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화희[後宮火熙] : 1.화희옹주
어수선한 아침이었다. 새벽동안 창살을 세차게 스치며 내리는 빗소리에 옹주는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정리했다. 문 밖으로 조용히 스치는 버선발의 소리가 분주히 움직였다. 옹주의 신분으로 입궐한지 한 달, 진즉에야 궐의 예는 아버지인 화운군(火沄君)의 가르침에 뼈가 저리도록 익혔다. 당장이라도 나이 어린 공주의 구실을 해보라 하거든 지체함 없이 완벽히 해내야 한다는 말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화운군은 자신의 처지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옹주를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왕가의 여인으로 만들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름에 밖에서 옹주의 기침을 확인하는 상궁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울렸다. 들어오시게. 잠에서 깬 것 치곤 꽤나 정갈히 다듬어진 목소리에 상궁은 종종걸음으로 발을 내딛으며 조용히 들어와 옹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옹주마마, 아침문안 드실 시간이시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기침하시었느냐."
"이미 기침하시어 옹주마마를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상궁의 말에 옹주는 여린 두 눈을 꼭 감았다. 일찍이 일어나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필시 '그 일'에 대하여 옹주에게 말을 꺼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청나라 황제의 첫째 아들인 1황자의 복진(정실부인)으로 맞이할 옹주를 모시기 위하여 사신들이 파견되어 조선 궁궐에 머물렀다. 지난 몇해간의 병자호란으로 청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왕이 청의 황제가 자신의 아들에게 조선의 공주를 복진으로 주겠다는 화친를 빙자한 협박에 하는 수 없이 응했다는 것이다. 병자호란에 조선의 여인을 첩이나 시녀로 사용하기 위하여 공녀를 차출하여 간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황제가 직접 나서 칙서를 내려 사신들을 보내왔다. 왕은 공주가 5세 이하로 나이가 어리니 그 자리를 대신할 왕가의 종친이었던 화운군의 딸을 양녀로 삼아 청으로 시집을 보낼 생각이었다. 옹주는 복잡하게 물든 머릿속을 애써 비워내려 꼭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전하, 옹주마마 입실하시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왕의 희미한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왕의 처소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는 알 수 없는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애써 미소띈 얼굴로 들어서 고개를 폭 숙이며 가늘어진 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아바마마, 기체 후 일향 만강하시옵니까."
"앉거라."
왕의 흔들리는 손짓에 옹주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다 스러져가는 억새처럼 힘이 없는 왕을 보고 있자니 조선의 앞날이 심히 걱정이 되었다. 몇 번의 기근과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조선은 뼈대만 앙상히 남은 초가삼간과 다를 바 없었다. 옹주는 금방이라도 눈을 감을 것 처럼 가늘게 뜬 눈을 또렷히 바라보았다. 조선의 왕, 나의 양아버지, 결국 나를 청에 팔아버리는 무능력한 약소국의 우두머리. 옹주는 숨을 색색대며 힘겹게 말을 내뱉는 왕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늘이 네가 청으로 시집을 가는 날이구나."
"… …."
"너를 화희(火熙)라 이름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옹주는 몸을 바닥에 바짝 엎드려 인사하였다. 아바마마라 칭한다 한들 신분에서부터 고귀함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왕은 그런 옹주를 애처로이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와 네 아비의 공은 잊지 않을 것이다. 네가 청으로 시집을 가주니 고마움이 이루 말할 데가 없구나. 네 아비와 어미의 삶은 내가 약속하고 보장해 줄 터이니 걱정말거라."
옹주는 그저 치맛단을 만지작 거리며 쓴 대답을 혀 너머로 삼켰다. 종국엔 이런 결말이 나올거란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고국을 떠나려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버지의 기세에 동무 하나 없이 살아온 조선땅이라지만, 이제 더는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병든 어머니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비통할 뿐이었다. 여전히 어색하기만한 당의를 쓸어내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옹주가 일어나는 인영에 차마 못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왕에 옹주는 그저 두 눈만 꿈뻑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용히 바르작 거리는 치맛단의 소리만 온 방 안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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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전의 처소를 나와 대례복으로 환복하기 위하여 제 처소로 향하니 저를 바라보며 수군대는 소리들이 또렷히 들려왔다. 종친의 딸이 왕녀가 되더니, 결국 청으로 끌려가네. 끌려간다는 말에 옹주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말을 곱씹을수록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환향녀…. 그것이 청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을 낮잡아 부르는 고국의 말이었다. 저들의 말은 곧 내가 청에서 살아 돌아온다 하여도 결국엔 양반이 아닌 환향녀로 불린다는 말이겠지. 말 속의 가시를 애써 파해쳐 제 심장에 꽂았다. 상해진 기분에 자리에 멈춰서 그들을 바라보니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잰걸음으로 달아났다. 안봐도 뻔했다. 저들은 자신의 일터나 처소로 돌아가 그 대단하신 옹주마마께서 고개를 빳빳히 들고 저들을 노려보았다며 몇번이고 입방아를 찧을 것이다. 절로 터져나오는 한숨을 집어삼켜 더욱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황상궁, 자네는 방금 저들이 한 말이 무슨뜻인지 알겠는가?"
"마마…."
"저건 나를 환향녀라고 함과 다름 없음이다."
"… …."
"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느냐?"
"찾아서 잘 주의토록 하겠사옵니다."
옹주의 말에 상궁은 머뭇거리다 이내 눈치를 챈 듯 고개를 조아리곤 그들이 지나간 곳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상궁의 뒤를 말간히 바라보다 이내 제 뒤에서 겁을 잔뜩 집어삼킨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긴장한 궁녀들이 보였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죽이라 명한것도 아닌데 다들 이리 마음이 약해서야…. 조금은 차가워진 눈으로 계단을 올랐다. 처소로 들어서니 청나라의 예복이 걸려있었다. 옹주는 화가난듯 짐짓 두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나인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혼례복입니다, 옹주마마."
"어찌해서 이런 더러운 것이 내 혼례복이란 말이냐?"
옹주의 날선 말투에 나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얼어붙었다. 조선 궁궐의 대례복을 가져와라. 옹주의 호령에 나인들중 하나가 바닥에 몸을 바짝 엎드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ㅇ,옹주마마, 옹주마마께서는 청나라로 시집을 가는것이니 시댁이 되실 청나라의 법도에 따라 청의 혼례복으로 올렸다 하시옵니다."
"못들은 것으로 할터이니 조선의 대례복을 가져오거라."
딱딱하게 굳은 옹주의 말에 나인들은 하는 수 없이 침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인들은 옹주가 입궐하고 나서부터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다. 옹주는 왕실의 종친들에게는 꽤나 궁중의 예법과 도리를 다했으나, 자신을 모시는 궁인들에게는 모질었다. 제 어미와 떨어져 사는것은 옹주나 나인들이나 다를바 없는데, 나인들은 옹주가 그저 배부른 투정이나 하는 철없는 어린 계집으로만 치부했다. 청으로 시집을 가는게 무엇이 그리도 싫은지, 제 부모와 아우의 밑으로 들어갈 살림밑천 평생 쓰고도 남을 정도의 재산을 가지게 된다는데 그저 힘겹게 아둥바둥 살아가는 자신들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났다는 말들이 궁 안으로 전해지고 전해져 소문이 파다했다. 옹주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조선의 대례복을 내어오기를 기다렸다. 궁녀들의 입을 단속 시키러 갔던 상궁이 돌아와 옹주의 눈치를 보며 나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옹주는 그제야 악으로 온 몸에 주고 있던 힘을 풀어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더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제 앞에 걸렸던 새빨간 청나라의 혼례복이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조선이 청에게 보여온 예들은 청에 바쳐지는 공녀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는데, 저는 절대로 청에게 바치는 공녀들과 죄를 지은 사람처럼, 저 옷만큼은 입기 싫었는데…. 밖에서는 옹주의 부름이 있기를 기다리는 나인들이 조선의 대례복을 내어와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옹주는 마른 침을 삼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불렀다. 가져왔느냐? 옹주의 차분한 목소리에 나인들은 그저 입술을 달싹이며 내어온 대례복을 건내 보였다. 옹주는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환복을 했다. 상궁은 그런 옹주를 보며 입술만 달싹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옹주마마, 밖에서 청나라의 사신들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나도 귀가 있으니 굳이 말 할 필요 없다."
"허나, 청에서 준비한 혼례복을 갖추지 않으시는 것은 청에 대한 큰 실례이옵니다."
"실례?"
실례라니,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옹주의 눈이 오롯이 상궁을 향했다. 환복을 돕는 나인들의 손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옹주의 말간 눈속에 담긴 화는 그 입을 한 번 더 열면 어떠한 화라도 달게 받아야 할 것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상궁은 그제야 고개를 내저으며 입술을 다물었다.
옹주는 환복이 끝난 후에도 한참이고 처소를 나서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시간을 끌어볼 심산이었다. 대단하신 청의 황자께서 조선과 청의 국경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데, 그를 조금 더 애태워 볼 심산이었다. 밖에서는 옹주가 어서 나오기를 기다리는 청나라 사신들의 헛기침 소리와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조금 소란스러워 짐과 동시에 조선의 왕과 자신의 아비가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옹주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조심조심 밖으로 나왔다. 볕이 내리쬐는 하늘 아래 몇시진을 서있었던 탓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서있던 청나라 사신들의 얼굴이 더욱이 일그러졌다. 옹주는 그런 사신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조신히 내려와 왕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옹주의 뻔뻔함에 그녀의 친아비와 왕마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옹주는 그런 모습을 재미있는 볼거리라도 본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마에 올라타려 했다. 청의 사신들은 입술을 달싹이며 급히 옹주를 막아세웠다.
"옹주, 어찌 이러시오? 분명히 청나라의 혼례복을 올렸는데 이것이 무슨 무례인 것이오?"
청나라 사신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옹주는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옹주의 눈빛과 청나라 사신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곤 옹주에게 환복할 것을 명하였다. 옹주는 단호한 얼굴로 아무말 하지 못하는 왕과 제 아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조선입니다. 조선의 땅을 벗어나 청과 조선의 국경에 들어서면 그때 환복하도록 하지요. 그리 해도 늦지 않을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사옵니까?"
"허나, 옹주는 이제 청나라의 황제가 되실 1황자의 정실 부인 복진이 되실 몸입니다! 이곳이 조선이라 하여도 본인의 신분이 어떤 고귀한 존재가 될 지 생각은 하시는 게지요?"
"고귀한 몸이 되실 분이시니, 지금부터라도 자네에게 하대를 해도 괜찮겠는가?"
옹주의 말에 청나라 사신은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옹주는 그런 사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가마에 올라 탔다. 가마에 올라타 창문을 열어보니 어느새 중전도 나와 있었다. 중전에게 눈으로 인사를 건내고 보니 저를 배웅하기 위하여 꽤나 높은 자리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옹주는 자신이 시집을 가는 자리마저 오지 못하는 병든 어머니가 보고 싶었지만 애써 속으로 삼켰다. 눈물이 고일 것 같은 느낌에 황급히 창문을 닫으려 하니, 제 가마 옆으로 다가와 서는 인영에 옹주는 결국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옹주는 흐르는 눈물을 서둘러 닦아내며 제 가마 옆에 서서 저의 울음을 가리고 선 그에게 나지막히 말을 건냈다.
"미안해."
옹주의 말에 사내는 말없이 손수건을 꺼내어 창 사이로 넣어주었다. 이 손수건, 여직 가지고 있었구나. 조금의 헤짐도 없이 깔끔하게 다려진 자귀꽃이 수놓인 손수건을 만지작 거렸다. 태형아,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다. 먼 타국에서 어찌 버틸까 수없이 고민하고 고민했는데, 네가 옆에 있어 주겠구나. 옹주는 붉어진 눈을 손수건으로 꾹 눌러 가렸다. 태형은 그런 옹주의 모습이 가마 밖으로 보일까 염려하며 자신이 입은 철릭의 소매로 창을 가려주었다. 가마가 일어서 궁궐을 점차 빠져나와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향하며 사람들의 시선이 거두어 지자 태형은 그제야 창을 가리고 있던 소매를 거두었다. 잠시간의 정적을 깨고 태형의 낮은 목소리가 온 숲을 매웠다.
"수해 네가 궁으로 입궐하자마자 독해졌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는데, 전부 거짓이었구나."
"화희입니다."
"화희…."
태형은 제게 이름을 정정하여 말하는 옹주를 내려다 보았다. 옹주는 가마 안이 답답한지 고개를 빳빳히 들고 정면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태형을 올려다 보았다. 한참이고 더 가야 할 것인데, 덥지는 않으십니까. 옹주의 물음에도 태형은 어깨만 으쓱이며 웃어보였다. 화희의 뜻이 무엇이냐. 태형의 물음에 옹주는 별 뜻이 없다는 듯 단조롭게 말했다.
"불 화, 빛날 희 자를 써서 화희 입니다."
"불처럼 빛나 세상을 밝히라는 큰 뜻이구나."
태형의 말에 옹주는 작게 웃어보였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조그마한 조선땅의 적녀도 서녀도 아닌 양녀 출신의 옹주 따위가 어찌 저 큰 청나라의 황후가 된단 말입니까. 옹주는 이 모든것이 거짓이라는걸 안다는 듯 말했다. 나는 필시 청나라의 1황자와 혼인함과 동시에 복진이 아닌 측복진으로 봉해질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선 나는 그저 작은 속국에서 바친 공녀만한 존재일 테니까요. 1황자의 복진, 차기 황제의 아내, 미래의 황후라는 입에 발린 말들은 전부 믿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그런 높은 자리를 저에게 내어 준단 말입니까. 옹주의 채념한듯한 말투에 태형은 그저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줄 수 밖에 없었다.
"넌 여린 민들레다."
"전 그저 가시일 뿐입니다."
"너에게는 참 모질구나."
"모진것이 아니라 이것이 본디 저의 모습이지요."
"그래서 그리 악하게도 굴었느냐? 궁인들이 너를 냉혈한이라 부르는 것을 들었다."
"오라버니께서는 그런 말을 듣고도 저를 민들레라 칭하십니까?"
태형은 옹주의 입에서 나온 말에 옅게 미소를 띄며 걸었다. 오라버니….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제가 옹주의 집에 양자로 들어오던 그 날, 옹주는 화운군에게서 맞은 상처를 보고 수군대던 집안의 하인들과는 달리 제게 달려와 서툰 솜씨로 자귀꽃을 수놓은 손수건으로 저를 돌보아 주며 천한 것이라 멸시하지 않고 그저 한 해 더 살았다는 이유로 오라버니라 불러주었다. 그마저도 옹주가 크면서부터 아버지인 화운군에게 궁중 예법을 배우면서 오라버니라는 말을 자주 입에 담지 않았다. 옹주는 짐짓 말이 없어진 태형이 궁금해 다시금 해를 가리고 선 태형을 올려다 보았다. 태형은 그런 옹주의 눈길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어린 날의 기억들을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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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가마를 타고 이동을 해서인지 옹주는 그간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사람처럼 피골이 상접했다. 조금 여윈 모습으로 가마에서 내리니 국경에 먼저 도착한 청나라의 황자와 그의 사람들이 옹주를 맞이했다. 국경으로 넘어오기 직전, 상궁과 태형의 설득에 이기지 못하고 결국 조선의 대례복을 청의 혼례복으로 환복한 후 가마에 올랐다. 옹주는 가마에서 내리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붉은 천을 옅게 입으로 후 불어냈다. 황자의 얼굴이 궁금해 보고싶었지만 옹주는 이내 시끌벅적한 청나라 사신들의 목소리에 그마저도 포기했다. 옹주는 익숙하지 않은 화분혜를 신고 종종걸음으로 걸어 황자의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청나라식 인사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몸을 앉혔다 일으키는 것이라 배워 익숙하지 않은 몸짓으로 천천히 인사를 하였다. 머리에 올린 양파두가 무거워 목에 힘을 주어 서있기가 힘들었다. 옹주가 비틀거리자 옹주의 옆에 섰던 태형이 옹주를 부축하려 하였다.
"아, 내가 하지."
그런 태형을 막아서며 옹주를 일으키는 목소리에 옹주는 고개를 들어 가려진 천 사이로 눈을 굴려 얼굴을 살피려 애썼다. 그런 옹주의 기색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옹주를 일으킨 사내는 이내 옹주를 놓아주며 입을 열었다.
"옹주, 청에 잘 오셨습니다. 저는 7황자 정국입니다."
"7황자라 말하셨습니까?"
옹주는 황당하다는 듯 기분이 상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분명 1황자에게 시집을 간다 들었는데, 7황자라니. 옹주는 수없는 질문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그리할 수 없었다. 잘난 부군의 얼굴은 보기도 힘이 드는구나. 무거운 머리 장식에 어지러운듯 옹주가 비틀거렸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붉은 천도 짜증이 났다. 옹주는 저를 붙잡는 손들을 뿌리치곤 얼굴을 가린 천을 끌어내려 시야에서 치워버렸다. 그런 옹주의 모습에 7황자는 당황하다 이내 옅게 웃어보였다.
"형수님께서 화통하신 성격이십니다."
"1황자님께서는 많이 바쁘신가봅니다."
"차기 황제가 되실 분이시니 국정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계십니다."
"전해들은 바와는 달라 조금 놀랐습니다. 혼례라 하여 1황자께서 직접 나오시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옹주의 툴툴거림에 정국은 신기한 것이라도 본 듯 옹주의 작은 입술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정국은 한참이고 떠들던 옹주의 말들을 전부 들어주다 이내 옹주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그런 정국의 행동에 놀라 그의 손을 빼내려 하자 정국이 멎쩍은듯 웃으며 손을 놓았다. 옹주는 정국을 힐끔이며 바라보다 이내 당황감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청은 남녀가 유별인 것을 넘어 자신의 형수가 될 여인에게도 이토록 거침없이 행동하는 곳인가 봅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형수가 너무도 반가워서."
정국의 말에 옹주는 더 할 말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임시 막사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막사로 들어서자마자 불편했던 화분혜를 벗어버렸다. 시원해진 발에 제 발 옆에 널부러진 화분혜를 발끝으로 툭툭 밀어냈다. 청나라 사람들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찌 저런 것을 신이라고 신고 다니는 것인지, 발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옹주의 무거운 머리 장식 양파두가 목을 아프게 하였다. 내친김에 불편한 양파두와 차파오마저 벗어버리려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정국에 이를 단념했다. 정국은 청에서 가져온 차를 내어 놓으며 옹주의 앞에 앉아 옹주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 얼굴에 무엇이라도 묻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전해들은 바와는 달라 보여서 그럽니다."
"어찌 전해들었기에 저를 그리 동물이라도 본 듯 보시는건지."
"옹주께서 꽤나 성격이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지금 제 앞에 앉아 계신 분은 그저 어린 누이 같습니다."
정국의 말에 옹주는 퍽이나 기분이 상한듯 정국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제 앞에 놓인 차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기운에 정국을 빤히 바라보던 눈길을 거두어 따뜻한 찻잔을 들었다.
"저는 제가 복진이 될것이란 말을 믿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러십니까?"
"어느 누가 저같은 계집에게 그런 귀한 자리를 내어줄 것이란 말입니까?"
옹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국은 탁자에 턱을 괴며 옹주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조선의 왕녀라 들었는데, 너무도 자신에게 박하신 것 아닌지? 정국의 빙글대는 목소리에 옹주는 괜한 말을 꺼냈다는 기분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길을 서두르시지요. 옹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국은 옹주의 화분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옹주, 오늘은 이 곳에서 묶고 가시지요. 옹주는 그런 정국을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다 밖으로 나가버리는 정국을 까치발을 들고 따라 나서다, 이내 멈춰선 정국에게 가로막혀 걸음을 멈추었다.
"형수께서 기다리시던 형님이 오셨습니다."
정국의 말에, 옹주는 멍하니 얼어붙은 얼굴로 차가운 땅의 기운이 스며든 맨발을 움츠릴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