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나간 자리
“저기요.”
“...네?”
“저 어디서 본 적 없으세요?”
“어... 잘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은주랑 같이 저희 학교 축제 오셨던 분 아닌가?”
“...아, 맞아요! 은주랑 어릴 적부터 친하다던? 그날 공연 잘 봤어요.”
“어쩐지 낯이 익다 했네. 은주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과제 하러 오신 것 같은데 실례가 안 된다면 합석해도 될까요?”
뭐야 이거. 꿈이야? 꿈 주제에 뭐가 이렇게 생생해...
“네, 좋아요. 저 마침 과제 거의 다 해서 그냥 시간 때우고 있었거든요.”
“정말요? 다행이다. 은주한테 듣기로는 우리 동갑인 것 같던데, 그냥 말 놓는 거 어때요?”
“아 그럴까요? 아니, 그럴까? 이름부터 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여주에요. 이여주.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아니지.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김......
또 여기네. 벌써 일어날 시간이 다 됐나.
......재환이야.”
“......김재환.”
bgm : DooPiano - Who are you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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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조각조각 맞춰지는 퍼즐 조각들. 그동안 일주일에도 몇 번씩 내 꿈에 나온 사람은 김시우가 아닌 김재환이었고, 꿈에서 일어난 일들은 무의식이 만들어낸 내용이 아닌 나와 재환이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었다. 그럼 김시우는 누구지. 분명 재환이와 똑같이 생겼는데. 다른 사람이라기엔 하는 행동과 목소리까지 너무 똑같잖아. 내가 아는 김재환은 외동아들이고. 그렇다면 가능한 경우는 딱 한 가지. 김시우와 김재환이 같은 사람인 것.
......왜. 왜 여태 말하지 않았던 거야. 왜. 도대체 왜.
베개를 흥건히 적셔버린 눈물을 닦으며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실로 나오니 아빠를 등지고 잠들어있는 엄마가 보였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곤히 자고 있던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
“여주니...? 새벽에 왜 갑자기 깨우고 난리야......”
“엄마.”
“...무슨 일인데 그래.”
“엄마 나한테 정말 숨기는 거 없어?”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까지도 없었다. 엄마는 분명 망설이고 있었다.
“얘가 요즘 왜 이래. 그런 거 없다니까.”
좋아. 정말 숨기는 게 없다, 이거지? 나는 분명 말할 기회를 줬어, 엄마.
“알았어.”
정말 나만 몰랐던 거구나, 나만.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엄마를 뒤로한 채 다시 방으로 들어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최근 통화
[시우 09 : 57]
막상 그 이름을 보고 나니 통화 버튼이 쉽게 눌러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낯선 이름, 김시우. 왜, 도대체 왜 숨겼을까. 자신이 김재환이라는 걸 왜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내가 너를 잊었다는 사실에 이렇게나 화가 나는데, 너는 너 스스로를 잊혀도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걸까? 도대체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약속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시간이 다 되어 만나기로 한 카페에 들어가려는데, 저만치서 해맑게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재환이가 보였다. 아, 아직 시우라고 해야 하나. 그 표정에 괜히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를 애써 외면한 채 먼저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내 행동에 놀랐는지 뒤늦게 카페에 도착해 자연스럽게 내 앞자리에 앉은 재환이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뻔뻔하다. 다 알고 들으니 참 뻔뻔해.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지만 어떤 말부터 내뱉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너는 김시우인지, 아니면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김재환인지.
“시우야.”
“응?”
눈을 한껏 키우며 대답하는 재환이의 모습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아 모르겠다. 미안.”
너 시우 아니잖아, 너 재환이잖아. 하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은 채 그냥 카페 밖으로 뛰쳐나와 버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날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그 눈을 계속 마주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뒤따라 나온 재환이가 내 팔을 낚아채듯 잡았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팔을 뿌리고는 도망치듯 집으로 향하는 것밖엔 없었다. 재환이가 계속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집 앞 골목계단에 다다르고 나서야 말없이 내 뒤를 따르던 재환이가 다시 입을 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 말을 해야 알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재환이의 목소리에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물어야만 했다. 아무도 나에게 김재환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냐고.
“왜 속였어? 왜 말 안 했어. 네가 김재환인 거, 왜 말 안 했냐고. 그동안 나 만나면서 진짜 재밌었겠다? 너는 알고 있는 것들을 나는 몰랐잖아. 네가 누군지, 또 나는 누군지 너는 다 아는데 나만 몰랐네. 기분이 어땠어?”
“...기억... 돌아온 거야?”
“어, 다 기억났어. 그래서 즐거웠어? 아무것도 모르는 나 보면서?”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나한테 말 안 했던 이유가 뭔데. 네가 김재환인 걸 말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 한두 달도 아니고 일 년 반을 사귀었어, 일 년 반을. 그 시간이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었니? 내가 너를 잊은 걸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아, 너 나랑 다시 마주쳤을 때 기분 참 더러웠겠다? 내가 또 네 인생에 눈치 없이 끼어든 거 아니야. 내 기억도 사라졌겠다, 김재환 새 인생 한 번 살아보려는ㄷ......”
“미안했으니까.”
...뭐?
“네가 취업 스트레스 받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도 쉬엄쉬엄 하라는 말밖에 못 해준 게 너무 미안했으니까. 너랑 너희 가족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고작 말뿐인 위로를 건네는 것 말고는 내가 해준 게 없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으니까. 그래서 그랬어. 너희 부모님께도, 은주한테도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네가 날 기억해내지 못했으면 했어.”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네가 나한테 미안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한테 미안해할 짓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인데 너는.
“네 머릿속에서 사라진 기억이 딱 나를 만나기 몇 달 전부터의 것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어.”
그런 거 아니야. 재환아,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하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렇게까지 진지한 재환이의 모습은 처음이었으니까.
+ 기 억 이 돌 아 왔 다 ! ! !
아직 기억을 되찾은 직후라 여주가 많이 혼란스러울 거예요. 차츰 오해를 풀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 지켜봐 주세요:)
이게 다 독자님들 때문이에요! |
저 사실 '기억이 지나간 자리' 연재가 끝나고 미리 써둔 단편들까지 올리고 나면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거든요,, 그동안 너무 달려오기도 했고 딱히 생각나는 소재도 없고 해서jnj 그런데 저번 공지에 달린 댓글들을 보고 이렇게 고마운 독자님들을 두고 떠나면 아쉬움이 정말 많이 남겠다는 생각이 들어서ㅠㅠㅠㅠㅠㅠㅠㅠㅠ 새 장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타이밍 맞춰 마침 소재가 떠오르기도 했구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떻게든 글을 쓸 운명인건가^0^ 아직 시작하는 단계라 정확히는 말씀드리기 어려우니 대강 윤곽이 잡히면 제대로 된 공지를 다시 띄우겠습니다:) 줄거리만 설정하고 나면 쓰는 건 또 금방 쓰니까 아마 오래 기다리신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아무튼 우리 더 오래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너무좋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