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색
w. 랑데부
먼 길 따라 나풀나풀
애처롭게 날아간다
저 날아가는 뭣이고 하니
잔상만 남아버려
손에 쉬이 잡히지도
눈에 꼭 들어차 담아내지도
못하였으나
끝내 아름다운 것이었을텐데
붙잡지 아니하여
담아내지 아니하여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을까
- 먼 길, ㅇㅇㅇ-
1.
안전보호 같은 건 애초에 관심도 없는 곳이다. 그런 쓸데없는 것까지 관심을 줄 수 없는 곳이다. 창은 장식이다, 밖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난간을 편안히 걸어갔다. 양팔을 쭉 펴고, 가끔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왜 따라와?"
"집 가는 건데"
"여긴 우리 집 밖에 없어"
"집에 가고 있는 거야"
키가 무척이나 컸다. 학교에서 익은 낯은 아니였다, 앞머리가 부슬부슬 눈을 반쯤 내려와 덮었고 꼭 주머니에 손을 넣고 차근차근 느슷한 걸음걸이였다. 다리도 무척 길었다. 가끔 삐걱거리기도 했다, 마치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것마냥.
수업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시대의 교육은 퇴보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부적응 해 튕겨나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저. 그렇게 난간에 앉아 시간을 축내고 있으면 소년이 온다. 마주할 때마다 가는 눈을 살살 짜르는 앞머리를 꼭 잘라주고 싶었다. 가끔 소년은 희미한 색을 묻히고 돌아온다. 며칠의 부재에 언젠가 걱정이 스밀 쯤, 꼭 색을 묻혀 아니 갖고 돌아왔다. 그 색이 아름다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 어어"
"야 조심"
많은 생각을 접어 넣고 난간을 걷다 미끄러질쯤 긴 팔은 손을 잡아주었다. 방금까지 없었는데 방금 손을 잡고 그녀를 안아 내려주곤 했다. 가끔 ㅇㅇ는 그렇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도 했다. 엷은 나뭇가지 같았으나 그녀를 꼭 안고 내려주지 않는 장난에 다여섯먹은 아이처럼 꺄르르 웃기도 했다. 이마에 구슬이 맺히고 이내 추락했다. 푹푹 찌는 낮을 업고 번쩍 그녀를 안고 소년은 잘도 걸었다.
오늘 소년의 볼엔 노란 무언가가 진득히 붙어 숨을 죽였다.
2.
한 나라의 군주는 나라를 이끌지는 못할 망정 소극적인 태도로 이 나라를 멸국으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라는 욕망에 눈이 붙어 세상의 이치가 뒤틀리고 혼란으로 뒤덮여도 어물쩍 발을 빼고 있습니다. 선교사를 죽이고 그 혈흔에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이곳에서 이 아이를 지켜낼 자신이 없습니다. 이 아이가 다시 이 땅을 밟게 하는 일이 영영 없게 하시고, 물려준 태양을 평안한 나라에서 꽃 피우게 하소서. 멸국에서 자라 멸국의 운명을 등에 없기에 이 아이는 더없이 큰 인물이 될지어 한시 빨리 아이가 눈을 뜨기 전에 나라를 뜨게 해주십시오.
1886년 살을 고긱 굽어내려는듯 옥쬐이는 더위에서 태양이 태어났다. 세상이 이리도 혼란에 빠져 갈 곳 없이 주저앉아 침수되는 시대에 불운을 입고 태어난 아이를 필사적으로 어미는 제 품에서 떼어냈다, 함께 가지는 못하나 그 어디서든 어미가 될 것이다. 추위에 덥힌 바람이 되어 줄 것이고, 더위에 선한 비로 내릴것이며, 좋은 날 포근한 해로 머물 것이었다. 간곡한 어미의 필사적인 언사는 아이를 구출했다. 집 안을 바로 세우기에 성당은 불타오르고 있었고 이미 늦어 한 생명이라도 더 건지는 것이 바로세우는 것이었다. 제이, 아니 박제형 그 세 글자의 이름을 다 외지도 못한 채 아이는 넉자 늘어난 새 명을 가지고 나른한 바다를 건넜다. 야츠하시 히로키, 흙 묻은 손이 닿으면 영영 흩어질까 세게 쥐면 으스러질까, 어미의 추억 하나 주머니에 쑤셔 넣지 못한 채 열살 배기의 아이는 배 끄트머리에 박혀 바다를 건넜다.
3.
건너간 땅 위서 제형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눈 먼 노파의 손에서 길러졌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 먹지 못해 항상 굳은 표정이 결국 얼굴에 붙어 버렸다. 부모의 품 하나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린 아이는 그렇게 자랐다, 아주아주 어린 날부터 성당 안에서 살았기에 미국 신분의 아이인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모를 쯤 제형은 새 언어를 익히고 필사적으로 이 땅으로부터 헤엄쳐 도망갔다. 허락이 된다면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강압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허리가 곱게 접히지 아니한 그런 자유를 누리며.
어선이 그물에 딸려 건저 올린 것인지, 대양을 항해하는 거대한 배에 채인 건지, 근처를 탐색하던 군함에 의해 구조된 건지 영문 모를 일이었으나 제형이 눈을 떴을 때에는 온통 희고 노오란 머리칼에 푸른 눈으로 제형을 흔들며 깨우는, 좀 익숙한 단어가 들리는 곳이이었다. 살았다 살아냈다. 제형, 아니 히로키가 열다섯이 되는 해의 이야기였다.
4.
탄환을 채우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 다시
고운 한복의 소매춤이 자꾸 손을 먹는다. 아씨, 다시. 아씨라 부르지 말라니까. 뽀얀 얼굴이 반항을 집어던진다, 오른쪽 잇새에 문 탄환 때문에 웅얼웅얼 말이 씹혀버린다. 에라이 정확히 탄환은 손톱만한 지점을 다섯번 뚫고 날아가 바위를 조각냈다. 곱상한 얼굴에 비한 실력으론 놀릴 실력이 아니했다. 이마에 보슬보슬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고 ㅇㅇ는 장총을 내려 놓고, 한복을 거뒤 종아리에 꽉 묶어둔 침을 뽑아 다시 저가 뚫어 놓은 구멍으로 냅다 던졌다. 천 하나 쓸리지 않고 제대로 통과한 침은 풀숲 어딘가로 곤두박칠쳤다.
성주 ㅇ씨 대가의 금옥 주고도 견줄 수 없는 막내 딸은 어린 나이서부터 마당에서 그리 굴렀다. 무릎팍이 까져도 헤실헤실, 혼자 검술을 연습한다며 저의 키만한 빗자루를 휘두르다 맞아도 헤실헤실. 유독 몸을 쓰는 것에 즐거워했으나 그보다 머리가 총명했다. 다섯먹어 수수사탕에 어미 치맛 자락 쥐고 우는 아이들 사이서 골똘히 책을 쥐고 왼손으로 수저를 쥐었다. 한번도 제대로 밥알이, 혹 달콤한 요깃거리가 입 안에 우물우물 씹히기도전에 다른 곳에 푹 박아 오죽하면 책을 빼앗다시피 하고 밥을 먹어야만 했다. 넉넉하지 못한 세상에서 욕심 없이 건강하게 자라기만 바랐으나 그의 손녀는 그 바람의 위에 서 있었다.
"멸국을 향하고 있더라도 저는 그리 멸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게 꼭 살아남아 이 멸국을 돌려낼 것입니다"
학문에 능한 만큼 어린 손녀의 입에선 바르고 굳은 소신이 흘러 나왔다. 저의 판단에 옳은 일은 무조건 해야만 했다. ㅇ대감은 그저 품기에 뜨겁고 묵직한 손녀를 믿었다, 그는 대가 끊기기에 발을 동동거리기보다 제 뜻을 이뤄 끝내 행복하다면 만족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루는 손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세상에 총을 들이대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신변을 위해 총을 든다, 누군가는 신변이 사라지는 딜레마를 아홉 먹은 손녀가 물었다.
삶을, 세상을 지혜롭게 바라 보거라. 나의 대답은 너의 질문의 원천 발 밑도 미치지 못하구나, 결국 네가 질문에 답을 할 것이라 믿어 할 말이 이뿐이구나.
계절이 숨을 쉴 때
비로소 생의 이음새를 매만졌다
바람이 불어
콧 속 짙게 방문 하는 이의 농도가
오르고 내려
바람이 불어
나는 사랑을 하였는가
바람이 불어
한 철 이음새가 틀어진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분다
- 바람, 야츠하시 히로키. J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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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전에 써두었던 글이었는데 꼭 한 번 연재해보고 싶어 이렇게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을 정하지 아니하고 글을 썼으나 저 사진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이렇게 제형이글로 가지고 오게 되었네요. 금방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장르는 아닌 것 같으시겠지만 타임워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