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나간 자리
“와, 진짜 오랜만이다. 지저분한 건 여전하네.”
“아니 원래 이 정도는 아닌데, 아침에 네 전화 받고 너무 놀라서. 나 원래 클린한 사람인 거 알잖아, 여주야.”
걸어서 10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거리에 있는 재환이의 집까지 오는데 이렇게 긴 시간이 걸렸다니. 처음 사귈 때만 해도 매일같이 들락날락하던 이곳까지 오는데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근데 재환이네 집에는 웬일이냐고? 이대로 헤어지기는 너무 아쉽잖아. 그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재환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할 말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그냥 헤어져. 아직 초저녁밖에 되지 않았지만 딱히 돌아다닐 만한 곳도 없고, 근처에 재환이의 자취방이 있는데 굳이 다른 곳에서 헤매야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해서 결국 이곳에 오게 되었다. 다른 뜻은 정말 없다. 그냥 이야기하려고 온 거다, 이야기하려고.
“뭐 좀 먹을래? 배고플 시간이잖아.”
“저녁 해주게? 오, 너 그새 요리도 배웠어? 뭐 해줄 건데?”
“요리? 나 요리 못하는 거 알잖아. 그냥 시켜먹으려고 했지. 뭐 먹고 싶어?”
...그럼 그렇지. 정리 잘 안 하고 사는 것도, 요리 못하는 것도 전부 그대로네.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편안했던 것 같다. 내가 알던 스물셋 김재환과 다시 만난 스물다섯 김재환이 너무 똑같은 사람이라서. 변함없이 인간미 넘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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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_기억이 지나간 자리
“그동안 뭐 하면서 지냈어? 나 없는 동안.”
“나? 나 그냥 학교 다니고, 공연 다니고 그랬지. 눈뜨면 학교 가고, 집 오면 과제 하고, 주말에는 연습실 가서 합주하고 뭐 그냥 그러면서. 진짜 재미없었어, 네가 없으니까 하나도.”
지난 2년 동안 별 재미 없는 지루한 날들을 보냈다는 재환이의 말에 괜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이렇게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을 잊어버렸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나 혼자 잘 먹고 잘 산 것에 대해서. 아, 꿈에 재환이가 꾸준히 나왔던 걸 생각해보면 꿈에서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그러는 넌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는 재환이의 물음에 쉽게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답답하긴 했어도 재환이에 비하면 내가 겪은 불편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테니까.
“나? 나는 그냥...”
“완전 잘 지냈구나? 어쩐지, 그 버스정류장 앞에서 너 다시 봤을 때 혈색이 좋다 했어. 잘 지내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니까?”
하아 김재환. 지금 내 약점 잡았다 이거지? 매번 내가 몰이 당하는 쪽에만 있다가 몰아가는 쪽에 서니까 아주 신났네 신났어. 하긴. 이번에는 내가 백 번 천 번 잘못한 거니까 봐준다. 이렇게라도 당해주면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지 않을까.
“여주야.”
“...어?“
”너 지금 나한테 미안하다는 생각 하고 있었지.“
”어? 어... 티났어?“
평소에는 사람이 어쩜 저렇게 둔할까 싶으면서도 이럴 때 보면 참 귀신같다니까.
”완전. 너 나랑 약속 하나만 해.“
”무슨 약속?“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기. 미안한 표정도 짓지 말고.“
”미안한 걸 어떡해...“
”네가 내 앞에서 자꾸 미안한 티 내면 내가 더 미안해져서 그래. 나는 네가 나랑 있으면서 항상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어. 근데 나 때문에 네가 자꾸 신경 쓰고 미안해하고 하는 걸 보면 나도 마음이 안 좋잖아. 너 없는 동안 계속 내가 너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엄청 자책했는데, 이제는 나도 그러기 싫어. 너랑 같이 있으면서 웃을 일만 있었으면 좋겠어. 무엇보다 이 일 자체가 네가 미안해할 상황도 아니고.“
재환이 얼굴만 보면 미안함이 몰려들기는 하는데, 듣고 보니 내가 미안해할수록 재환이도 내 얼굴 보는 일이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재환이 말대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결국은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서로 미안해하지 않기로 하자. 서로를 탓하지도. 죄책감도 가지지 말고. 그렇게 한참 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침이 11을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하며 놀라던 것도 잠시, 오랜만에 조금 껴안고 있다가 잠들면 간만에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민할 것도 없이 재환이의 손목을 붙잡고 침대로 향했다. 그냥 그뿐이었다. 정말 다른 뜻 없이, 밤새도록 재환이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있고 싶었다. 그보다 더 편안한 안식처는 없을 것 같았다. 왠지 오늘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재환이의 숨결이 내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재환이에게서 풍겨오는 은은한 로션 향이 자꾸만 나를 끌어들이는 것 같아 기어코 그 품에 파고들어 버렸다.
”재환아,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내가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어?“
”아까 말했잖아. 엄청 재미없었다고. 그냥 학교, 집, 연습실만 왔다 갔다 했다고.“
음, 내 질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그런 거 말고. 네 마음이 어땠냐고. 질문이 너무 애매한가? 아니다. 대답하기 어려우면 그냥 안 해도 돼. 다 지난 일인데 생각해서 뭐해.“
질문을 던진 나조차도 정확히 무엇을 묻고 싶은 건지를 알 수 없어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재환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쓸쓸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고개를 살짝 숙여 시선을 피한 나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아무 의욕이 없었어. 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도, 집에서 과제를 하면서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나 싶은 생각밖에 안 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마찬가지였고. 무슨 일을 해도 목적이라는 게 없었어. 공부든 노래든 그냥 모든 면에서 내 삶에 대한 확신이 안 서더라.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은 회의감은 들지, 또 너는 엄청나게 보고 싶지... 진짜 힘들긴 힘들었어. 아, 너 미안해하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니까 절대 미안해하지 마.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는 거야. 네 말대로 일 년 반을 사귀었는데 그런 상황에 힘들지 않은 게 더 이상한 거잖아.“
2년간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 나도 나름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경솔한 생각이었다. 기억은 잃는 것보다 잊히는 게 훨씬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 심지어 상대방은 본인이 자신을 잊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재환이의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재환이의 품에 안겨있던 내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재환이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픈 시간을 보냈을 재환이를 보고 있으니 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도 원래 눈물이 거의 없는 편이었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울보가 된 걸까. ‘그 정도였어?’하는 눈빛으로 재환이를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으니 재환이가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곧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낮고 조용했다.
”너를 만난 이후로 내 모든 행동의 이유는 너였으니까. “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려 재환이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다 괜찮다는 듯 내 등을 토닥여주는 재환이의 손길에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만 이번에 밀려드는 감정은 죄책감도, 미안함도 아닌 안도감이었다. 재환이가 내 눈앞에 있다. 그리고 내가 그의 곁에 있다. 더 이상 두려울 게 뭐가 있을까.
그렇게 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다 보니 서서히 잠이 밀려왔다. 오늘은 밤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놈의 잠이 원수지. 이대로 잠들긴 아쉬운데.
“재환아.”
“또 왜애. 얼른 자라니까.”
“나 노래 불러줘. 자장가.”
“노래? 무슨 노래 듣고 싶은데.”
“그냥 아무거나. 네가 불러주고 싶은 거 불러줘.”
생각해보니 나한테만 따로 노래 불러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노래 잘 하는 남자친구 둔 덕 좀 봐야지.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들어보겠어.
“으음... 알았어. 야야 그렇게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보진 말고. 눈 감고 들어 눈 감고. 잠 잘 오게.”
노래를 들을 생각에 재환이의 품속에서 고개만 쏙 내밀고 그와 눈을 맞추니,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는 재환이다. 어떤 노래를 부를까 하고 궁금해하고 있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재환이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사실은 첨 봤을 때부터 그댈 좋아했다고-
세상에. 내가 완전 좋아하는 노래잖아. 이 노래 가사 예쁜 건 두말 하면 잔소린데... 선곡만으로 나를 감동하게 만드는 남자는 세상에 김재환 하나밖에 없을 거다. 캄캄한 밤인데도 재환이의 얼굴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 게 보이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진짜 그랬어?”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아 몰라몰라. 빨리 눈 감고 잠이나 자.”
“알았어. 진짜 조용히 하고 들을게.”
“사실은-”
“처음부터 다시 부르게?”
“야, 너 진ㅉ...”
“알았어. 쉿.”
사실은 첨 봤을 때부터 그댈 좋아했다고 말하기가 내겐 참 어려웠던 거죠
먼저 다가서지 않으면 그댈 놓칠까 봐 편지를 쓰고 또 작은 선물을 준비했죠
깊어지면 상처뿐일 거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선 건 사실이지만
간절한 맘으로 기도하고 바랐던 사람이 그대라고 난 믿어요
노래 잘 부르는 남자친구를 두면 좋은 점 하나. 남들은 공연장까지 가야 들을 수 있는 노래를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는 것. 좋은 점 둘. 군중 속 관객1이 아니라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한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 나는 여러모로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는 사이, 재환이의 노래가 어느새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잘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속삭이듯 부르는 재환이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 정말로 잠이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쩔 수가 없네요 내 맘을 숨기기엔 그대는 너무 아름답죠
그대는 너무 아름답죠
잘 때 자더라도 불러주는 노래는 다 듣고 잠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쏟아지는 졸음을 간신히 참으며 반쯤 감긴 눈으로 재환이의 품에 안겨있는데, 노래를 마친 재환이가 내 볼을 콕콕 건드리며 왜 아직도 잠들지 않은 거냐며 투정을 부렸다. 잠 잘 자라고 자장가까지 불러줬는데 왜 잠들지 않냐면서. 네가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데 내가 어떻게 잠을 자겠어.
“우리 재환이는 누구 거길래 노래도 이렇게 잘 불러......”
밀려오는 졸음에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나름의 칭찬을 뱉어내고 나니, 등 뒤로 재환이 특유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장난기 가득하지만 왜인지 모를 따뜻함이 담긴 그 웃음소리를 핑계 삼아 그의 품에 얼굴을 더 깊숙이 파묻었다. 아, 잠깐만. 전에 내가 똑같은 질문 한 적 있었던 것 같은데.
― 너는 누구 건데 이렇게 예쁘냐, 재환아.
― 나? 나는 우리 엄마 거지.
...그랬었지 참. 그때의 민망함 절대 못 잊어. 또 자기는 엄마 거라고 하겠지? 괜히 말을 꺼냈나. 별의별 생각을 하는 동안 계속된 새벽의 정적을 깨고 들려온 의외의 대답.
“네 거지. 사랑해.”
***
그날 밤에는 간만에 걱정 없이 깊은 잠을 잔 것 같다. 아무런 꿈을 꾸지 않은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꿈을 꾸지 않으니 꿈속에서 재환이를 만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먼저 일어나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재환이가 열어주는 아침을 맞이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기억이 쌓이고,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는 동안 나와 재환이가 머문 자리에 남은 건,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우리의 공백을 다시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커다란 사랑이었다. 기억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다시는 지지 않을 사랑이라는 꽃이 활짝 피었다.
기억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다시는 지지 않을
사랑이라는
꽃이 피었다.
기억이 지나간 자리 Fin.
+ 그동안 '기억이 지나간 자리'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가오는 화요일에는 기지자의 에필로그인
'너에게 물들다 下 : 보름달' 이 연재됩니다!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폭탄인데 놓치는 독자님은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