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나간 자리
“여주야, 정신 좀 차려봐. 응? 눈만 떠봐, 눈만.”
“아 자꾸 왜애... 정은주 짜증나 진짜......”
“야 나 은주 아니고 재화...시우야 시우. 집에 가야지 여주야.”
그래, 은주. 은주는 알고 있을 것이다. 어제 네가 나를 발견했을 때 은주도 함께 있었으니까. 은주라면 내 상황을 이해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너를 처음 소개해준 것도 은주였고,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 그 일 이후 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것도 은주였으니까. 은주라면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내가 네 앞에 다시 나타나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이해를 기대한 적이 없다고 확신했는데, 계속 은주라면 나를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도 누군가의 위로를 기다렸을지 모르겠다. 너를 놓아줘야 한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나는, 내 이성을 이겨버린 나의 감정을 정당화할 수단을 찾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은주가 나타나 그깟 욕심 한 번 부려도 된다고, 너에게 다시 한번 마음을 맡겨도 괜찮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 화면을 한참 동안 쳐다만 보다가, 결국 은주의 번호를 찾아냈다. 그 이후로도 몇 분동안 누를지 말지 고민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늘따라 통화 연결음이 길게만 느껴졌다.
bgm : DooPiano - 사탕 cover
09_뫼비우스의 띠
[여보세요?]
“은주야, 난데,”
[오빠,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그래. 나는 여태 이 상황을 기다려온 거야. 잘 지내냐는 은주의 물음에 잘 지내지 못했다는 답변을 건네는 것을 시작으로, 내가 왜 너에게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은 뒤 이어질 은주의 위로를 전해 듣는 것을. 하지만 그렇게까지 유치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구상했던 시나리오도 정성스레 접어 내 머릿속에만 담아두기로 했고. 긴 고민 끝에 나는 입에서 맴도는 말 중 가장 정상적인 것처럼 들리는 것을 골라냈다. 은주에게도 그 말이 정상적으로 들렸을지는 미지수지만.
“당연히 잘 지내지. 다름이 아니라 은주야,”
[무슨 일 있어?]
“...응. 어쩌다 여주랑 포장마차에 오게 됐는데, 술을 좀 많이 마셨는지 얘가 완전 뻗어 버려서... 근처면 잠깐 와줄 수 있나 하고 전화했어. 마땅히 전화할 다른 사람이 없더라고. 어제 정말 우연히 만났거든. 너도 어제 봤다시피, 정말 우연히.”
할 수 있는 말들을 고르고 골라 기껏 뱉어낸 게 고작 이런 말뿐이라니. 두 살이나 어린 은주에게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우연은 무슨. 다 알고 그랬던 거면서.
[진짜 못 살아. 둘이 그렇게 다시 만나서 간다는 게 고작 포장마차였어? 우선 알았어.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 만나서 하자. 그 사거리 따라 쭉 내려가면 나오는 포장마차 맞지? 언니가 가자고 했나 보네. 금방 갈게.]
전화가 끊기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은주가 도착한 이후에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산 하나는 넘은 것 같아서. 참, 이따가 쏟아질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나 미리 생각해 놓아야겠다.
***
“와, 이 언니 진짜 잠들었네.”
“계속 말렸는데도 소용이 없었어. 자기는 안 취했다면서 쉬지 않고 마시는데 내가 무슨 수로 말려.”
“......”
다 변명이지 뭐. 그나저나 먼저 사과부터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상황도 상황인 만큼.
“우선 미안하다, 은주야. 괜히 너까지 귀찮게 만들어서. 여주 깨울까?”
“됐어. 좀 이따 깨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우선 들어봐야지. 둘이 어쩌다 다시 만나게 된 거야? 언니도 오빠가 누군지 알아? 오빠는 어떤데. 오빠는 괜찮고?”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항상 시무룩해 있는 쪽이 나였고, 그런 나를 위로해주는 건 은주였다. 정말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와 은주가 모두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스물다섯 살이나 먹은 지금도 예외는 없었다.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침착하게 괜찮냐는 질문을 해 주는 건 스물셋의 은주였다.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적어도 나잇값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나 열 살 아이처럼 동생 앞에서 투덜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나야 괜찮지. 여주는 몰라, 내가 누군지. 그냥 꿈에 나오는 사람을 현실에서 만나서 마냥 신기해하는 것 같아. 너도 알지? 여주가 몇 주째 꿈에서 나를 본다는 거.”
“알지. 그래서, 오빠는 앞으로 뭘 어떻게 할 생각인데? 오빠가 김재환인 거 끝까지 안 밝힐 거야? 계속 이대로 지낼 거야?”
“어떻게 밝혀. 그냥 나라는 사람이 여주 앞에 알짱거리는 것도 미안해 죽겠는데, 내가 누구라는 것까지 알리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모르는 채로 지내게 하려고. 그게 여주한테도 더 속 편한 일인 거잖아.”
“언니 앞에 오빠가 다시 나타난 게 왜 미안한 일이야. 고마운 일이지. 오빠 사실 어제 우리랑 마주친 거 우연 아니지? 오빠 원래 여주 언니 마주칠까 봐 그쪽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했었잖아.”
“아...”
“그냥 오빠 하고 싶은대로 해. 언니한테도 똑같이 말해놨어. 내 생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언니가 저렇게 된 것에 대해서 오빠 잘못 없단 말이야. 미안해할 필요 전혀 없을 것 같은데 오빠 스스로 자책하는 거 보면서 내가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알아? 오빠도 할 만큼 했어. 오빠가 김재환인걸 밝히든 말든 간에 상관없이, 그냥 오빠 마음 가는 대로 해. 오빠 그럴 자격 있어. 아무도 오빠가 언니한테 하는 것만큼 못해. 난 둘이 다시 잘 됐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은주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너의 삶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로 했던 내가 다시 네 앞에 나타났고, 너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자고 마음먹었던 내가 너와 대화를 나누다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주자는 약속까지 하게 되었는데, 이미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조금 더 생각해보니 나는 이미 너를 잊는 것을 포기한 듯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두 개. 계속 불편한 마음을 가진 채로 너에게 다가가는 것과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은 채 너에게 다가가는 것. 그런데 은주의 말대로 내가 너에게 다가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긴 할까. 너도 내가 그렇게 하길 바라고 있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 이후로 내 특기는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를 풀기 위해 애쓰는 것이 되어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답을 얻지 못한 채로 풀리지 않을 난제만이 하나 늘어갔다.
***
“으응...? 은주 네가 왜 여기 있어... 여기 우리 집이야...?”
“아휴 언니, 이제야 좀 정신이 들어?”
우리 집 맞네... 아, 잠시만. 나 오늘 분명 시우랑 약속 있었는데 여태까지 자버린 건가? 아닌데. 아까 분명 만나서 영화도 보고 곱창도 먹었는데. 설마, 또 꿈이었던 거야?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는데... 뭐지?
“지금 몇 시야? 다섯 시 넘었어?”
“다섯 시는 무슨. 열 시다, 열 시. 언니 아예 정신을 잃었구나?”
열 시...? 아, 머리야. 머리가 왜 술 마신 것처럼 어지럽ㅈ... 아.
“나 오늘 술 마셨지.”
“응.”
“많이?”
“응.”
“나 추했어?”
“...응.”
“시우도 알아? 내가 취한 거?”
“시우? 시우가 누군데. 언니랑 같이 있던 남자? 그 사람 이름이 시우야?”
“사람 이름 가지고 뭘 그렇게 놀라. 하... 당연히 알겠지. 같이 마셨는데.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알고 왔어? 너 시우랑 아는 사이야? 분명 걔랑 둘이 마신 것 같은데 왜 네가 여기 있어.”
“나도 친구랑 약속 있어서 놀다가 곱창 먹으러 갔는데 언니가 쓰러져 있더라고, 테이블에. 그 시우인지 뭔지 하는 남자분은 쩔쩔매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고. 어제 길에서 만난 그분 맞지? 언니 꿈에 나오는 사람하고 닮았다던.”
“응, 맞아. 계속 말해봐.”
“더 말할 것도 없지 뭐. 안절부절못하고 계시길래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 그러고는 별말 없었어. 나한테 고맙다고 하더니 갈 길 가더라.”
이제 시우 얼굴을 어떻게 봐. 나를 술도 하나 조절 못하는 사람으로 봤을 게 뻔한데.
“...망했네.”
“그러니까 누가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남자랑 포장마차 가서 술 마시래? 언니 평소에 잘 조절해서 마시더니 오늘은 왜 그랬어?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없었고, 그 사람이랑 이야기 좀 편하게 나눠보고 싶었는데 맨정신으로는 할 수 있는 말이 몇 마디 없을 것 같아서... 술 좀 들어가면 편해질까 해서 몇 잔 마셨지. 이렇게 뻗을 정도까지는 안 마신 것 같은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빨리 취했지.”
“언니가 먼저 포장마차 가자고 했지?”
“어떻게 알았어?”
“뻔하지 뭐. 언니 혹시 그 사람한테 관심 있어? 그래서 그런 거야?”
“어? 아니이~ 관심은 무슨 관심. 어제 처음 본 사람인데.”
“꿈에서 자주 봤다며.”
“그래도 아니야, 그런 거.”
“언니.”
얘 봐라. 가끔 보면 은주가 나보다 더 오래 산 것 같다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무서울 때가 있다. 나를 쓸데없이 너무 잘 알아서 탈이야 정말.
“...관심까지는 아니고, 그냥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 싶은 정도? 야, 솔직히 그 정도는 생각할 수 있잖아. 안 그래?”
“그렇지. 누가 뭐라고 했나. 오늘 언니 엄청 이상해. 술이 덜 깼나? 더 자. 언니 깨면 가려고 거실에서 아줌마랑 수다 떨고 있었는데 언니 일어났으니까 이제 가봐야겠다. 그 남자분이랑 잘 해봐!”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냥 언니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나는 무조건 언니 편이니까. 나도 그 시우라는 분 어제 잠깐밖에 못 봤지만 괜찮은 사람 같더라. 순수하고, 배려심 깊고. 좋은 마음으로 말해주는 거야.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 잘 됐으면 좋겠는 마음에서.”
은주한테는 다 털어놔도 되지 않을까.
“...알았어. 잘 되면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줄게.”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이미 첫눈에 반한 것 같은데?”
내 생각이 짧았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정은주 얘도 마찬가지네.
“아아 몰라 몰라. 너 그냥 빨리 집 가. 엄마~ 은주 간대!”
“언니 이런 모습 되게 오랜만이다. 나 진짜 갈게. 푹 쉬어~”
이런 모습이 처음도 아니고 오랜만이라고? 내가 또 언제 이랬던 적이 있었나 보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로 보니 잃어버린 그 시간들의 한 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 2년 동안 나한테 남자친구가 없었다고 하는 걸로 봐서는 기껏해야 짝사랑이었던 것 같고. 이번에는 짝사랑으로 끝나지 말아야 할 텐데.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냥 잠이나 자자.
+ 여주가 재환이에게 다시금 사랑에 빠졌으니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건가요...? (데자뷰)
바로 이어서 10화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