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닮은 너에게
01. 선한 오지랖
“연주씨, 오늘 미팅 몇 시랬지?”
“세 시에 회의실에서요.”
“진짜 괜찮겠어? 나 때문이면 안 그래도 되는데.”
“제가 가고 싶어서 그래요. 경험도 쌓고. 막낸데 도울 수 있는 건 다 도와야죠.”
“하여튼, 우리 막내 예뻐 죽겠어. 오늘 나 대신 수고 좀 해줘~”
“네. 선배 걱정 마요. 저 진짜 괜찮으니까.”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고등학교 시절도 벌써 9년 전이던가. 나는 결국 PD의 꿈을 이뤘다. 여전히 꿈이라는 단어가 낯설긴 하지만, 그래도 PD가 되는 게 나의 목표이긴 했으니 꿈을 이룬 셈 치기로 했다. 아빠가 바람이 우리 가족을 떠난 뒤, 나는 암묵적으로 우리 집의 가장이 되었다. 우리 가족이라고 해 봐야 나와 엄마뿐이지만, 엄마는 그 일 이후 나에게 전적으로 모든 걸 의지했다. 그리고 물론, 나는 그러한 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채 어른이 되지도 않은 나에게 아빠의 빈자리를 메우길 기대하는 엄마가 미웠고, 싫었다. 그래서 얼른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야 했다. 취직을 해야 했고, 내가 몸담을 직업은 아주 바쁜 직업이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PD가 되었고, 바라던 대로 정말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사실은 남의 업무까지 대신 봐 주며 바쁘게 살 필요까지는 없었다. 다만, 내가 그러기를 자처했을 뿐. 학창시절에는 대학으로, 대학에 다닐 땐 취업으로, 취업에 성공하고 난 지금은 결혼으로. 나를 향한 엄마의 기대는 낮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취직만 하면 형편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다. 그래서 스스로 쉬는 날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운 좋게도 오늘 선배 한 명이 개인 사정 때문에 미팅에 나오지 못하게 됐고, 집에 들어갈 바에야 회사에 남기를 선호하는 내가 당연하게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번 추석에 방영되는 파일럿 프로그램 출연자와의 미팅이랬나.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재미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어, 오셨네. 우리 프로그램 최종병기, 황민현 작가님.”
“안녕하세요. 작가 황민현입니다.”
다른 출연자들은 하루에 모여 미팅 날짜를 잡더니, 오늘은 황 작가 단독 미팅인가 보다. 뭐, 이해가 안 가지는 않는 게, 추리 소설을 잘 읽지 않는 나도 그의 소설을 다 읽었을 만큼 유명한 데다, 실제로 보니 인물도 훤칠하고. 출연만 한다면 이 사람 때문에 방송을 챙겨 보는 시청자들이 꽤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작가일 뿐인데 풍겨오는 연예인 포스란. 인기 작가를 실제로 보니 조금 신기하긴 했다.
“황 작가님 다 알지? 섭외하느라 애 좀 먹었잖아~”
“제가 방송 출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다들 작가님이 나오시겠다고 하기만을 기다렸어요. 출연 결정 고마워요.”
“불러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그렇게 한참 동안 총괄 PD님의 끊이지 않는 생색이 이어졌다. 황 작가를 실제로 보게 되어 신기했던 것도 잠시, 괜히 오겠다고 했나 싶을 정도로 지루한 미팅이 시작되었다. 나만 이런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황 작가가 별 시덥지 않은 농담만 던져도 방실방실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리 선배라지만 이런 모습까지 존경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 참, 잘생긴 사람 좋아하는 티 좀 그만 냅시다.
“그럼 작가님은 올해 서른인가?”
“서른하나요. 여기서 제가 막내인가요?”
“아닐걸? 우리 막내 피디가 몇 살이지?”
멍하니 시계만 보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는데, 갑자기 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역시, 오늘은 그냥 집에 갈 그랬나.
“아... 저는 스물여덟이요.”
“그럼 우리 연주 피디가 막내네. 연주 피디도 황 작가님 책 다 읽어봤지?”
갑자기 불똥이 왜 나에게 튀는지는 모르겠지만 막내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대답밖에 없었다. 오늘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나 그 책 재밌게 읽지도 않았단 말이야.
“네? 네. 읽긴 읽었죠.”
“성함이 연주씨라고요? 어땠는지 물어봐도 돼요?”
오지랖 넓은 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장 피디님에 이어 이번에는 황 작가 본인이 입을 뗐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몇 년간의 사회생활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솔직해서 좋았던 적은 안타깝게도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재밌게...읽었어요. 제가 워낙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인기 엄청 많으시잖아요. 다 재미있으니 그런 거겠죠.”
이럴 땐 스스로가 참 감탄스럽다. 내가 생각해도 나 정말 뻔뻔하게 거짓말 잘 하는 것 같다니까.
“그런 뻔한 답변 말고 막내 피디님만 할 수 있는 평가를 바란 거였는데. 재미없다고 해도 좋으니까 솔직하게 평가해 주세요. 현장에서 직접 제 소설을 평가받는 건 처음이라 떨리네요.”
이해할 수 없다. 남에게 평가받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니. 물론 직업이 소설 작가인 만큼 대중의 반응과 평가가 중요하긴 하겠지만, 재밌었다고 답한 내 말에 굳이 ‘솔직하게’라는 말까지 붙여가며 재평가를 요구하는 건 또 뭐람. 이왕 이렇게 된 거, 정말 내가 느낀 바를 말해주기로 했다. 본인 입으로 그랬잖아. 솔직하게 평가해 달라고.
Various Artists - OK Love Wawoo
“저는 솔직히 조금 뻔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싸늘해진 분위기와 심각한 표정의 선배들. 딱 봐도 힘들게 섭외한 게스트를 놓칠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내 알 바는 아니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작가의 표정을 보아하니 딱히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도 않고. 뻔하다는 비판은 언제나 황 작가를 따라다니는 꼬리표였다. 그러니 본인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겠지.
“작가님 죄송해요. 저희 막내 피디가 원래 좀 직설적이라-”
“아, 괜찮아요. 안 그래도 뻔하다는 이야기 자주 나오잖아요. 막내 피디님은 어디가 뻔하게 느껴지셨는데요?”
황 작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끈질기고 집요한 사람이었다. 역시나 나의 쓸데없는 오기가 문제지, 또. 지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 물어보나 한 번 해보자, 이건가.
“결국엔 사랑의 힘으로 모든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간다는 점이요. 이런 글들을 읽을 때면 항상 궁금해지더라고요. 왜 모든 소설은 사랑 없이 완성되지 않는지. 저는 사랑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생각 안 하거든요. 그런 게 있을 거라 믿지도 않고.”
“연주씨 그만해...”
“아니요, 계속 말씀하세요. 저 이런 이야기 듣는 거 좋아해요. 알아야 다음 집필 때 반영을 하잖아요. 좋은데요 왜.”
“하...”
선배 스태프들의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그렇다고 그만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할 수 없었고,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도 그건 마찬가지인 것 같으니.
“게다가 매 사건마다 교통사고 나는 것도요. 개인적으로 궁금했어요 이건. 왜 많고 많은 사고 중에 매번 차 사고만 나는지요. 그리고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은 언제나 주인공 편에 있던 조력자잖아요. 이것도 범인을 추리해 나가는데 일종의 힌트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찾아온 정적. 이번에는 웬일인지 황 작가도 쉽게 대답을 잇지 못했다. 괜히 이긴 것 같은 기분에 쾌감이 들면서도 어딘가 불안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우선 지금 가장 두려운 건, 입사 이후로도 아등바등 노력해 들어온 이 팀에서 혀 한 번 잘못 휘두른 벌로 하루아침에 쫓겨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아... 그 부분을 뻔하다고 느끼셨을 수도 있으셨겠네요. 너무 저희끼리만 말한 것 같아서 눈치 보이는데요? 피디님, 또 녹화 관련해서 저한테 당부하실 말씀 없으세요?”
어째 자꾸만 답변을 회피하는 느낌이다. 물어봤으면 대답을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왜 자꾸만 소설 속에 같은 사고를 등장시키는지 정말 궁금했는데. 아무튼, 황 작가의 말에 선배들의 얼굴이 다시 밝아지는 걸 보니 마음이 한시름 가벼워지긴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내가 정말 직장을 잃게 될지.
***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황 작가님, 다음 주 첫 녹화 날 봬요.”
“네. 첫 방송 출연이라 걱정이 많은데, 그때까지 떨지 않고 잘 할 수 있도록 잘 준비해 오겠습니다. 아, 그리고 막내 피디님. 연주씨...맞죠?”
길고 불편했던 미팅이 끝나 기뻐하고 있었는데, 왜 또 내 이름을 부르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지만,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네. 맞아요.”
“아까 소설평 잘 들었어요.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은데, 궁금하다고 하신 부분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틈틈이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아마 우리 프로그램이 3주짜리 파일럿이라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다. 정규 편성이 되어야 자주 보든 말든 할 거 아닌가. 그보다 더 먼저, 내가 당장 오늘 팀에서 제명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저 작가님 책 정말 좋아하고 재미있게 읽었는데, 작가님께서 뻔한 평은 듣고 싶지 않아 하시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씀드린 거니까.”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거짓말을 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아까도 느꼈지만, 어떨 때 보면 나 정말 무서운 사람인 것 같다니까.
“그럼 정말 철수하겠습니다! 다들 수고 많았고, 연주씨만 잠깐 내 자리로 와.”
큰일났다. 나 정말 이대로 방출되는 건가.
***
“하... 연주씨 오늘 되게 위험했던 거 알지?”
“...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언제부터 말을 그렇게 잘 하는 사람이었어? 나 깜짝 놀랐잖아. 하필 이럴 때만 말을 너무 잘해서.”
혼을 낼 거면 그냥 혼만 낼 것이지, 꼭 저렇게 비꼬아 말한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가장 기분 나쁘게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고 내뱉는 건 부장님들 종특인가.
“...죄송합니다.”
“죄송한 걸 알았으면 다음부터 조심해. 솔직하게 말하란다고 정말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
“저... 안 잘리나요?”
“왜, 잘리고 싶어? 잘라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 빼 버리고 싶은데, 황 작가를 봐서 참는 거야. 참나, 네가 뭐 예쁘다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 작가가 왜? 뭔데 내가 그 사람 덕에 안 잘리고 남아있게 되었다는 거야. 미팅 중간에 나가서 막내 피디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말라고 부탁이라도 한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랑 가까운 사이인 것도 아닌데.
“아무튼 그런 줄 알고 앞으로 잘 해. 아 맞다. 프로그램 관련해서 연주씨한테 맡길 자료가 있었는데 여기 어디...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자료만 얼른 찾아올 테니까.”
아까 다른 선배들이 눈치 줄 때 자기는 괜찮다며 내 입을 막으려는 선배들을 말린 걸 말하는 거겠지, 뭐. 부장 피디님이 나에게 줄 자료를 찾는다며 잠시 나간 사이,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부장님의 핸드폰에 작은 진동과 함께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니, 이 선배는 대화 내용이 잠금화면에 다 보이게...어? 황 작가잖아?
[황민현 작가 : 제 말 알아들으셨죠? 오후 5 : 47]
[황민현 작가 : 저 막내 피디님 때문에 출연하기로 마음 굳힌 거예요. 오후 5 : 47]
[황민현 작가 : 그 피디님 나가시면 저 프로그램 안 합니다. 오후 5 : 48]
+ 오오 황 작가 뭐야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