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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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가 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마주한 상황이 저 자신도 이해가 안되는 듯 싶었다. 태풍이 온 날 결국 나타난 악마를 찾지 못한 탓에 석진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당하는 중이었다. 그 때 맡았던 냄새가 나는 악마를 찾아내라는. 계속 경찰에 신고를 하려는 석진 때문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세나의 병원비로 그간 진 빚이 얼마인데 벌금이라도 물면 큰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 맡았던 향은 좀처럼 나타나질 않았다. 석진을 골탕먹이려는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 며칠 간은 그 정체모를 악마를 실컷 욕하며 지냈다.
그토록 찾던 냄새를 맡은 건 방금 전 병원 식당에서였다. 거짓말처럼 그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병원에서 맡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당황하다가도 저 악마가 사라지기 전에 빨리 따라잡아야했다. 다 먹지 못한 밥 대신 김석진을 한껏 씹으며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석진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으로 오라고 연락을 한 다음 악마 놈을 뒤쫓았다. 윤기를 괴롭히던 악마는 병원을 이리저리도 쏘다녔다. 악마답게 걸음도 빨라 뒤쫓으면서 땀이 났다.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악마가 남긴 잔향을 따라갔다. 놈은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닌지 병원 곳곳에 냄새를 흩뿌려놓았다. 덕분에 병원 구경이나 실컷하는구나. 윤기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 몇 분을 쫓았을까 놈이 몰고 다니는 강한 냄새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옥상으로 발을 닫는 순간 윤기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녀린 체구에 하얀 원피스, 긴 검은색 머리칼. 심장이 멎어버릴 뻔했다. 혹여나 들킬세라 입을 막았다.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뜨고 비벼봐도 세나가 맞았다. 하나 밖에 없는 윤기의 동생, 민세나. 너무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그 아이. 피곤해서 헛 것을 본 것이라고 애써 생각해도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세나가 살아있었다.
“민세나.”
몸을 숨기고 작게 그 아픈 이름을 중얼거렸다. 무심코 맡은 악마의 향이 세나의 모습에 놀란 마음을 추스리고 이성을 되찾게 했다. 저 악마는 왜 세나의 곁에 있는 것인가.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세나가 살아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세나와 함께있는 저 존재는 더 놀라웠다. 분명, 과거에 세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악마는 아닌 듯 싶었다. 분위기가 달랐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좀 다른 분위기이다. 굳이 그 때의 악마와 비슷한 놈을 꼽자면 전정국. 그 놈이 좀 더 가까웠다. 윤기는 잠자코 석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석진에게 저 악마를 넘겨주면 세나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정말 세나가 맞는지. 윤기가 의사 가운을 소리나지 않게 고쳐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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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는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태형은 며칠 전에 본 여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날짜는 줄어드는데 아무 소식이 없는 정국이 답답해 밑으로 내려오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리 낌새를 눈치채고 원래 도착하기로한 곳에 석진이 기다리고 있자 석진을 피해 바로 전정국이 지내는 곳을 향했었다. 여주의 얼굴을 보는 순간 태형 역시 자칫하면 여주를 세나로 착각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여주의 집을 보자 태형은 깨달았다. 여주의 집은 아늑하고 생명력이 방 안을 감돌았다. 민세나라면 결코 만들 수 없는 집이었다. 얘는 민세나가 아니라는 걸. 민세나가 아닌 다른 여자의 집에 정국의 향이 깊게 스며든 것을 알아 챈 태형은 모든 걸 파악했다.
“똑똑하다. 박세나.”
“의도한 건 아니었어.”
“결과적으로 모두가 속았네.”
“우연의 일치였어.”
“엄청 닮았더라. 혹시나 싶어서 다시 가서 확인까지 했어. 진짜 정여주.”
이 상황에 기막힌 우연으로 비롯된 것은 맞았으나 민세나는 자신의 잘못된 한 마디를 통해 모두를 휘둘러 놓는 것에 성공했다. 하물며 김석진까지 속다니. 태형은 세나를 향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때 거래를 주고 받았을 때 눈치를 챘어야했는데. 돌이켜보면 이미 싹수가 보였었다. 태형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랑 더 이상 엮이기는 싫고 가지고 싶은 건 가져야겠고.”
태형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저를 노골적으로 비꼬는 태형의 말에도 세나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김태형이 먼저 알아챌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계산 착오였다. 얼마 전 정국과 여주를 만났을 때는 화재가 일어나는 덕에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몇 년만에 만난 정국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세나는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특히, 정국의 시선이 여주를 향해 있을 때 이유 모를 질투심도 올라왔다.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여주에게 가 있는 정국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 일부러 정국을 의식하며 예전의 연약한 모습을 보이며 걸었다. 자신과 운명을 함께하고 싶다고 했던 정국을 다시 보자 여러 감정이 솟구쳤다. 정국이 세나를 보고 데려가지 않았다면 오히려 깔끔하게 미련을 접지 않았을까. 그러나 정국은 세나를 알아보았다. 정국이 세나에게서 받은 그 느낌에 무엇인지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정국은 여주를 향한 시선을 세나에게로 돌렸다. 그 사실이 세나의 욕망을 더 끓게 만들었다.
지민에게 전해들은 말로는 여주는 레스토랑에서 일어난 화재에 휩쓸리지 않았다고 했다. 만일 정국이 세나를 데리고 밖으로 가지 않았다면 세나 자신이 화재 피해자가 되었을 것이다. 세나가 실소를 흘렸다. 결과적으로 전정국이 또 한 번 세나를 살렸다. 그렇다면 정여주는 누가 살렸을까. 정국을 만난 이후부터 우연을 믿지 않는 세나였다. 누군가가가 개입한 것이다.
그러나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결과를 바꿀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악마와의 위험한 놀이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세나는 확신했다. 정국을 만났을 당시에 정여주를 향해 품고 있던 묘한 열등감이 이렇게 쓰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덕분에 세나는 원하는 걸 다 가졌다. 소중한 사람을 보내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박세나, 내가 궁금한게 있는데 말이야.”
태형이 세나의 주위를 빙빙돌며 말을 계속했다. 일의 전말을 다 알았으니 더 이상 이것으로 세나에게 볼 일은 없었다. 다만 끝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할 부분이 남았다.
“대가는 치렀어?”
태형의 말에 세나가 코웃음을 흘렸다. 점점 심해지는 정국의 집착에 두려움을 느낀 세나는 정국과의 계약을 미루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사고가 났고. 태형을 똑바로 보며 무어라 말하려는 세나에게 태형의 짧은 욕설이 먼저 들렸다. 욕설을 내뱉은 태형이 뒤쪽을 흘깃 바라봤다. 석진이 오고 있었다. 석진이 이 사실을 알면 내기를 파투내기 이전에 태형을 죽이려 들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변에 인간이 없다는 것을 대충 확인한 태형은 단번에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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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택한 쪽에서는 그 남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들어선 길을 계속 따라나가면 도착하는 곳은 병원 정문이었다. 병원이 워낙 넓은 탓에 병원으로 들어오는 입구만 해도 무척 많았으니 내가 잘 이용하지 않는 입구를 제외하고는 그 위치를 알고 있지도 않았다. 탁 트인 밖으로 나와 그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 혼자 가늠해 보았다. 어쩌면 왼쪽 길로 갔을지도 모르지. 물어볼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내 옆으로 다가온 남자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왔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전정국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직장에서 보는 남친은 이런 느낌인가. 헤실헤실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온기를 가득 머금은 그의 손이 따스함을 전해주었다. 나를 감싸고 도는 그의 체취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어떻게 왔어?”
“김석진 따라왔어.”
여름을 물들인 초록빛 배경으로 그의 미소가 피어났다. 전에는 몰랐는데 그는 참 화사하다. 화사하고 싱그럽다. 여름을 닮았다. 정국의 미소를 눈으로 천천히 담았다. 한순간도 놓치기 싫어서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그 싱그러움을 빼곡히 눌러 담았다. 한 치의 틈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의 머리칼이 바람에 약하게 살랑였다. 병원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지기는 또 처음이었다.
“기분 좋다.”
“나도.”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진심이다.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기를 간절히도 원하고 있다. 집 벽에는 화관이 벌서 일곱 개나 걸렸다. 그에 대한 마음을 확신한 이후 시간은 평소보다 더 빨리 지나갔다. 그래서 일까 정국과 함께하는 시간이 하나 하나 모두 소중했다. 사실은 약속한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봐 두렵다. 같이있는 지금이 한낱 신기루로 변해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불안하다. 내 앞에 있는 전정국이 실제로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그의 볼을 어루만지는 습관을 만들었다. 지금도 그의 부드러운 살결을 매만지며 그가 내 앞에 있음을 확인한다. 정국이 자신의 볼을 만지는 내 손목을 약하게 잡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 속에 초록 잎을 배경으로 한 내 모습이 비쳤다. 정국이 내 바람에 내 얼굴 앞을 막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뭐가 불안해.”
정국도 알고 있구나. 그가 몰랐으면 했다. 모를 리가 없다는 걸 알고있으면서도.
“운명을 함께하길 바랐다고 했잖아.”
“응.”
“그 말 취소.”
“취소?”
“운명을 함께하길 바란다고.”
“......”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미친듯이 갈구하고 있다고.”
‘바랐다’가 ‘바란다’가 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그의 미소를 또 한 번 눈에 마음에 꽉 들어차도록 주워담았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이 많아요.
이제 조금씩 밝혀질 거랍니당.
23회는 플러스가 뒤에 더 붙을 예정이에요.
혹시 질문이 있으시다면 그냥 막 물어보셔도 됩니닷!!
암호닉은 끝나기 전에 정리글 올리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