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현총수/ 우아한 탐닉]
#01
'살아야 한다.'
귓가에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 급박한 상황속에서도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종현의 어깨를 부여잡고 말하는 그녀는 경고를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붙잡혀선 안돼.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란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손가락을 칼로 베어내어 종현의 입술에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그녀의 피가 종현의 울음을 더욱 부추겼다.
'이제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아. 어서 떠나렴. 어서 도망쳐.'
뒤도 보지 않고 뛰어나가라고 명령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종현의 귓가에 맴돌았다. 계속해서 맴돌았다. 계속해서.
*
종현은 침대에 걸터앉아 땀으로 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흐트러트렸다.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없는 방 안에는 종현의 소리와 움직임만이 존재했다.
종현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듯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종현은 숨을 가다듬었다. 요즘 들어서 간간히 꾸던 꿈이 더 잦아진듯 싶었다.
10년도 더 된 기억이다. 그 이후의 몇 년간의 기억은 머릿속에 남아있지도 않다. 물론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을거라는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였다. 종현은 아무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10년을 살아남았다. 그녀의 피 한모금으로.
통증조차 없었다. 배고픔도 없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살아간다. 불사의 몸처럼.
하지만 그녀는 죽었다. 모든것이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듯이 허망하게 죽어버렸다.
'죽지않아.'
작게 읊조린 종현이 몸을 일으키더니 곧바로 향한 곳. 문. 조심스럽게 문을 연 종현이 우편함에 꽂힌 편지를 발견하고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것이 유일한 행복이었다. 이 어둠속에서 사는 삶의 단 한줄기의 빛같은 존재.
그것을 의미하는듯 살짝 열린 문틈에서 환한 빛이 스며들어왔다. 낮이다. 그것도 상쾌한 아침.
종현은 손을 뻗었다. 그 작은 틈 사이로 손을 뻗어 편지를 잡았다. 빳빳한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느낌이 좋다. 종현은 손에 잡히는 편지의 느낌에 다시한번 환한 미소를 지었다.
편지를 꺼내려고 했다. 꺼내려고 했는데…
종현은 급히 손을 움직였다. 팔을 움직일 수가 없다.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할 수 없다.
"찾았다."
타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강제로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그였다. 내 희미한 기억속의 그.
*
"마지막 아네르가 죽었습니다."
진기에게 보고를 올리는 남자의 얼굴이 어둡다. 진기는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쳐다봤다.
"마지막 아네르는 죽지 않았어."
진기의 말에 남자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진기를 쳐다봤다. 이건 무슨 소리일까.
"죽은 그 여자는 마지막 아네르가 아니니까."
남자에게 들릴듯 말듯 작게 중얼거린 진기가 알 필요 없다는듯 미소를 지으며 밖에 나가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진기는 의자에 앉아서 곰곰히 생각을 하는듯 보였다. 어떻게 하면 그 마지막 아네르를 사로잡을 수 있을지. 어떤식으로 이용할 수 있을지.
어차피 김종현이 숨은 곳은 알고 있었다. 건드리지만 않았을 뿐이지. 뭘 하는지, 어떻게 생활하는지 관찰하고 감시한지 오래다.
그런 일 따윈 최민호와 마주보고 앉아 말을 나누는 것보다 쉬운 일이니까.
"그 쪽에선 좀 안달이 나있으려나."
지금쯤이면 시오넬의 마지막 아네르도 숨을 거뒀을 것이다. 조만간 시오넬과의 담화가 이뤄질 것이다.
진기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빡빡하게 막힌 놈이랑 얘기하는게 얼마나 힘든데.
이제 태민이 종현을 만나면, 마지막 아네르는 우리 차지가 된다. 진기는 곧 눈앞에 보일 종현을 생각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놀라겠지. 아마.'
*
"카텐."
"카텐이 뭐에요. 태민이라고 불러야지."
턱하니 들어가지 못하게 문을 막은 남자는 종현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겁먹지 말라는듯이.
종현은 그런 태민을 가만히 쳐다봤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야.라는 눈빛으로.
과거의 기억속에 태민이 떠오른다. 그래, 이름을 말하기 전까지는 무슨 이름이었는지 기억이 안났지만. 카텐이라는 그 단어는 기억났다.
'형! 나는 이태민이에요. 태민이.'
'응. 안녕.'
'형 나는 저기 저 너머에 살아요. 이번엔 내가 놀러왔으니까 다음번엔 형이 놀러와야 돼요?'
'저 너머에는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요? 왜 가면 안되는거에요?'
'왜냐면 저 너머엔…'
'널 죽이려는 카텐과 시오넬이 존재하기 때문이야.'
종현은 여자의 말을 곱씹으며 눈 앞에 서있는 태민을 똑바로 쳐다봤다. 기죽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그녀처럼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어.
"그래, 태민아 왜 온거야?"
"형이 너무 꽁꽁 숨어버려서 찾으러 왔어요."
"내가 왜 필요한건데…?"
종현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태민은 멈칫 짓던 미소를 살짝 사그러트리더니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종족의 마지막 아네르가 죽었거든요."
"태민아. 나는 아네르가 아니야."
아네르가 아니다. 태민은 종현을 비웃었다.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아네르의 기운이 가득 차다 못해 넘쳐 흘렀다. 그런데도 아니다라.
태민은 종현을 가로막고 있던 손을 치우곤 그 손으로 종현의 머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저는 카텐중에서도 순혈의 피를 이어 받았어요."
태민은 말을 꺼내며 종현의 머리에 있던 손을 거두고는 곧장 안주머니에 있는 칼을 꺼내들었다.
작은 칼. 보자마자 살을 베어내고 피를 제공하기 위한 칼이라는것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용도가 명확하다.
칼의 겉면에는 카텐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피의 서약, 지식을 상징하는 문장.
태민은 곧장 칼을 들어 제 손가락을 베어냈다.
"이 피 때문에 내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웠는지 형은 몰라요."
"태민아."
종현이 급하게 피가 흘러나오는 태민의 손가락을 붙잡자 태민은 그런 종현을 우습다는듯이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딱 하나 마음에 드는게 있는데."
종현의 손을 치워내고는 곧장 손가락을 종현의 입술에 가져다대며 억지로 종현의 입을 벌리는 태민의 행동에 종현은 급하게 태민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이게 무ㅅ…"
"난 한눈에 누가 어떤 종족인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거든요."
태민의 피가 종현의 혀에 닿자마자 종현은 참을 수 없이 강렬한 쾌감을 받았다. 피의 서약. 서로를 원하고 탐하는 피의 서약.
종현은 태민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미칠것만 같다. 그녀의 피와는 전혀 다른 강한 쾌감.
단순한 생존의 의미가 아닌 욕망이 담긴 짙은 향기에 종현은 떨어트린 손을 다시 들어 힘주어 태민의 손을 붙잡고는 혀를 내밀어 태민의 손가락을 핥았다.
"아네르가 아니라고?"
태민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아네르. 그래, 난 아네르였지.
정신없이 피를 탐하며 태민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태민은 망설임없이 손을 거두어내며 종현에게 말했다.
"여기서 서약해요."
태민은 다시 한번 손에 쥔 칼을 종현의 손가락에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자신과 똑같이 종현의 살을 베어낸다.
종현은 아픔에 멍하니 뜨고 있던 눈을 바로 떴다. 태민은 그런 종현의 반응따윈 안중에도 없다는듯 종현의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한방울도 떨어트리지 않겠다는듯이 거칠게 핥아올리고 빨아댄다. 피를 탐하면 탐할 수록 태민의 눈동자에 담긴 생기가 뚜렷해 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카텐에 남아있던 마지막 아네르의 피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생생한 생기.
종현은 가만히 태민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다가 베어낸 곳을 깨무는 태민의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어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매서운 태민의 눈초리가 종현을 향한다.
"서약중이잖아요."
"무슨 서약. 내가 언제 한다고 했어."
쾌감은 가라앉은지 오래. 무표정한 모습으로 태민을 바라보고 있는 종현의 얼굴을 확인한 태민은 굳은 표정을 애써 풀며 종현의 손을 잡아챘다.
"나랑 같이 가요."
"나는 안가."
"안가면 여기서 죽여버릴지도 몰라."
죽음. 가장 위협적인 협박. 태민의 굳은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종현은 태민의 말에 굳게 닫힌 입을 억지로 열어 대답했다.
"죽여."
"고집 그만 피워요. 같이가면. 형은 다치지 않아요."
"아니. 여기서 나가면 어차피 죽어."
"죽이지 않아요."
모순된 말이다. 눈앞에 있는 이태민은 지금 내게 협박을 하고 있다. '죽더라도 가서 죽어라. 카텐을 위해 살다 죽어라.'라는 말을 지껄이고 있다.
종현은 발견된 이상 여기서 대답하지 않으면 죽는다는걸 알고있다. 체념한듯 태민에게 잡힌 손을 살짝 비틀어 빼어낸 종현은 태민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보며 대답했다.
"그 약속 지켜."
종현의 말에 태민은 굳은 얼굴을 풀고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런 틈도 주지 않고 곧장 손을 잡아 밖으로 이끄는 태민의 행동은 거칠기 그지 없었고
태민에게 잡혀 어정쩡하게 끌려가는 종현은 차분하게 몸에 힘을 빼고 태민의 대답만을 귀에 담았다.
"지킬게요."
작가의 주절주절 |
판타지+현대물인데 막상 쓰고보니 판타지 요소가 너무 강하네요. 스포가 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궁금하신 부분 성실히 답해드릴게요(웃음)
연재는 늦어질 수도 있지만 끊김없이 할 예정이에요! 그럼 저는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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