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t, too Much 05
누나.
여태 살아오면서 그 소리가 이렇게 아찔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나. 벗어나고 싶은 상황에 반가운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내 정신은 끊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언가 잔뜩 오해하고 있는 듯한 눈빛. 석진이 앞에서는 잘 보여주지 않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아이 옆에는 석진이가 없다는 뜻이겠지. 어디다 형을 버려두고 온 거야.
"저기,"
"ㅇ,아아."
"맞네, 그때 샵에 왔던 사람."
"…."
"괜히 반갑네. 이거 떨어트리고 가셨어요. 이어폰이요."
아, 이어폰. 아무렇게나 엉켜서 뭉친 이어폰이 남자의 손에 올려져 있었다. 다 늘어난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와서 그랬나, 막 구겨넣은 이어폰이 주머니에 걸쳐져 있다 급하게 일어날 때 떨어진 모양이다. 이미 몸은 돌려졌고, 내게 말을 건 이유는 밝혀졌으니. 나는 쭈뼛거리며 손을 뻗어 이어폰을 집어왔다. 감사합니다. 이 근처 사시나 봐요. 남자는 웃으며 이어폰을 건네주고 고개를 숙여 짧게 인사를 건넸다. 참 사교성 좋은 남자다. 기억력도 좋고, 친절하기도 하고. 덕분에 나는 민낯까지 들켜가며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지만. 네, 이 근처 살아요. 가볍게 대답하니 또 보면 좋겠다며 남자는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내 뒤에 있는 태형이를 봐서 그런가 보다.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 아, 그냥 이걸로 끝인가. 나는 괜히 멋쩍어진 마음에 이어폰만 세게 잡았다 펴기를 반복하다 고개를 돌렸다. 너무 늦어버린 대답. 어, 태형아.
"다행이네. 뭐 하고 있나 했는데."
"뭘?"
"누나 바람피는 줄 알았거든."
"바람? 무슨 바람?"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니까 됐어. 고개를 끄덕인 태형이가 굳은 표정을 풀었다. 뒤늦게 들어보니 석진이는 돌아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간식 거리를 사 오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집으로 들어갈 테니 공원에 들러 나를 데리고 와 달라는 부탁을 덧붙이면서. 이왕이면 얘를 슈퍼로 보내고 본인이 좀 데리러 와 주지. 어색한 발걸음을 쫒아 태형이 옆에 섰다. 먹을 걸 사러 간다고 한 걸 보니, 오늘도 집에서 자고 가거나 하겠네. 석진이의 약속은 또 한 번 어겨진 듯했다.
무슨 바람이냐고 쫒아가 물으니 태형이는 대답이 없었다. 묵묵히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제 할 일만 하고 있을 뿐. 이럴 거면 그냥 데리러 오는 것도 싫다고 하지. 제 형의 부탁은 거절 못 하면서 단 둘이 있을 때는 이렇게 사람을 싫어하는 티를 심하게 내는 게 나로서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맥주도 급하게 마신 직후인데, 나는 이 어색한 공기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아 배만 부여잡으며 태형이 뒤를 따라 걸었다.
"인간적으로 누나는 생각을 좀 해야 한다고 생각해."
"…갑자기?"
"그 나이에 남녀가 동거하는 게 사귀는 게 아니면 뭔데."
"그거 나랑 진이가 맨날 아니라고 하는데."
"말만 아니지 할 건 다 하지 않았어?"
"…."
"그게 이기적인 거야, 누나. 연애는 안 하고 싶고, 옆에 형은 두고 싶고."
우리 형도 다른 여자 좀 만나 봐야 하는데. 들으라는 듯 크게 중얼거린 태형이의 목소리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정말 꾸준히도 미워한다. 원인을 몰라 답답했던 차였는데 이런 게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건가. 이 아이가 성인이 되고 머리가 커지더니 생각하는 게 아무래도 많아진 모양이었다. 제 형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불러온 화살. 이건 오지랖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눈엣가시인 건지. 아, 아닌가.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건가. 형제로서 이만큼은 표현할 수 있는 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가까운 형제 사이라면 말이지. 나는 태형이의 말에 할 말을 잃고 신호등 앞에 섰다. 그대라면 저 말을 듣고 행동을 어떻게 바꿔 보겠는가? 아니, 바꾸긴 할 것인가?
"근데, 애초에 연애가 아닌데 바람이라고 하는 건 잘못된 표현 아니야?"
"할 건 다 하면서 친구라고 포장하는 게 더 잘못된 표현 같은데."
"…."
"있잖아 누나."
"어어, 듣고 있어."
"그렇게 사는데,"
"형 말고 몰래 다른 남자라도 만나면 누나가 너무 쓰레기같지 않겠냐."
나 기겁했잖아. 서로 애인 있는데도 동거했었다는 소리 듣고.
난 지금도 누나가 형이랑 같이 사는 게 별로야.
신호등의 빨간불이 꺼졌다.
-
PM 11 : 54
거실의 시계가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방 안에서 태형이는 잠이 들었고, 나는 방으로 한 발자국도 들이지 않은 채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슈퍼에 들렀다던 석진이는 간만에 셋이서 술 한 잔 하자며 소주를 사들고 들어왔었다. 처음 성인이 되고 나서 술을 적게 배웠던지라, 금방 먹이고 재우려던 진이의 계획이 어느정도 맞아드는 타이밍이었다. 눈치가 나쁘진 않았구나. 나는 눈빛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둘이 있으면 서로를 불편해 한다는 걸 녀석도 알고 있으니 다행이었지. 에어컨의 찬바람에 술기운이 차츰 날아가고 있을 때쯤이었다. 방 문이 열리고, 피곤한 듯 보이는 석진이가 기지개를 펴며 나왔다.
"형제끼리 사이좋게 자지 왜."
"너 깨어있는 거 아는데 뭐하러. 아직 못 씻기도 했고."
"씻고 나와, 나는 여기서 잘게."
"소파 불편해."
"오늘은 침대가 더 불편해."
거기서 호랑이가 자고 있는데 어떻게 올라가서 자겠냐. 태연한 척 TV로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진이도 동생을 끝내 집에 들인 게 미안했던 모양인지 가만히 서서 머리를 긁적였다. 다음엔 재우는 것만큼은 좀 말려볼게. 나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실은 미안해할 일도 아닐 텐데 말이다. 본인은 분명 말렸을 테고, 단지 동생이 조금 더 고집이 세서 생긴 일일 게 분명하니까. 석진이는 한참 그렇게 방 문 앞에 서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괜찮으니까 나올 때는 좀 개운하게 나왔으면 좋겠다.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리는 동안 나는 여전히 TV에 시선을 꽂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원에서부터 신호등까지 이어지던 대화. 고등학교 때 가깝게 잘 지냈던 것은 단순히 친구로서의 모습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지금은 그게 아닌 것 같으니 내가 제 형을 붙잡고 있는 그림으로 보여 그렇게 싫은 티를 냈던 건가 싶어서. 그렇다면 거기에는 어떤 문제가 있기에 그 아이 혼자 이렇게 화를 내는 건가 싶어서. 고민과 분석을 거듭했던 것 같다.
쓰레기. 연인 관계에서 흔히 트러블이 나면 서로를 칭하기도 하는 단어. 무언가를 잘못했거나, 아니면 정말로 바람을 피워서 상처를 남겼거나 할 때 나오는 말이다. 그런가, 내가 하는 행동이 만약에 정말 서로를 가둬놓게 되는 방향이라면 멀리서 볼 때 그건 쓰레기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는 건가. 내가 이렇게 행동해서 진이에게 상처를 남긴 적이 있었을까. 이런 부분들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으니, 나는 정말로 형제의 생각이 같을지 궁금해졌다. 그렇잖은가, 만약 태형이 그 아이의 말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려면 말이다.
저 말이 성립하려면,
서로 좋아해야 하잖아.
"그래야 상처를 받고 쓰레기가 되지."
정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동거를 하고. 그러면서도 태연하게 다른 남자를 만나는 쓰레기가 되어가고 있는 거라면, 기꺼이 관계를 정리할 의향이 있다. 나는 내 마음을 확인해볼 수 있으니까. 석진이를 좋아하지만, 연인의 감정을 꽃피우고 싶지는 않다. 조금 특별한 친구로 남는다면 그 뿐. 그렇게 만족할 자신이 있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마음은 어떠려나.
물어보면, 안 어색해 질까.
욕실의 문이 열렸다.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거야?"
"어? 어, 잠깐 생각하다 보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그런 거."
가까이 오자 확 풍기는 샤워코롱 냄새가 코를 감쌌다. 젖은 머리 위로 올라간 수건. 소파 옆으로 앉아 제 손을 만지작거리는데 아직도 제 눈치를 보는 듯해 말없이 머리 위의 수건을 헤집어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TV소리는 잦아들었고, 손 대신 눈으로 맞춘 시선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거실에서 같이 잘래?"
"이불도 없는데, 무슨."
"오늘 태형이랑 무슨 얘기 했어?"
"응? 왜?"
"유난히 얘기해보려고 시도도 안 하길래. 둘이."
평소였으면 좀 친해져 보려고 네가 먼저 말 걸었을 텐데. 눈썰미도 좋지. 머리를 말리던 손을 내려 목에 수건을 둘러주자 그대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신경 쓰일 일이 아니라고 계속 신호를 주고 있는데도, 여전히 내 눈치를 보고 있다. 다 말리지도 않아서 젖은 머리와 눈이 선명한데. 고등학교 때부터 이런 눈빛에 약하다는 걸 본인은 알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결국 말로 해 줘야지. 이런 건.
"태형이가 날 많이 싫어하나 봐."
"한두 번도 아닌데 뭐. 애기 때부터 질투가 심해서 그래."
"나보고 쓰레기 같을 거래."
"…."
"너랑 같이 살고 있는데, 다른 남자 만나면."
"걔가 그래?"
"그래서 그 말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었어."
"…답은 나왔고?"
멍한 듯 보이는 눈빛이 살짝 긴장한 듯 보였다. 그러네. 이것도 궁금해지네. 지금 보여주는 그 눈빛은 뭐를 향한 긴장이야. 네 마음이 어떨 지에 대해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봐. 그것에 대한 긴장이야, 아니면. 단순히 그 뒷 이야기가 더 센 단어로 장식될까, 내가 상처를 받았나 싶어 긴장하고 있는 거야.
"수수께끼가 하나 안 풀려서 잘 모르겠어."
"그게 뭔데?"
말해도 될까. 어쩌면 방 안에서 태형이가 깨어있을 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이야기를 꺼내도 우리 관계는 괜찮을까. 난 정말 너와 마무리 지을 자신이 있는 걸까. 눈을 맞추자 덩달아 나까지 긴장이 되고 있었다.
"있잖아, 진아."
우리가 이대로 괜찮을 수 있을까.
"너 나 좋아해?"
Tat, too Much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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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로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정상적인 인물이 나온 듯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