈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여주, 자신이 건드릴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아무리 영력이 강하더라도 아직 초짜인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빈틈없이 가깝게 밀착하고 있는 남자의 온몸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면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뒤에서도 느껴지는 이 남자에게 풍겨오는 위험한 분위기가 여주를 감싸 돌았다. 여주는 그 기운에 온몸이 얽매였고,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흘끔, 자신의 옆구리 쪽을 쳐다보니 아까보다 훨씬 더 떨리고 있는 칼을 쥔 남자의 손이었다. 얼마 안 가 결계를 힘으로 부수고 자신을 찌를 것 같았다. 여주가 지금 생각나는 건, 오직 순영이었다. 이 남자를 이길 것 같은 존재는 순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아쉬워"
"...."
"재이는 이 옷을 입었을 때가 가장 아름다워서 내가 꼭 이 옷에 재이의 새빨간 붉은 피로 된 꽃을 그려주고 싶었거든"
"...."
"그런데 그러질 못 해서 너무 아쉬워"
"...."
"아, 그렇다고 그때 그린 꽃이 싫다는 건 아니야. 그냥 정말로 아쉬웠을 뿐이야. 정말...."
남자는 여전히 여주의 어깨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리고 횡설수설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러니까 남자의 말은 자신이 재이를 죽였다는 것이다. 여주는 남자의 말에 혼란스러워졌다. 교장에게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 들었을 때는 분명 임신과 출산의 이유로 많은 영력을 쓴 탓에 너무 무리하여 죽은 것이라고 들었는데. 남자의 말과는 달랐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신뢰는 남자 쪽의 말에 귀가 기울여졌다. 왜인지는 여주 제 자신도 모른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남자의 목소리 때문인 것일까.
엄마를 직접 죽인 장본인이 뻔뻔하게도 그런 말을 해대니 화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뒤에 있는 남자가 굳이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을 죽였어도 이러한 태도는 분노를 일으킬 만했다. 하지만 여주는 자신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엄마를 죽이고선 엄마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나 말하는 이 남자에게 느껴지는 분노보다, 이 남자로부터 느껴지는 공포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엄마를 죽인 놈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보다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여주는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는 약한 자신이 비통했다. 지금 눈에 찬 눈물은 분노인 것인가. 이 남자에게 향한 분노인 것인가, 나에게 향한 분노인 것인가. 아니면 그저 맹수에게 휘감아진 초식동물이 되어 무서워 흘리는 눈물인 것인가. 여주는 어깨를 작게 떨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게 있어...."
"...."
"넌 누구야?"
남자는 여주의 어깨에 박았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아까보다 더 가깝게 귀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니 대답을 해야 하나. 여주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은 서로 맞불려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한 번 더 질문했다.
"누군데 이 옷을 입고 있어?"
"...."
"비슷한 옷은 많지만 이 옷만의 특유의 고혹적인 느낌이 있거든. 그리고 이 결계가 말해주고 있지. 재이의 옷이라고"
"...."
"이 옷 때문에 놀라서 저 병신 새끼 풀어 두고 달려왔잖아"
아까부터 칭하는 '병신 새끼'가 무엇일까. 멈추었던 사고 회로는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순영이 구해주러 오는 것. 하지만 순영은 한참 전에 기숙사로 돌아가 버렸다. 소환 해지를 하지 않은 상태여서 소환 주술로 불러낼 수 없었다. 여주가 알고 있는 지식에 한해서 순영을 불러낼 수 있는 건, 소환 주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 가게의 사람들이 문을 열기를 기다려야 하나. 민현이 빨리 저 큰 요괴를 퇴마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야 하나. 아, 혹시 저 큰 요괴와 이 남자가 같은 편인가. 그 '병신 새끼'가 저 요괴를 칭하는 것인가. 한 번 작동한 사고 회로는 기름을 들이부은 듯이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아, 재이가 죽기 전에 낳은 딸이 있다고 하던데"
"...."
"재이가 죽은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니까 딸도 너만큼 자랐겠구나"
"...."
"그 딸이 혹시 너야?"
여주의 목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작동한 사고 회로가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사고 회로는 남자의 손으로 하나씩, 하나씩 망가트려지고 있었다. 여주는 망가지는 사고 회로를 보고서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두려우니까. 너무 무서우니까. 슬쩍 밑을 내려다보니 아직도 남자는 옆구리에 칼을 꽂아 넣으려고 미친 듯이 힘을 주고 있었다. 한복의 결계가 이 남자에 의해 정말 부서질 것 같았다.
"여주, 내가 찾으러 갔다 올게"
"아, 형! 그건 제가 해야 돼요!"
"민규야, 네가 뭔데?"
"그런 말을 웃으면서.... 부회장 형, 되게 자비 없으시네요. 그럼 저도 이 대결에 끼겠습니다"
"아, 부승... 뭐야, 신청자가 왜 이렇게 많아? 여주는 제가 데려올거라고요!! .... 좋아, 가위바위보로 정합시다!"
가게 문 넘어서 들려오는 대화에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여주가 처음으로 몸을 크게 움직였다. 내가 여기 있다고, 빨리 나와 달라고 소리라도 지르기 위해서. 하지만 바로 남자의 손에 제지되었다. 남자가 거세게 여주의 목을 뒤로 젖혔다. 여주의 몸은 남자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여주에게 물었다.
"혹시 네 이름이 여주야?"
".... 컥!"
남자는 여주의 턱을 잡고 여주의 목을 뒤로 넘겼다. 목이 뒤로 넘겨진 바람에 남자의 얼굴을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남자의 눈과 마주했다. 쌍커풀이 있는 눈, 눈 크기에 비해 작은 동공, 무엇보다 그 눈은 분명하게 여주를 정확히 쳐다보고 있는데, 이유가 궁금할 정도로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공허함. 그래, 이걸로 그 눈을 설명할 수 있었다.
"친구가 데리러 올 거 같으니까, 난 이만 가보도록 할게. 나를 본 건 비밀이야"
"넌, 뭐....!"
"안녕"
".... 밖에 상황이 왜 이래?"
가게의 문이 열리자마자 남자는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져버려 여주의 몸이 뒤뚱거리며 뒤로 넘어갈 뻔한 것을 가게로 나온 종현이 잡아주었다. 민규를 비롯한 승관, 석민, 승철, 나영, 결경과의 가위바위보 승리였다. 여주는 긴장이 풀려 손목만 종현에게 잡힌 채로 바닥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종현도 놀라 여주를 따라 앉았다.
"여주야, 왜 그래. 공격 주술이라도 쓴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 것보다 밖에 상황은 또 왜 이런지 알 수 있을까?"
종현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길거리를 쳐다보았다.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길거리를 내달리는 사람들. 아차 싶은 여주는 상황 설명을 위해 입을 떼었다. 그리고 그때, 요괴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종현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먼 거리였지만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거리에서 거대한 요괴가 쇠사슬에 감겨 괴로워하고 있었다. 퇴마를 하기 위한 과정인 듯 보였다.
"저게, 뭐야"
"지금, 빨리 대피해야 돼요...! 회장이, 회장이 학교로 빨리 대피하래요!"
"회장? 민현이? 민현이는 어디 갔어?"
"지금 저 요괴 퇴마하러....!"
".... 저 요괴를? 굳이, 민현이가? 허가증 발급까지 받으면서? .... 일단, 대피하자"
여주의 말을 듣던 종현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요괴를 쳐다보았다. 일주일에 한 번밖에 발급이 안 되는 중요한 허가증을 고작 저 정도의 요기를 가지고 있는 요괴를 위해 퇴마기 위해 사용한다고? 다른 사람들보다 요기를 읽는데 능통한 먼 거리에 있어도 요괴의 요기가 느껴지는 종현은 민현의 결정에 의아해했다. 민현도 요기를 읽는 건 나쁘지 않았고 요괴의 크기야, 보통 사람들이 겁을 먹을 만하기는 하지만 굳이 민현이 나서서 퇴마할 필요는 없다. 퇴마 주술이 아니라 방어 주술이나 사용해도 법에 걸리지 않는 주술을 써서 행동을 막으면 그만이었다. 도저히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민현이 잘못된 판단을 했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종현은 민현이 시킨 대로 가게로 들어가 아이들을 대피시켰다.
"요괴가 길거리에 난입했어. 경찰이 막고 있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얼른 우리도 대피하자"
종현이 아이들을 대피시키고 있을 때, 다시 민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경찰들이 거대한 요괴를 에워싸고 염력 주술을 사용하여 쇠사슬로 요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속박된 요괴는 괴로워 그 큰 입을 벌려 신음을 이리 대고, 저리 대고 질러대고 있었다. 한 남자 경찰이 민현에게 다가갔다.
"하아, 저 정도 크기인데도 그다지 강한 느낌은 없어. 요기는 얼마 정도 되는 거야, 민현 학생?"
".... 요기도, 크기에 비해 세지 않아요. 다른 요괴에 비해서도 훨씬 약하고요"
"엥. 그런데 허가증까지 발급받으면서 퇴마하려고 하는 거야?"
"그게...."
"아니, 그보다 왜 약한 요괴를 아직까지 퇴마 못한 거야? 민현 학생 정도면 이 정도의 크기라도 오분이면 가능하잖아?"
"....."
민현은 경찰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주와 헤어지기 전까지 요기가 살갗을 파고들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함'을 느꼈는데 정작 와보니 느껴지는 건 '약함' 이었다. 그런데 경찰이 올 때까지 퇴마를 하지 못한 이유는 '심장'이 보이지 않았다. 요괴를 퇴마하려면 요괴의 '심장'을 노려 없애야 한다. 보통, 사람에게는 다 같은 위치에 비슷한 모양의 '심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요괴의 경우는 다르다. 요괴의 심장은 각 요괴마다 제각각이며, 생긴 모양도 다 제멋대로이다. 그리고 퇴마사들의 눈에는 정확히 보인다. 심장의 위치가. 바로, '요기'로 알 수 있다.
요기가 소용돌이처럼 흘러나오는 곳, 소용돌이의 중심. 그곳이 바로 요괴의 '심장'이다. 요기가 강하면 강할수록 요기의 소용돌이 줄기가 굵어 하나의 큰 덩어리처럼 보여 중심이 잘 보이지 않아 퇴치하는 게 힘들지만 약한 요괴라면 소용돌이의 줄기가 얇아 너무나도 눈에 잘 보인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 요괴는 약하고도 약한 요기를 가지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 혹시, 줄기가 너무 얇아서 보이지 않는 건가. 요기가 너무 약해서 소용돌이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던 건가.
".... 그럴 수가 있나"
"응? 무슨 소리야, 민현 학생?"
"요기가 너무 약...."
"응?"
"갑자기 요기가 강해졌어요! .... 아까 느꼈던 요기....!"
민현은 강하게 느껴지는 요기에 들고 있던 퇴마검을 세게 잡았다. 요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강하게 느껴지는 쪽을 따라서 시선을 천천히 돌리니 쇠사슬로 칭칭 묶여있는 요괴에게서 느껴졌다. 갑자기 요기가 생긴다고? 그렇지만 '심장'은 안 보여. 민현은 처음 겪는 상황에 답답하기만 했다. 그리고 민현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거대한 요괴의 머리 꼭대기 위에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쓴, 거기다가 검은색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얼굴을 정확히 가린 남자인지 여자인지, 사람인지 요괴인지 모를 존재가 서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목소리 크기를 확대하는 주술-음성 확대 주술-을 사용한 것인지 쩌렁쩌렁하게 경찰들과 민현의 귓속으로 목소리가 들어왔다. 남성의 목소리였다. 아까, 여주를 위협했던 남자의 목소리.
"미안. 여러분. 이 병신 새끼는 아무래도 실패작인가 봐. 폐 그만 끼치고 돌아가도록 할게"
"너, 넌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 혹시 너네도 병신인 거야? 현장에서 잡힌 범죄자들이 신원을 밝히라고 하면 밝혀줘? "
".... 너, 너는 지금 포위됐다! 얌전히 항복하고 요괴 위에서 내려와라!"
"와아, 정말, 정말 무섭다. 무서워서 지릴 것 같으까 난 이만 화장실로 가보도록 할게. 난 우리 집 화장실 아니면 못 싸거든"
"소용 없...!"
남자의 말투는 꽤나 느긋했으며 경찰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경찰이 경고를 날리기도 전에 남자는 어떻게 한 것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요괴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끊어내버렸다. 당황한 경찰과 민현은 몸을 움직이지 못했고 남자는 노란 부적을 후드티 주머니에서 빠르게 꺼내더니 요괴에게 붙이자마자 '펑'하는 소리와 함게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처럼. 공중에서는 나무에 달려있던 분홍색의 허들 꽃잎이 떨어져내렸다.
여름, 가을, 겨울을 거치고 봄이 되어서야 자태를 뽐내던 허들 꽃들이 개화한지 이틀도 되지 않아 허무하게 비가 되어 내렸다. 그 모습은 장관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
자료들 |
천사의 집 주인 석민의 한복 여주 + 재이의 한복 (치마에 금빛 효과....도 있어야 함) 지옥견 (다시 봐도 웃긴 가습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가습기 집에 있으면 얼마나 무서울까... 도둑이 자주 드는 집에 설치하면 될 듯) 민현이의 퇴마검(고려시대 검이라네요!) |
+ 이미 읽었던 내용에 많은 분량이라서 토하실 것 같죠? 많은 분량에 저도 다시 옮기면서 토할 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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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롕 3536 젠부 딸기빵 0846 마릴린 요플레 서랑감자 딩동 랭 체리콘 뿌랑둥이 리아 밍 도달도달♥
21화부터 암호닉을 신청해주셨던 분들은 다시 신청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ㅠㅠ! (신청하고 찾아오지 않으시면 조금... 슬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