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나간 자리
“내가 뭐 하나 알려줄까?”
“뭔데?”
갑작스러운 너의 칭찬만큼이나 뜬금없는 나의 질문에 소주잔에 반쯤 채워져 있던 술을 입속에 가볍게 털어 넣은 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취기가 돈 탓인지 살짝 발그레해진 너의 두 볼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나 사실 오늘 밴드 연습 가야 하는데 안 가고 여기 온 거야.”
“너 밴드 해?”
...아 맞다. 네가 알 리가 없지.
“내가 말을 안 했구나. 밴드부야. 학교 밴드부.”
“대박. 너는 밴드에서 뭐 어떤 거 하는데? 기타? 드럼?”
“보컬. 기타 들고 무대 오를 때도 있긴 한데 포지션은 일단 보컬이야.”
“노래 잘 부르나 보네? 궁금하다. 근데 보컬이 연습 빠져도 돼? 보컬 없이 연습이 되나?”
“하루쯤 빠져도 상관없어. 내가 안 가겠다는데 어쩌겠어.”
“네가 상관없다면 된 거지 뭐.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괜히 기분 좋네. 연습 빠진 거 잘 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쨌든.”
너의 앞에 다시 설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나 어렵게 얻었는데 그깟 밴드 따위가 뭐 중요하겠어. 내 인생 1순위는 언제나 너였는데.
“그럼 나도 비밀 하나 알려줄까? 너도 하나 말해줬으니까.”
“뭔데?”
“나 사실...”
지금 내가 짐작하고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면 했다. 너의 입에서 그 단어만은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비밀이었지만, 너에게 그 말을 직접 듣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bgm : Hey - And I need You Most
08_잔상
“말하기 어려우면 안 해도 돼. 네 비밀 알고 싶어서 연습 빠진 이야기 한 거 아니니까.”
“아니야. 그냥 내가 말해주고 싶어서.”
“......”
“나 사실 기억상실증 환자다? 신기하지.”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너를 마주한 나는 마땅히 대꾸할 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동안 많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어렸고, 어리석었다.
“아... 정말?”
“그렇게 불쌍하게 쳐다볼 건 아니고, 한 2년 정도의 기억이 사라졌어. 그것 말고는 멀쩡해.”
“...다행이네. 뭐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고?”
“물어보고 싶은 게 그것뿐이야? 되게 놀랄 줄 알았는데 아니네. 불편한 점은 딱히 없어. 그냥 조금 답답한 정도? 나는 그 2년 동안의 일들을 알 길이 없으니까.”
2년 동안의 기억이 하룻밤 만에 사라져 답답하긴 하면서도 마치 그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하지는 않은 것처럼 말하는 너의 모습에 괜한 오기가 생겼다. 이 모든 게 너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너에게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던 것 같다. 김재환 참 못났다, 싶으면서도 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 말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특별한 일 없었을 거야. 그냥 모르는 채로 살아도 아무 지장 없을 그런 시간들이었겠지.”
“네가 뭔데 그걸 확신해?”
차갑게 내뱉은 너의 한마디에는 가시가 잔뜩 박혀있었다. 나의 섣부른 추측을 매정하게 짓밟은 건 너의 말뿐이 아니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살기 어린 눈빛이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네가 잃어버린 그 시간들 때문에 너무나도 아파하고 있다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억일 거라고 단정 짓기엔 망각이 주는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미안해. 난 그냥 네가 그 기억들 때문에 너무 많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해서. 어제 처음 만난 주제에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해서 미안.”
“아니야. 네가 나쁜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아. 그냥... 기억을 더듬어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그 2년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예민해져. 매일같이 그때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하고 혼자 상상해 보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이해해.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사실 자꾸만 너랑 이런저런 일들을 하는 꿈을 꾸는 게 나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상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 나와 소소한 일상을 나누던 사람이 있었다면 저런 모습이었을까 하고. 그 상상 속 주인공이 왜 하필 너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너 정말 많이 힘들었겠다.”
“자꾸만 신경을 쓰니까 우울해지는 거야. 이렇게 말하니까 엄청 힘든 것처럼 보이는데, 하루 종일 울적하거나 하진 않아. 그냥 문득문득 생각나는 거지.”
너를 다시 만나보기로 마음먹기 전까지는 분명 네가 기억을 잃은 이후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혼자 궁금해하곤 했지만, 막상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이보다 더한 고통이 없었다. 네가 뱉어내는 단어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아프게 찔러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은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아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다시금 네 앞에서 선 나는 매 순간 비겁하고 비굴했다.
“네 꿈에 내가 처음 나온 날, 솔직히 나 보고 무슨 생각 했어? 첫인상이 어땠냐고 물어야 하나?”
“첫인상? 첫인상 완전 생생하지. ‘염소다! 인간 염소가 나타났다!’하고 생각했는데?”
“뭐야. 재미없어.”
“아... 기분 나빴다면 미안. 근데 진짜 닮았는데, 염소. 염소 닮았다는 소리 자주 듣지 않아?”
― 여주야, 나 운전 완전 잘하지. 역시 베드야, 베드~
― 베드? 베드가 뭔데?
― 베스트 드라이버!
― 참나. 하여튼 말 만들어내는 건 세상에서 제일 잘 한다니까. 베드는 무슨, 아염이다, 아염!
― 아염은 뭐야...?
― 아기염소.
― 아 그게 뭐야! 나 염소 안 닮았어~
― 내 눈에는 완전 아기염소인데.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아기염소.
― ...그래? 그럼 나 오늘부터 운전 잘하는 아기염소다! 베드 아염! 오케~
“...예전에 좀 들었었어, 예전에. 염소 닮았다는 소리도 참 오랜만이네.”
“또. 또 표정 안 좋아진다 또. 염소 닮았다는 말 기분 나쁘지. 미안해. 안 할게.”
“아니야. 나 염소 좋아해.”
화제를 돌리긴 했지만 여전히 불쑥불쑥 떠오르는 너와의 기억들을 막아내는 건 나에겐 역부족이었다. 결국 바보 같은 말만 뱉어내 버린 내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염소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귀엽다고 해주던 네 말이 좋은 거겠지.
“염소 좋아하는 건 뭐야. 진짜 웃기다.”
“흐흫. 내가 말해놓고도 좀 웃겼다.”
민망함에 웃음을 터뜨린 나를 빤히 바라보던 네가 건넨 한마디.
“거봐. 웃으니까 보기 좋잖아. 자주 웃어. 웃는 거 예쁜데 왜 자꾸 숨겨.”
사귈 당시에도 웃는 게 예쁘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 없던 네가 이런 말을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슬슬 취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거 큰일이네.
“내 무표정이 그렇게 보기 싫어?”
“무표정이 싫은 게 아니라... 너 웃을 때 그 뭐냐, 눈가에 주름 생기는 거, 그거 좀 신기해. 좋아.”
“너 취했다.”
“무슨 소리야. 아직 말짱해.”
“말짱하긴 뭐가 말짱해. 너 오늘 너무 많이 마셨어. 그만 마셔, 여주야.”
“네가 내 주량을 알아? 나 술 되게 잘해~”
네 주량을 너무 잘 아니까 하는 말이야, 여주야.
***
“야야, 여기서 잠들면 안 돼, 여주야.”
“아, 몰라. 우리 집에서 내가 잠 좀 자겠다는데 진짜.”
“여기 너희 집 아니거든. 일어나봐 좀.”
“싫어 놔아...”
...완전 맛이 갔네, 갔어. 원래 주량이 줄기도 하나? 술 약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주머니, 저희 계산 먼저 할게요. 얼마예요?”
“3만 6천 원. 학생이 이 손님 남자친구야?”
“네?”
“이 손님 우리 집 완전 단골이거든. 매번 다른 여자분이랑 둘이 와서 야채 곱창 먹고 가는데 남자친구랑 오는 건 또 처음이네. 사귄 지는 얼마나 됐어?”
“아... 남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친구예요, 친구.”
사실 그냥 친구 아니라 전 남자친구고요, 지금은 저 혼자 좋아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조용히 마음을 누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와중에 남자랑 오는 건 처음이라는 말은 또 얼마나 반가웠는지. 크게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감춰야만 하는 내 상황이 특히나 더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원래 친구가 나중에 남자친구 되고 그러는 거지~ 잘 해봐, 학생.”
카드를 건네받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뒤를 돌아본 나의 눈 앞에 펼쳐진 건 술에 취한 와중에도 단정히 엎드려 자고 있는 너의 뒷모습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살짝 드러내고는 곤히 잠든 너를 앞에 두고 맞은편 의자에 앉아 너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너와 같은 자세로 테이블에 기대앉아 너를 보고 있으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 화장을 짙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길고 예쁜 너의 속눈썹이 그러했다.
“그러니까 술 잘 하지도 못하는 애가 왜 이렇게 무리해가지고.”
“나... 술... 잘 하거든......”
자는 줄 알고 혼잣말 한 번 해봤는데 대답까지 할 줄이야. 술과 잠에 취해 눈을 거의 감다시피 한 상태에서도 술을 잘 한다며 발끈하는 너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휴 깜짝이야. 알았어, 알았어. 너 술 잘 해. 세상에서 제일 잘해. 됐지?”
“으응... 잘 해... 제일......”
“으이구, 술 잘 해서 좋겠다.”
내가 생각에 네가 술을 썩 잘 마시는 것 같지는 않지만, 네가 잘 마신다면 잘 마시는 거지 뭐. 나에게 있어서 너의 말은 거의 진리나 마찬가지니까. 그나저나 잊고 있던 고민이 떠올랐다. 너는 내가 네 가족이나 지인 번호를 아예 모르는 줄 알고 있을 텐데, 너를 집까지 데려다줄 누군가를 함부로 불러낼 명목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너를 직접 데리고 집까지 바래다주면 부모님께서 많이 놀라실 텐데. 이번에는 정말 말 그대로. 취해버린 너를 진짜 어떻게 하면 좋니, 여주야.
+ 생각해보니 이렇게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은 복습하는 시간이니 굳이 오실 필요 없는데 재업이 끝나고 13화가 올라올 때쯤엔 꼭 돌아오셔야 해요...jnj
++ 아 참! 그리고 내일은 제가 이 시간에 약속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글 업로드를 하지 못하게 될 것 같습니다.
9화와 10화의 재업은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 밤 10시 55분부터 진행되는 점 유념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