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찬열] 보이지 않는 낙원
w. 린우
03:다시 만난 세계 (찬열 side)
이제 그만 놓아야 함을 알면서도 놓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너는 어린 시절의 나를 지배하고 있는 나의 세계 그 자체였으니까...
*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 소용 없게 되어버린 변명에 불과할지라도. 언제고 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 말을 너에게 꼭 해주고 싶었다. 나는 그의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그를 기다렸다고. 내가 너를 아주 많이 기다렸었다고. ─ 아니, 조금 더 솔직해져 볼까. 나는 너를 기다렸지만 너를 다시 보지 않기를 바랬다. 만약 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네가 나를 볼 수 없게 꼭꼭 숨어버려야지. 이런 모습으로는 너와 마주할 수 없으니까. 그것은 내 이기심이 만들어낸 지독한 모순이었다. 너를 미치도록 보고 싶어 하면서도 이런 모습은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그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 … 사실 그 끄트머리에 숨겨놓은 진짜 마음은 이렇게 더럽혀진 나라도 네가 붙잡고 놓지 말아주기를 바라는 ─
.
.
‘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
늘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현이 너는 어쩌면 내가 그렇게 사라져 버린 후 날 찾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언제고 너를 다시 만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상념의 끝에 남는 생각은 단 하나 뿐이었다. … 이런 모습으로는 너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지난 4년이라는 시간동안 찬은 단 한 번도 백현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만약에 내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면. 만약에 네가 나를 잊어버렸다면. 모든 것은 만약에 불과했다. 하지만 찬이 이런 모습으로 백현과 마주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결국 마주치고 말았지. 운명처럼. 찬은 그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입술만 달싹였다. 그 언젠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말해볼까. 내내 너를 기다렸다고. 비록 이런 모습이지만 내 마음만은 너를 바라보던 열 네살, 그 때처럼 변함없이 너 하나만 보고 있다고. ─ 웃겨. 그런 말,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언제부터였을까. 찬열이 더 이상 백현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던 것은. 네가 오지 않던 그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졌던 때? 아니면 제가 알지도 못하는 '어머니'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 진창으로 끌려왔던 때? 너를 기다리던 박찬열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했던 호스트 찬이 되었던 때부터였을까. 하기사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찬은 백현을 떠났고 무슨 말로 포장한다고 해도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너를 원망했었다. 왜 너는 오지 않는걸까. 왜? 내가 얼마나 너를 애타게 부르고 찾았는데. 내 손을 잡아줬잖아, 기다렸는데 어째서...? 그 다음부터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네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그래서 네가 오지 못하는 걸까. 그의 부재가 길어지자 언제나 찬열의 발끝을 맴돌고 있던 어둠이 조금씩 형태를 키워 제 숨통을 조르기 시작했다. 하루, 일주일, 한달 … 일년.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오지 않던 너. 그리고 찬열은 이곳으로 끌려왔다. 그 순간조차 백현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찬열은 기다렸다. 제가 이곳에 있는지 그가 알 리도 없는데 그가 자신을 찾고 있을 거라는 이유 없는 믿음. 그것은 차라리 맹신에 가까웠다. 손님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어두운 창고에 갇혀 몇날 며칠을 굶어야 했고 개처럼 맞아도 봤다. 그렇게 찬열은 서서히 말라 비틀어진 꽃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길고 긴 기다림의 끝에서 찬열은 인정했다. ─ 네가 나를 잊어버렸다고. 그리고 그때부터 찬열은 그를 놓았다. 아니, 놓은 척 해야만 했다. 네가 나를 찾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죽을 만큼 힘들었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죽지 못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죽으면 너를 볼 수 없으니까. 그렇게 쉽게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너를 미워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저 네가 보고 싶고 그립고 … 끝내 전하지 못할 그 진득한 감정들의 끝에 남는 이름은 그저 네 이름 세 자, 변백현. 그만큼 박찬열의 모든 감정은 단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그 한 사람이 찬열을 잊었음을 인정하던 그 순간, 찬열의 세계는 잿빛으로 변했다. 찬열에게는 그가 세계 그 자체였고 전부였으니까.
‘ 나를 잊은 게 아니었어. ’
그래서 찬열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마치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이 그러했다. 잊혀진 게 아니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쁘고, 크나큰 기쁨에 목이 메어 말을 채 잊지 못할 만큼. 변한 듯 보여도 변하지 않는 자신의 세계와 마주함으로 인해 찬열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걷다가 처음으로 빛을 발견한 탐험가가 된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가 오아시스를 만난 여행자가 된 것처럼 환희에 젖어 몸을 떨었다. 결국 이런 모습으로는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그와 마주친 이 순간, 그가 자신을 잊은 것이 아니었다는 그 사실이 순수하게 기뻤다. 아아, 이건 꿈일까. 내가 너무 간절히 너를 바라고 바래서 하늘이 단 한 번 내게 허락한 환상일까. 스치는 바람에도 네 모습이 흐려질 것만 같아서 기뻐하면서도 그에게 채 다가가지 못하던 찬의 마음 속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백현은 찬의 마른 어깨를 감싸고 있던 사내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툭, 치워버린다. 처음 만난 그 날처럼 부드럽게 찬의 손을 감싸쥔 채 찬에게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속삭이듯 물어왔다. 그 물음에 찬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네가 두려워서? 아니. 그럴 리 없잖아. 기뻐서. 네가 환상이 아니라 실재라는 사실이 기뻐. 네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라는 것이 믿기지를 않아. 내가 아는 너는 다정하지. 언제나 그래. 사실은 네가 너를 떠났던 나를 용서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나는 지금 이 순간 너의 다정함이 한없이 기쁘다. 그래, 설령 1초 후에 깨어질 찰나의 행복이라도 말이야.
-
밥먹고 왔어요 :D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