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나간 자리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 재환이의 어깨에 기대 잠깐 잠들었을까. 일어나보니 어느새 깜깜한 어둠이 드리워진 밤이었다.
“깼어? 춥지? 이제 슬슬 들어갈까?”
“나 얼마나 잔 거야...? 엄청 깜깜하네.”
“너 막 코 골면서 자던데?”
“뭐? 진짜? 나 원래 코 잘 안 고는데.”
“장난이야, 장난. 뭘 또 그렇게 놀라고 그러냐, 우리 사이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직 코 고는 것까지 보여줄 준비는 안 됐단 말이야.
“아 김재환... 너 그러다 진짜 혼나.”
“혼나? 어떻게 혼나?”
그런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하는데 내가 널 어떻게 혼낼 수 있겠어. 아무래도 내가 재환이를 혼내는 건 다음 생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 같다. 그래도 우선 재환이한테는 비밀인 걸로.
“나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야. 몰랐지?”
“벌써부터 완전 무서운데?”
“그치? 혼나기 싫으면 잘해.”
쪽-
“야 갑자기 무슨...”
“네가 잘 하라며.”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진한 눈가 주름을 새기며 흐드러지게 웃어대는 그 모습에 나는 또 한 번 재환이에게 하릴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옷에 묻은 모래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세워둔 쪽으로 향하려는데, 자리를 정리하다 말고 함께 덮고 있던 담요를 나에게 둘러주는 재환이의 손길이 느껴졌다.
“나 괜찮은데...”
“그냥 두르고 있어. 너 추워, 지금.”
“어? 어... 고마워.”
“뭘 또 고맙기까지 해.”
덤덤하게 말하는 목소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금 붉어진 재환이의 귀.
“아 맞다 여주야. 나 맥주 마셨는데... 미안.”
“미안할 일이 그렇게 없냐. 오늘 하루 종일 네가 운전했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내가 해야지. 숙소까지 별로 멀지도 않은데 뭐.”
그렇게 해서 숙소까지 가는 길은 내가 운전대를 잡기로 했다. 사실 어둡기도 하고 남의 차 운전하는 것도 처음이라 조금 겁이 나긴 했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 거의 몇 주 만에 잡아보는 핸들이지만 잘 할 수 있을 거야. 너무 긴장하지 말자.
“야, 여긴 무슨 가로등 하나가 없냐? 너무 깜깜한데?”
“여주야, 너 운전 잘 하는 거 맞지? 그냥 내가 할까? 별로 안 취한 것 같은데.”
“얘가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너 이 상태로 운전하면 음주운전이야! 맥주 한 캔은 술도 아니다 이거야?”
“아니 그건 그렇지만... 어 어, 조심해. 라이트 잘 켜고. 비탈도 심하다 여주야.”
내 운전 실력을 못 믿는 건가 싶어 살짝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솔직히 지금은 나도 내 실력을 못 믿겠는 상황이라. 말로만 들어본 칠흑 같은 어둠에 겁을 먹은 탓에 핸들을 잡은 내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심호흡하고, 긴장하지 말고. 이제 거의 다 나왔어. 여기만 지나면 이ㅈ...
덜컹-
과속방지턱이다. 깜짝 놀랐네.
“여주야! 차선 잘 봐가면서 운전해. 왼쪽으로 좀만 더 붙어 봐.”
“왼쪽으로 가면 완전 절벽인데?”
“그 정도로 붙진 말고. 지금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 같아.”
“야, 나 무서워.”
겁먹은 티 내기 싫었는데. 무슨 길에 가로등 하나가 없어. 이런 건 어디에 건의 못 하나.
“괜찮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 천천히.”
“응. 근데 재환아, 저거 뭐야?”
고양이인가?
“잘 모르겠는데...... 어어, 저거 뭐야 진짜? 어어?”
“어? 잠시만! 나 쟤 칠 것 같은데? 야, 어떻게 해?”
“핸들 조금만 왼쪽으로 꺾어. 너무 많이 꺾진 말고.”
“이렇게?”
“어? 어. 어어, 여주야 오른쪽 오른쪽!”
”오른쪽? 야 근데 차선이 안 보여. 어어, 이거 어떻게 해?“
”오른쪽으로 더 꺾어! 어? 어, 어어!“
bgm : DooPiano - And I'm Here cover
03_그 밤
“괜찮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 천천히.”
“춥지? 이제 슬슬 들어갈까?”
“인생 진짜 헛살았네, 헛살았어.”
“나 귀여워?”
“진짜? 진짜야? 정말? 우리 여행 가?”
“좋아해. 나랑 사귀자.”
“우리 동갑인 것 같던데, 그냥 말 놓는 거 어때요?”
“저기요.”
나는 어딘지 모를 곳에서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게 맞다면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같은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할 새도 없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 가는 알 수 없는 장면들, 그리고 지나가는 매 장면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알 수 없는 한 명의 남자.
“이여주씨? 이여주씨, 제 목소리 들리세요?”
나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의사 뒤로 낯선 병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꽤 오래 잠들어있던 것 같긴 한데 잠에서 깨고 나니 아까 꿈에서 본 장면들이 거짓말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긴, 꿈이라는 게 원래 깨고 나면 금방 사라지는 거니까. 그건 그렇고, 아픈 곳 하나 없는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 본격적인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 타임머신 타고 온 것 같고 좋네요. 계획대로라면 기억이 돌아오는 화가 연재될 타이밍인데 기억 잃는 화를 업로드하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13화를 위해 이전 화들을 재업로드하는 게 맞다고 판단되어 빠른 시일 내로 12화까지의 분량을 재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