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흘렀다. 호시와 여주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고, 이제서야 둘은 진짜로 연인 사이가 된 거 같았다. 호시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하는 일은 제 옆에서 곤히 잠든 여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기. 그리곤 이불까지 제대로 덮어주고선 호시 섬짓한 눈빛으로 밖으로 나가 지하 세계의 업무 처리한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지 못 했다. 왜냐면 오늘은 신들끼리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호시 그 날이 되면 예민함이 극에 다달하고 평소보다 신경이 날 서있다. 여주 그것도 모른 채 아침 밥 먹으면서 말한다.
오늘은 꼭 저 놀아주셔야 해요? 매일 놀아주신다고 말,
- 안 돼. 나 오늘은 바뻐, 부인.
그게 어딨어요! 먼저 놀아주신다고...
여주 억울한 눈빛으로 호시 보면 호시 한 껏 예민한 눈, 섬짓한 눈으로 여주 바라보고 있다. 누가봐도 지금 나 완전 날 서있어요. 라고 티내는 거 같다. 여주 며칠 간 못보던 호시의 본 모습, 마치 누가 꽁꽁 밧줄로 묶어논 거처럼 몸이 안 움직인다.
- 오늘 회의 가야 돼. 나 오기 전까지 다른 애들이랑 놀고 있어.
......네.
호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옷매무새 정리하며 일어난다. 여주 그런 호시 흘긋 쳐다보다 기 확 죽은 모습 티 낸다. 호시 원래 같았음 우쭈쭈하면서 달래주겠지만, 오늘은 그럴 시간도 없었고... 이것저것 머리가 아픈 날이니깐. 항상 회의 갔다 온 호시의 모습은 많이 수척해진 채로 돌아온다. 호시 아직 출발도 안 했는데 벌써 목에 달린 초커가 답답하게 조여지는 거 같다. 자신을 살인자라 칭하는 그곳이 너무나도 지옥이다, 호시에겐. 호시 직속 부하 켄타우로스한테 가자고 말하면 켄타우로스 새로 장만한 마차 끌고 온다. 호시 여주한테 인사도 하지 않고 빨리 신전으로 향할 듯.
여주, 티는 안 냈지만 내심 서운하다. 오늘이 뭔 날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자기 혼자 가버리다니... 입이 쭈욱 튀어나와있다. 여주 옆에 있던 부하가 작게 여주에게 귓속말을 한다. 오늘 신들끼리 회의가 있으셔서... 여주 그 말 듣고 더 서운하다. 벌떡 일어서서는 부하 보고 칭얼거린다. 아니, 아무리 그래두... 얘기는 해줬어야 하는 거 아녜요? 너무하잖아요... 울상인 표정인 여주 바라보던 부하 안절부절 못하며 여주 달랜다.
원래 호시님이 회의있으신 날에는 저렇게 예민하세요, 여주님이 진정...
그게 가능하냐구요... 얘기라도 해줬음 몰라...
여주님이 이해하세요. 갔다 오시면 체력이 방전 되셔서... 아무런 말도 안 하세요.
...마음이 넓은 제가 이해해야죠.
여주 어느새 손님방 같은 곳에 들어와서 부하 마주보고 군것질 먹으며 칭얼거린다. 호시가 직속 부하가 있듯 여주한테도 호시가 직속 부하 한 명 붙혀놨다. 그 덕에 여주 그 부하랑 엄청 친해졌다. 가끔은 호시 뒷담화도 한 번씩 하는데... 그럴 때면 부하 얼굴에 식은땀 장난 아니게 날 듯.
*********
여주가 자신의 부하랑 노닥거릴 때 호시는 신전에 도착해서 아버지께 쓴소리 듣는 중이다. 노발대발 소리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듣기 싫었다. 위선자, 다 알고 있었으면서. 사실 제가 살인자라는 소리 듣는 것도, 자신의 친아들이 신들 사이에서 평판이 낮은 것도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 날의 진위여부를 다 알고 있었으면서... 제게 그런 벌을 내렸다. 이 거추장스러운 목에 달린 것과, 온 몸을 조여오는 하네스. 전부 다 뭣같다. 호시 잠시 딴 생각 중인데 제 아버지 그걸 놓치지도 않고 버럭 또 소리를 지른다.
넌 네 아비 말을 듣기나 하는 거냐?
- 아버지라 불릴 자격은 있어요?
...뭐?
- 됐어요. 못 들은 걸로 해요.
어쨌건 다시 장부 조작같은 일이 일어나면 아들이라고 봐주는 일은 두번 다시 없을 거다.
언제는 봐준 것처럼 배푸는 말투 너무 싫었다, 호시는. 때마침 제 아버지가 끔찍히도 아끼는 우지가 들어왔고, 우지 호시 보고나서 당황한 듯 보였다. 찔리는 게 있으니... 호시 잘 됐다 싶어서 입을 연다. 저, 아버지... 근데 장부 조작에 배후가 숨겨져있던데요. 그럼 호시 아버지 미간 찌푸리며 또 언성 높히겠지. 호시 사악하게 웃으면서 우지 흘긋 바라본다. 제발 말하지 말라는 표정, 잔뜩이나 식은땀을 흘리며 주먹을 꽉 쥔 우지의 모든 게 우스웠다. 뒷일이 무서우면 하지 말라고 했던 놈이...
- 근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어요.
나중에 정확히 알려지면 꼭 보고하러 와라. 내 반드시 그 놈의 사지를 비틀어 놓을 것이니.
- 사형은 어떠세요? 전 마음에 드는데.
호시 농담 던지고 킥킥 웃으며 우지 반응 본다. 우지 화가 나서 그런지, 아님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얼굴이 홧홧 붉게 변했다. 아버지는 시계를 한 번 보더니 회의할 시간이 다 됐다며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며 밖으로 나간다. 그럼 방 안에 둘만 남겠지. 우지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거 같이 매서운 눈빛으로 호시 본다. 호시 아무렇지도 않게 걸리적거리는 초커 자꾸 건들며 밖으로 나가려는데 우지 말한다.
너... 아직까지 자각 못 하나본데, 그 일만 아니었음 내가 이러지도 않았어.
-...자꾸 그 일, 그 일하는데... 정확히 그 때 상황 모름 말을 말지? 입만 아프잖아, 우지야.
호시 피식 웃고선 나가려다가 방향 돌려서 우지한테 가서 우지 얼굴에 난 식은땀 벅벅 세게 닦아주면서 생각한다, 한심한 놈. 이러다 들키면 어떡하려고. 그리고선 호시 우지를 놀리는 듯한 말투로 웃음기를 거두며 말한다.
- 표정관리도 못 해서 되겠어? 들통 나면 어떡하려고.
...너, 너 진짜.
- 나는 이제 잃을 거 없어, 우지야. 아무리 네가 그 일 떠들어봤자, 넌 제대로 알지도 못하잖아. 그때 와서 나보고 물어보긴 했어? 다들 그 여자만 신경 쓰기 바뻤지.
그 여자? 너 지금 그 여자라고 했냐?
- 그래, 정정할게. 우지 네 엄마. 그 여자가 멋대로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안 그렇게 됐어.
너 진짜......!
- 시간 다 됐다, 우지야. 회의하러 가야지.
호시 제 손에 묻은 우지 땀 벅벅 닦으면서 더러워, 라고 중얼거릴 듯. 우지 얼굴 잔뜩이나 빨개져선 밖으로 나가는 호시 뒷통수 쳐다보다가 자신도 나간다. 호시 맞는 말을 했긴 했다. 아버지와 호시, 그리고 그 여자를 제외하곤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 물론 다른 놈도 있지만... 어쨌거나 정확히는 그 놈까지 포함해서 넷 빼곤 그 날의 진위여부를 아는 사람은 제로에 불과했다. 그래놓고선 다들 안다는 눈빛으로 절 보고 살인자니 뭐니 하는 게 너무 위선적이었다.사실 호시도 모순적이긴 했다. 미워하고 가장 원망하는데... 동시에 사랑도 했다. 그리고 보듬어주기까지 하니 저도 그들을 욕할 순 없었다. 그들이나 호시 자신이나 비슷했다.
밖으로 나가서 회의실에 도착하자 또 욕이 한 웅큼 쏟아진다. 이젠 익숙하다. 전엔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사지를 찢어놓고, 장기를 모조리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이었는데... 이젠 괜찮아졌다. 솔직히 말해서 여주 덕이 컸다. 여주는 한 게 없지만 요 며칠 사이 가끔씩 그 일에 불안해하는 호시를 볼 때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다며 절 토닥였으니깐. 여주 생각을 하니 지금 뭘하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요즘 호시를 웃게 하는 거, 1순위가 여주이다. 여주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가려는데 큰 소리로 누가 호시에게 배신자! 라 말했다.
배신자! 살인자! 제 어미를 죽인 놈은 신이라 말할 자격도 없다!
-......
살인자는 자격을 박탈 시켜야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꼭 날 뛰더라.
호시는 섬뜩한 눈으로 제게 그런 말을 하는 신을 쳐다봤다. 사실, 신도 아니었다. 어느 신의 부하였다. 부하는 호시의 눈과 마주하고 나서 덜덜 떨었다. 다신 안 그랬다는 눈빛을 호시에게 보낸다. 별 것도 아닌 놈이. 호시는 또 머리가 아파온다. 이번 회의 때 그냥 확 터트려 버릴까. 호시의 손엔 폭탄이 하나 달려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아, 물론 당사자인 우지를 제외하고. 호시, 만약에 회의 때 장부 얘기가 나와 피곤해질 때 폭탄을 던지기로 다짐했다. 재미있는 풍경을 볼 수 있을 거 같다.
회의가 시작 됐다. 회의란 별 거 없었다. 그냥 인간 세계에서 보내는 이것저것 건의 사항들, 그리고 천상계와 지하 세계에서 문제들을 논의하는 시간이었다. 호시 건성건성 지하 세계 부족한 물자들 말했다. 그리고 회의가 다 끝나갈 때쯔음에 제 아비가 말했다.
아, 호시는 장부 조작 멋대로 하지 말고.
- 그거 저 아니라니까요, 방금 전에 얘기 들었잖아요. 뒤에 배후가 있다고.
그걸 누가 믿어, 배신자가 한 말을.
어느 신이 조롱하는 말투로 말했고, 호시 느릿하게 고갤 돌려 방금 전 입을 뗀 신을 바라보았다. 광기의 신이었다. 누가 직책 따라간다더니, 진짜 미쳤구나. 호시는 나지막히 흘려가는 투로 말했다. 그걸 놓치지 않고 들은 광기의 신은 벌떡 일어서선 웃기다는 식으로 말했다. 목소리가 쩌렁쩌렁 회의실에 퍼졌다. 가려고 준비하던 신들이 멈춰섰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 되었다.
자기는 누가 죽음의 신 아니랄까봐, 제 어미도 반은 죽여놓고선... 할 말도 많지.
- 아무 것도 모르는 새끼가, 한 번 더 입 놀리기만 해. 똑같이 만들테니깐.
와, 무서워서... 또 중벌 받고 싶나보지? 아, 이젠 중벌이 아니라 신 자격 박탈이겠네!
저어기... 앉으시죠, 소란 피우시지 마시고... 회의 끝내야죠.
아니, 소란 안 피려고 해도 저 새끼가...
둘 사이에 앉은평화의 신이 일어난 광기의 신을 진정시키자 호시 더 말해봐라는 눈빛 광기의 신에게 보낸다. 언뜻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소름 끼치는 눈빛이다. 더 말하면 널 불구로 만들겠어... 같은 눈빛. 광기의 신은 평화의 신 덕에 내가 그만한다고 하며 앉는데 손이 덜덜 떨려오고 있다. 호시 안 그래도 피곤한데 더 피곤해졌다. 회의실 둘러보며 우지 찾는데 우지 언제 말할까... 하며 초조해하고 있다. 호시 피식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벼랑 끝에 선 우지를 내몰아내기 몇 초 전인 상황.
- 장부 조작 누가 시킨 건지 알면 다들 놀랄 거예요.
......
- 모두의 신뢰를 받고 있는 신이 직접 시켰으니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겠지. 근데, 뭐 말해봤자... 배신자라고 안 믿을테니깐 말은 아끼겠습니다.
저, 저기 이제 그만 해산하죠?
다리 떨고 있던 우지 어색히 웃으며 다들 해산하자고 말하는데, 거기서 원우가 궁금한 듯 묻는다. 원우 다른 악의적 의도 전혀 없는데, 우지 입장에선 일부로 저러나... 싶다. 원우랑 호시는 친해서, 호시가 미리 얘기한 줄 안다. 호시 원우가 물어보자 잘 됐구나 싶어서 입꼬리 올리면서 말하겠지.
누가 그랬는데?
- 내 형제인 우지가 그랬다고 그러던데. 믿거나 말거나, 믿을 사람은 믿고 안 믿을 사람은 믿지 마세요.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호시 말하자마자 회의실 웅성웅성 거린다. 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20%는 믿는 분위기, 반은 배신자의 말이라며 아예 믿지 않는 분위기. 호시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회의실 나간다. 회의실 나갔는데 안에서 당황한 우지의 말이 들린다. 아니, 제가 안 그, 그랬어요. 지금 호시 쟤 말을 믿는 거예요? 쟤는 제 어머니를 반으로 죽인 놈이라고요! 살인자의 말을 지금 믿는 거예요? 정말 안 그랬다니까요? 호시 우지 말 듣고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밖에서 대기하던 켄타우로스 뭔 일이냐며 물어보는데 호시 그냥, 이라고 말하며 마차에 탄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거 같다는 생각만 든다.
마차 타고 다시 지하 세계로 왔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니 처음 왔을 떄처럼 사진 구경하고 있었다. 여주 호시 봤음에도 못 본 척 하며 다시 사진 구경한다. 호시 허, 바람 빠지는 소리 내며 빠르게 여주 옆으로 간다. 옆에 가서 구경하는 척하며 여주에게 말 건다. 왜 나 무시해, 부인? 여주 들었음에도 딴 말한다. ......와, 진짜 예쁘다. 누구지... 그러면 호시 인상 찌푸리며 여주 쳐다보며 말할 듯. ...나 왜 무시하냐고. 여주 째리며 호시 쳐다본다. 진짜로 몰라서 그러나? 여주 입 삐죽 튀어나온 채로 말한다.
회의 간다 그러면 얘기를 하던가요! 진짜... 오늘 아침에 갑자기 너무 쌀쌀 맞아서 당황했잖아요. 왜 제가 제 남편 회의 간다는 소리를 다른 사람한테 들어야 돼요? 다시 생각해도 너무하네.
-......그것때문에 그래?
호시 여주 입에서 나온 남편 소리에 입꼬리 올라간다. 안 그런 척 다시 되물으면 여주 고작 그것때문에? 라며 더 째려본다. 아무리 여주가 호시 째려봐도 호시 눈엔 그냥 사랑스러울 듯. 다른 부하들 원래 회의 갔다 오면 기진맥진해져서 잔뜩 예민미 뽐낼 호시인데 저렇게 대화하고 있는 걸 보니깐 신기해서 켄타우로스한테 물어보면 켄타우로스 잘 모르지만 회의 끝나고 나서도 웃으셨다고 말한다. 호시 여주 보니 피곤한 거 다 날아간다. 이게 행복이구나 싶다. 여주 허리춤에 손 올리고선 호시 바라보며 말한다.
다음부터는 갈 때 말하구 가야 돼요? 진짜... 부인이라면서 알려주는 거 하나도 없어.
- 미안, 미안. 그래도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잖아.
사랑하면 안아주기라두 하던가요, 흥.
여주 사랑스럽게 팔 벌리면 호시 꽉 안아주고 얼굴 곳곳에 뽀뽀 퍼붓는다. 그럼 여주 간지럽다는 듯 꺄르르 웃을 듯. 둘이서 궁전 앞에서 꽁냥거리는데 궁전 정문 세게 열리면서 우지 화난 얼굴로 들어올 듯. 그리고선 여주 바라보며 피식 웃는다. 쟤 저러고 있는 걸 보면 호시가 제 엄마를 반 죽여놨다는 걸 모를 거다. 우지 재미있는 일이 생긴 거 같아서 웃음 지으며 둘한테 다가간다. 여주 당황해서 호시 품에서 나와서 우지 쳐다보고, 호시 지금 쟤가 왜 왔나...하고 사고 회로 돌리는 중이다. 우지 호시가 막기도 전에 여주한테 가서 귓속말로 이렇게 말한다.
너, 쟤가 자기 엄마 반 죽여놓은 거 모르지? 그걸 알고서 쟤랑 그러고 있을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