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나간 자리
bgm : DooPiano - 7월 7일 cover
04_기억
사고는 생각보다 크게 나지 않았다. 쿵, 하고 충돌하는 소리에 잠시 놀랐을 뿐, 그다지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든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처하려 애썼다. 물론 그 상황 속에서 정신을 차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처음에는 핸들에 기대 축 늘어진 너를 보고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없었기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병원에 연락을 했던 것 같다. 돌아오지 않는 너의 의식에 초조했던 것도 잠시, 큰 이상이 있다기보다는 안정을 취할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괜찮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괜찮았는데, 정말 다 괜찮았는데......
우리의 사고 소식을 들은 네 부모님은 정확한 진단을 위해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병원 측의 말에 바로 다음 날 첫 비행기로 제주도에 도착하셨다고 했다. 괜히 맥주를 마셔 너에게 운전을 떠맡기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 같다는 생각에 죄송함이 밀려왔다. 서울에서 연락을 받고는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하는 마음에 두 분의 얼굴을 뵐 자신이 없었다. 어머님은 병원에 도착하신 후 죄송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나를 되려 위로해주셨다. ‘다 괜찮을 거야.’라는 말만 반복하시며. 그 말은 나에게 건네는 말임과 동시에 어머님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검진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우리는 마음을 모아 너에게 아무 이상이 없기를 기도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검진 결과 걱정했던 뇌 손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만큼 절대 안정을 취하기 위해 부모님 외에 다른 사람은 최대한 출입을 제한하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제안에 네가 깨어나 완벽히 의식을 되찾기 전까지는 숙소로 돌아가 너의 부모님께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연락이 오기만 하면 당장 병원으로 달려가 너를 끌어안은 채 사과의 말을 건넬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걸려온 전화는 내 계획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님의 목소리는 장난보다 더 장난 같았고, 거짓말보다도 더 거짓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네가 나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나의 얼굴도, 이름도, 존재마저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나를 절망에 빠지게 만든 사실은, 너의 기억상실이 사고 때문이 아니라 스트레스와 같은 정신적 요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고의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은 사이에 뇌 손상과는 무관한 해리성 기억상실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찾아보니 해리성 기억상실증은 과도한 스트레스나 고통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특정한 정보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기억상실증의 일종이라던데. 그럼 여기서 다시. 너는 우리 학교 축제에서 나를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사고가 난 그날 밤까지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네가 가진 모든 기억 중에서 내가 섞여 들어간 그 부분만 깔끔히 도려내 졌다. 너에게는 나와 함께한 시간이, 나의 존재가 고통 그 자체였던 걸까. 나와의 기억을 다 잊고 싶었을 만큼 내가 너를 힘들게 했던 걸까. 너의 무의식은 나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걸까, 지워버린 걸까.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게 내 고백의 이유였다.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너에게 나라는 사람이 휴식이 되었으면 했다. 네 웃음의 이유가 나였으면 했다. 그뿐이었다. 다른 욕심은 없었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단 한 순간도 너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너는 나의 행복이었고, 누구보다 사랑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너에게는 내가 그렇지 못한 존재였다는 걸 깨달은 순간, 너는 나에게 고통이 되었다. 네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는 것마저 힘든 일이 되어 버렸다. 너의 존재가 아픔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떠나야만 했다. 사라진 네 기억 속에 영영 갇혀버린 하나의 잔상에 머물러야 했다. 그것이 너를 위한, 그리고 나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항상 그랬듯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너에게 내 마음을 꺼내 보이기로 마음먹은 그때부터 이 마음만은 변한적 없었으니까.
너의 의식이 돌아온 다음 날, 그러니까 어머님께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전화를 받은 그 날 당일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를 한참 고민하며 하루 종일 얼빠진 사람처럼 숙소에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던 것 같다.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다 잠든 나를 깨운 건 또다시 걸려온 어머님의 전화였다. 어머님께서는 너의 짐을 가지러 숙소에 잠시 들르시겠다고 했다. 전화가 끊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에 도착하신 어머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나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내뱉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어머님께서는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다고 하셨다.
― 정말로 여주가 재환이 너에 대한 기억을 되찾지 않았으면 좋겠니?
내 대답은 확고했다.
― 네. 최대한 모르는 척해주세요.
제주도에서 인천공항까지 혼자 돌아오는 시간은 참 길고도 지루했다. 아직 비행기가 낯선 나였지만, 네가 없는 이륙은 신기하기는커녕 귀만 아픈 경험이었다. 제주도로 떠날 때는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 있는 네가 공항에서 거쳐야 할 전 과정에 앞장서 준 덕에 내가 할 일이 하나도 없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도움받을 사람 하나 없이 모든 걸 나 혼자 해내려니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간에 다른 사람과 캐리어까지 바뀌는 바람에 얼마나 당황스러웠다고. 서울에 도착했을 때 반겨줄 네가 있었더라면 공항에서 겪은 일들에 조미료를 살짝 첨가해 소풍 다녀온 어린이마냥 신나서 떠들어댔겠지만, 불행하게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너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었다. 내가 내린 판단이었으므로 탓할 사람도 없었다. 다 너의 고통을 발견해내지 못한 내가 치러야 할 죗값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내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어도 알아차려야 했는데.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너와 나의 마음이 같을 거라는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너와 나는 ‘우리’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남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너의 기억에서 내가 사라지고, 나의 일상에서 네가 사라진 지 정확히 일 년 하고도 반년이 더 지난 지금, 어머님께 다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사실 그동안 어머님과는 종종 연락을 이어 왔다. 그래 봤자 너의 기억이 여전히 제자리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지만. 하지만 오늘 걸려온 전화는 조금 달랐다. 어머님께서는 네 꿈에 내가 나오는 것 같다고, 한 번도 아니고 최근 들어 자주 그러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전화를 받은 나는 당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네 꿈에 내가 왜? 기억이 돌아왔다는 뜻인가?
― 여주 꿈에... 제가 나왔다고요?
― 그렇다니까. 나도 처음에 듣고 얘가 뭔 소리를 하나 했지.
― 꿈에 나온 사람이 저라는 것도 알고요?
― 여주는 몰라, 그게 너인지. 요즘 들어 자꾸 같은 사람이 자기 꿈에 나온다면서 나한테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 남자에 대해 설명하는 걸 들어보니 딱 재환이, 너더라고. 생김새도 그렇고, 꿈의 내용을 봐도 그렇고.
― 아직 기억은 그대로인 거 맞죠?
― 그런 것 같아. 나한테도 자꾸 아는 사람 아니냐며 꿈에 나오는 남자랑 자기가 관련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궁금해하는 것 같긴 한데, 그건 아줌마가 잘 둘러댔어. 그냥 꿈일 뿐인데 뭘 그렇게 고민하냐고.
― 아...
― 재환아, 그래도 여주 꿈에 네가 나오는 걸 봐서 너를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은 모양인데, 이제라도 말해보는 게 어떨까 싶어. 보통 각별한 사이가 아니었잖아, 너희. 아줌마가 옆에서 보기 안쓰러워서 그래. 네가 여주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고.
그래, 네 기억이 돌아오면 좋지. 어쨌든 너도 사라진 기억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테니까. 언젠가 되찾을 기억이라면, 최대한 빨리 찾는 게 좋겠지. 그런데 나는 자꾸만 너의 무의식이 그 기억들을 괜히 지운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오죽 힘들었으면 나와 관련된 기억들을 통째로 지워버렸을까. 나의 존재가 얼마나 고통이었길래 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하는 그런 생각들을. 내가 네 곁에 있으면 네가 행복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 어떻게 네 앞에 다시 나타날 생각을 할 수 있겠어.
― 죄송해요.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여주의 기억이 저절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냥 없는 사람처럼 지내려고요. 제가 괜히 나서서 여주를 더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 아니야, 네가 뭐가 죄송해. 우리가 더 미안하지. 아줌마가 또 괜한 오지랖을 부렸나 보네. 너무 신경 쓰지 마. 여주는 잘 지내고 있어. 재환이 너도 잘 지내고 있지?
― ...네. 전 항상 잘 지내죠. 전화 주셔서 감사해요.
잘 지내긴 뭘 잘 지내.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잘 지내.
― 그래. 잘 지낸다니 다행이네. 그럼 나중에 또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할게. 끊는다~
― 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들려온 너의 소식은 나를 다시 한번 무너뜨렸다. 자꾸만 꿈에 나오는 나를 보면서 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고, 네 기억을 앗아간 몹쓸 전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넌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 너무 신경 쓰지 마. 여주는 잘 지내고 있어.
머릿속에서 너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어머님의 목소리가 자꾸만 맴돌았다. 그래. 잘 지낸다잖아. 그깟 기억 없이도 불편함 없이 잘 지낸다잖아. 네가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너 없이 이렇게 힘든데, 너는 정말 아무렇지 않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차올라 자꾸만 목이 메어왔다. 나에 대한 기억을 잃은 너에게 나는 도대체 뭘 원하고 있는 걸까. 꿈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아침에 눈을 뜨며 눈물이라도 훔치길 기대하는 걸까? 무엇인지 모를 소중한 걸 잃은 것 같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길 원하는 걸까? 더 이상 너에게 그 무엇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섭섭한 마음이 드는 나 스스로가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루가 다 가도록 너의 흔적이 가득한 핸드폰만 손에 쥔 채 멍하니 앉아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던 내가 오래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
나는 너를 그리워하고 있다. 염치없게도 아직 너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나는, 결국 먼발치에서라도 너를 바라보기로 했다. 한동안 지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너희 집 근처에 다시 한번 발을 들여보기로 했다. 그러다 설사 너와 마주친다 해도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나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이기적인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기로 했다. 내가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으니까.
+ 재환이의 자책들은 물론 다 오해인 거죠.
기억상실의 원인은 취업 스트레스였고
재환이는 단지 여주의 곁을 지켰을 뿐인데...
++ 오늘부터 매일 밤 10:55, 11:00 에 각각 한 편씩 재업됩니다.
잠시 잊고 있던 내용들을 빠르게 복습한다는 기분으로 즐겁게 달려 보아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