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나간 자리
“네 머릿속에서 사라진 기억이 딱 나를 만나기 몇 달 전부터의 것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어.”
그런 거 아니야. 재환아,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하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렇게까지 진지한 재환이의 모습은 처음이었으니까.
bgm : DooPiano - Hush cover
14_Untangled
“해리성 기억상실 그거,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면 해당 기간의 기억이 지워지는 거라며. 나를 만났던 동안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건 분명 내 책임도 있는 거잖아. 아니, 내 책임인 거잖아.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도 속상해 죽겠는데, 너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나라는 사실이 너무...”
“야 재환아...”
“상황이 이런데 내가 어떻게 말해. 내가 김재환이다, 네가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기억을 잃었다, 하고 어떻게 말하냐고. 나는 너랑 일 년 반을 사귄 네 전 남자친구고, 나는 네 앞에 다시 설 자격도 없는 사람인데 아직도 너를 좋아하고,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나는... 나는......”
재환이가 운다. 사귀는 일 년 반 동안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는 재환이가 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재환이에게 다시 고백했던 날에도 울었던 것 같은데. 겉으로는 약한 척해도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재환이가 눈물이 많아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재환이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 그 날부터였을까. 매번 안기기만 했던 내가 먼저 팔을 뻗어 재환이를 끌어안았다. 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자 미안함이 물밀 듯 밀려왔다. 나는 왜 이제야 너를 기억해냈을까.
“미안해. 미안해, 재환아. 내가 다 미안해.”
“네가 뭐가 미안해.”
“그냥 내가 다 미안해. 너를 잊어버려서... 정말 너무 미안해.”
끝까지 참아보려 했는데, 내 품에 안겨 누구보다 서럽게 우는 재환이의 모습에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울음이 느껴졌다. 내가 기억을 잃고 사라진 동안 아무도 없는 암흑 속에서 혼자 외롭게 헤매었을 재환이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야아... 울지 마.”
누가 누구보고 울지 말라는 건지. 눈물로 범벅이 된 재환이의 얼굴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눈물부터 좀 그치고서나 말하든가. 재환이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건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 이야기도 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기억을 잃을 만큼이나 힘들었던 그 시간들에 대해서. 재환이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잠시 풀고 재환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시작했다.
“사실 힘들었던 거 맞아. 너를 만나는 그 시간 동안 나 내 인생 통틀어 제일 힘든 시간을 보냈어. 내 우주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었던 우리 아빠가 결국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장사에 뛰어드는 걸 보고 있는 것도 너무 속상했고, 쫄딱 망해버린 우리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는 없다는 사실도 너무 견디기 벅찼어. 집 안 공기가 나를 숨도 못 쉬게 짓눌러서 매일 아침 도망치듯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우리 가족 어려운 거 알면서 내가 이렇게 멀쩡히 학교에 다니고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내 숨통을 조여오더라. 알바를 하고 또 해도 돈이 넉넉하지가 못해서, 하루빨리 취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밤낮을 꼬박 새면서 면접을 준비했어. 근데 그것마저 쉽지가 않더라고. 여기저기 이력서는 다 보내놨는데 나를 데려가겠다는 회사는 없고, 이런 나를 기다리느라 혼자 외로웠을 너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만 들고. 진짜 너무 힘들었어. 스트레스 때문에 기억을 잃는다면 그때를 잊는 게 당연하지 싶을 정도로.”
이야기하는 내내 나와 눈을 맞추던 재환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또 자기 때문에 힘들었다는 말인 줄 알았나 보지? 그런 거 아닌데 진짜.
“나 봐봐 재환아.”
“내가 너를 어떻게 봐.”
“그럼 그냥 듣기라도 해.”
“듣고 있어.”
이 말 만큼은 네 눈을 보며 전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지 뭐.
“나는 재환아, 그렇게 힘들었는데도, 네 덕분에 하루하루를 버텼어.“
재환이가 살짝 놀란 듯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중인데 이렇게 귀여우면 어쩌라는 거야. 당장이라도 재환이의 볼에 입을 맞추고 싶은 걸 꾹 참고 말을 이어나갔다.
“웃을 일 하나 없고, 즐거워할 일 하나 없는 내 하루가 네 덕에 겨우 행복할 수 있었어. 나는 네가 이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어. 네가 미안해 봐야 그 날 맥주 한 캔 마시고 내가 대신 운전하게 만든 것 정도라고 생각했지, 네가 내 기억상실에 이렇게나 큰 책임을 느끼고 있을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했어.”
“안 그래도 그만 울려고 했어. 나 하나 달래려고 그런 말까지 안 지어내도 돼.”
얘가 진짜. 평생 속고만 살았나.
“빈말 아니야. 너 정말로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나는 너한테 내내 고마웠거든. 나는 정말 이 세상이 너무 싫었고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항상 내 편이 되어줬잖아. 네 덕에 내가 힘을 냈는데 전부 네 탓이라고 말해버리면 나 진짜 속상해. 네 덕에 아침마다 눈을 떴고, 네 덕에 참 많이 웃었어. 나는 정말... 네가 좋아, 재환아.”
“...진짜?”
재환이가, 이렇게 귀여운 재환이가 내 앞에 있다니. 당연하고도 감사한 일이었다. 나에게 있어 재환이가 얼마나 벅찬 사람인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쪽-
재환이가 다시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기억 다 돌아온 건 맞지?”
“응. 완전.”
“내 이름이 뭐야.”
아 분위기 좋았는데 진짜. 갑자기 무슨 스피드 퀴즈래.
“장난하냐? 김재환이잖아.”
“내 생일은?”
“5월 27일.”
“우리 처음 사귀기로 한 날 날짜 대봐.”
“야 너 진짜,”
“얼른.”
“...8월 7일.”
“오, 다 기억하네?”
“다 기억한다니까. 이제 그만 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진짜 마지막이다.”
이건 뭐 내 기억이 돌아왔는지를 확인하는 질문이 아니라 그냥 사심이 들어간 질문 같은데. 귀여우니까 봐준다, 김재환.
“내가 너한테 처음으로 준 선물은?”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냐? 인형이잖아. 완전 큰 곤도리 인형.”
“야, 나 이제 발음 잘 하거든? 곤도리 아니고 곤!도!리!”
“곰돌이 발음 못 하는 것도 여전하네. 너 진짜 김재환 맞구나?”
재환이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시우가 아닌 재환이로서 짓는 아무 걱정도 섞이지 않은 웃음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
“여주야.”
“응?”
내 이름을 부르고선 한참을 말없이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던 재환이가 두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빈틈없이 감싼 재환이의 손은 참 따뜻했다.
“사랑해.”
― 나는 사랑한다는 말 자주 하는 거 싫더라.
― 왜?
― 그냥, 뭔가 가볍잖아.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 뱉어버리면 뭔가 다 끝난 기분이 들 것 같아. 나한테는 사랑한다는 말이 제일 커다란 마음의 표현인데, 아무 때나 습관적으로 써버리기엔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가 너무 아까워.
―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럼 나도 진짜 중요한 때에만 쓸래. 나는 완전 진지하고 무거운 사람이니까.
― 하여튼 김재환. 완전 내 따라쟁이야, 따라쟁이.
“나도 사랑해.”
내 대답을 들은 재환이가 말갛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나는 기억을 잃기 전에도, 기억을 잃은 와중에도 나를 설레게 했던 그 싱그러운 미소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 앞으로도, 영원히.
+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네요:)
슬픈 소식이 있다면, 다음화가 마지막이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