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닮은 너에게
02. 나의 세상에 사랑이란 없다
그날 나는 팀에서 방출되지 않았고, 첫 녹화가 잡힌 오늘까지도 특별한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잘 버티는 중인 모양이다. 사실 황 작가가 부장님께 보낸 메시지를 본 이후로 그가 나를 감싸고 돈 이유에 대한 추측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가장 그럴싸한 이유를 말해보자면 황 작가의 소설을 뻔하다 평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이번 프로그램에서 빼 버리겠다는 말을 어디선가 엿들은 황 작가가 미안한 마음에 그러지 말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내가 잘리든 말든 그의 알 바가 아닌 건 변함없는 일이었다. 내가 정말 궁금한 건, 일개 패널에 불과한 황 작가가 나조차 대하기 어려워하는 부장 피디님께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강한 어조의 메시지를 남겼냐는 것이었다. 내가 없으면 방송 출연을 하지 않겠다고? 다르게 말하면 나 때문에 출연을 결정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대체 왜? 설마 내가 자기 소설을 비판한 게 얄미워서 두고두고 괴롭히려고? 내가 그의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에 대해 과도한 궁금증을 보였던 탓에 황 작가의 첫인상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부려먹을 재미로 방송 출연을 결정했을 만큼 속이 좁은 사람 같지도 않아 보였는데. 누누이 말했듯이 누군가에게 쓸데없는 관심을 가지는 건 내 취미가 아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대체 저 사람이 누구고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기에 나에게 저런 호의를 베푼 것인지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황 작가 덕에 일자리를 잃지 않고 잘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닌가. 내 입장에서는 고마운 호의였다. 자신의 책을 읽고는 뻔하다고 말하는 당돌한 독자의 일자리를 지켜주려는 것이 과연 황 작가가 의도한 바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안녕하세요.”
“어, 황 작가님 일찍 오셨네요?”
“첫 녹화인데,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여유있게 출발했어요.”
“역시, 센스 있으시네. 연주씨 뭐해, 작가님 오셨잖아.”
막내 노릇을 하느라 하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잔심부름을 마치고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굳이 구석에 있는 나를 불러 황 작가에게 인사를 시키려는 부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내가 잘못한 것도 있고, 퇴출당하지 않게 해 줘서 고마운 것도 있으니, 인사 따위를 건네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편집팀 막내 이연주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연주씨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황민현입니다.”
“저... 미팅 날 작가님 소설을 함부로 평가한 건 죄송했습니다. 아마 촬영분 편집을 제가 하게 될 것 같은데 특별히 신경 써서 잘 해 드릴게요.”
아무래도 그날 일은 사과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사과의 말을 건네니 황 작가가 옆에 서 있던 부장 피디님을 한 번 쳐다본 뒤 말을 이어갔다. 팀원들 앞에서는 세상 가장 강하시던 부장님이 황 작가의 눈빛에 시선을 피한 건 또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없었다.
“미팅 끝나고 부장님께 엄청 혼나셨나 봐요.”
황 작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장님이 황급히 그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제가 분명 괜찮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아뇨. 안 혼났어요. 그냥 저 혼자 마음에 걸려서.”
눈치껏 대답했다기보다는 옆에서 자꾸만 눈치를 주는 부장님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내뱉은 대답이었다. 마침 녹화가 곧 시작되니 준비해달라는 메인 피디님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내가 있어야 할 위치로 걸음을 옮겼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나는 팀에 잘 남아있고, 부장님도, 황 작가도 더 이상 나에게 골치 아픈 질문을 하지 않고 있으니.
***
“네, 황 작가님은 여기 앉으시면 되고, 이 작곡가님은 여기요. 네네. 박사님은,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MC를 포함한 다섯 명의 패널들이 모두 녹화장에 들어온 뒤 메인 피디님께서 슬레이트를 들고는 카메라 옆에 자리를 잡으셨다. 그렇게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떨리는 첫 녹화가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우리 프로그램이 잘 될 거라는 기대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선배들에게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니 10대와 20대들의 사연을 받아 패널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그런 내용이란다. 너무 부끄러워 제목도 아직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프로그램명은 ‘청춘을 묻다’이고. 내부 회의에서는 아마 좋은 의견이라 생각해 채택한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디오를 틀면 2부 시작쯤에 꼭 한 번씩 등장할 법한 진부한 소재에다가, 정작 청춘들은 별로 관심도 가지지 않을 것 같은 뻔한 제목에 엄습하는 불안감을 숨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프로그램 이름을 이렇게 성의 없게 지을 거면 차라리 패널에 있는 작가에게 작명을 맡기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MC를 제외한 네 명의 패널은 각각 의사, 작가, 작곡가, 그리고 기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내내 나를 신경 쓰이게 한 황 작가가 그중 한 명이었고.
녹화가 반쯤 진행된 상황에서 간이 중간점검을 진행해보자면, 정말 형편없기 짝이 없었다. 이 상태라면 정규 편성은 무슨, 파일럿으로 예정된 3주조차 채우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사라는 사람은 자기 자랑하기 바빴고, 작곡가는 신곡을 홍보하느라, 기자는 대학생들의 고민에 대답하기는커녕, 본인의 정치색을 드러내며 분위기를 한없이 무겁게 이끄는 데 기막힌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사실 그동안은 스태프들이 황 작가를 왜 그렇게 특별하게 대우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오늘 다른 패널들의 상태를 보아하니 단박에 이해가 가는 듯했다. 네 명의 패널 중 유일하게 프로그램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역시나 황 작가였다. 넷 중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각 사연에 공감하며 적절한 조언을 내놓는 것도 황 작가뿐이었고. 우리 프로그램의 최종병기라는 선배들의 말을 떠올리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최종병기라는 말도 부족했다. 황 작가가 다 죽어가는 프로그램에 심폐소생을 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즘 애들 말로 하면 황 작가가 프로그램을 ‘하드캐리’하는 꼴이었다. 사람을 홀리는 그의 언어 구사력에 혀를 내두르고 있는데, 옆에서 현장을 지켜보던 여자 선배 하나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황 작가 말 정말 잘한다. 그지, 연주씨.”
“그러니까요. 혼자 다 하시네.”
“그날 보니까 저렇게 말 잘하는 사람한테 연주씨도 지지 않고 되게 잘 받아치던데?”
역시,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많다.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 문제다. 정말 큰 문제. 대체 그날 일을 가지고 몇 명이 며칠을 우려먹을 셈인지. 이젠 놀랍지도 않다. 몇 마디 변명으로 무마하면 금방 잊힐 일이니까.
“에이, 선배는 또 왜 그래요. 만나는 사람마다 다 그 얘기야. 이제 그렇게 무례한 짓 안 하기로 반성했고, 작가님께도 정말 죄송한 마음 가지고 있으니까-”
“연주씨,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어째 이번에는 그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도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연주씨 정말 사랑을 안 믿어? 입사 초기만 해도 남자친구 있었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되긴 했지만.”
나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심지어 나에 대해 어설프게 알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하도 사랑을 안 한 지 오래돼서. 내가 정말 사랑이라는 걸 했었는지도 가물가물해요.”
“그지? 사랑을 믿지 않게 된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 뭐 이런 건 없지? 난 또. 연주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해서.”
무슨 일이 있었으면 뭘 어떻게 할 건데요 선배.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의 전부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대단한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남들에게 이야기하며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거 없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선배.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연주씨 똑부러진 사람이니까, 언젠가 좋은 사람 만날 거야. 녹화 끝나면 편집실로 와. 편집 가이드라인 같이 잡게.”
“네. 이따 봬요.”
“아 맞다 연주씨,”
“네?”
“작가님께 고맙다고 했어?”
“...제가 왜요?”
“미팅 중간에 잠깐 쉬는 시간 있었잖아. 그때 부장이 황 작가랑 복도에서 이야기하는 거 들었는데, 너 황 작가 아니면 나랑 일 계속 못 할 뻔했어.”
간신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그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금 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왜...요?”
“알잖아, 부장 성격 더러운 거. 부장이 막 너 대신 사과하겠다고 난리 치면서 우리 막내 피디가 거슬리면 빼 주겠다고 황 작가한테 다 맞추겠다고 그러더라고. 보다시피 우리 프로그램 살릴 사람이 황 작가밖에 없잖아.”
“...그래서요?”
“그러니까 황 작가가 막내 작가님 잘못 없다고 다 자기가 물어봐서 대답한 거 아니냐고 그랬지 뭐.”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그럼 그렇지. 그 사람이 나를 계속 보고 싶어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잖아.
“근데 황 작가가 그렇게 말하는 거 보고도 부장이 너 빼겠다고 그러는 거 있지. 딱 봐도 그 작가 당황한 거 보이는데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계속 똑같은 소리 반복하는 거야. 다른 피디로 대체하겠다느니 너를 황 작가 앞에 나타나지 않게 해주겠다느니, 그 사람 또라이인 건 알고 있었지만 동료까지 팔아 먹어가며 저러고 싶을까 하는 생각에 치가 떨렸다니까. 연주씨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마. 그 사람 성격이 원래 그런 걸 어떡해.”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선배 말대로 부장 성격 이상한 건 몇 년째 그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나도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부장이 그 난리를 쳤는데도 내가 잘리지 않은 이유는 그럼 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저 왜 아직도 안 나가고 여기 있는 거예요? 부장님 성격에...”
“내가 진짜 놀랐던 건 여기서부터야. 부장이 계속 너 까니까 능글맞게 웃으며 받아치던 황 작가가 갑자기 딱 정색하면서 그만하라고 그러는 거야. 완전 다른 사람처럼. 웃음기 없는 표정 지으니까 되게 무섭더라고. 그러니까 부장도 놀라서 떨떠름하게 서 있는데, 그 작가가 너 없으면 프로그램 안 하겠다고 그러더라. 사실 그날 미팅도 대충 분위기 보다가 출연 고사한다는 말 하러 왔던 건데 연주씨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나 뭐라나. 완전 세게 나오는 거야. 연주씨 팀에서 빼면 진짜 무슨 일 하나 벌일 사람처럼. 둘이 뭐 원래 알던 사이야?”
“네? 아니요 전혀...”
“아무튼, 연주씨 황 작가 덕에 살았어, 진짜. 표정 보니까 완전 처음 듣는구나? 이따 방송 끝나면 먼저 가서 고맙다고 꼭 말해. 아까도 보니까 부장 황 작가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하더라.”
“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선배.”
혹시 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귀 기울여 들은 선배의 말은 나를 더욱 더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체 왜 그런 거야, 나한테. 그저 성격 더러운 부장 아래에서 고생하는 내가 불쌍해 보였던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내 편을 들어줄 이유가 없는데.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려보려 해도 별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작가라고 하면 엉뚱한 면도 많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엔 힘든 구석도 있다니 그냥 그런 것쯤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물론 감사 인사는 잊지 말아야겠지만.
***
“자, 첫 녹화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시작이 좋네요, 아주. 앞으로 승승장구해서 정규 편성될 때까지 열심히 한번 해 봅시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솔직히 메인 피디님도 알고 계실 거다. 시작이 전혀 좋지 않다는 것을.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많았지만 안 그래도 녹화 내내 심란하셨을 텐데 괜히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조용히 세트장 밖으로 나왔다. 아 참. 황 작가한테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어디 계신 거지.
“어? 막내 피디님이다.”
“아, 깜짝이야.”
녹화가 끝난 뒤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기에도 바쁠 텐데 언제 밖으로 나온 건지, 나를 알아보고는 반갑게 웃는 황 작가를 보고는 하려던 말을 까먹고 제자리에 가만히 굳어버렸다. 막상 또 그를 마주하니 그간 붙잡아왔던 이성이 무너지고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질문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아, 저 마침 작가님 찾고 있었는데.”
“네? 저를 찾으셨다고요? 왜요?”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요.”
“뭔데요? 편하게 물어봐요.”
“작가님이 부장님께 저 프로그램에서 자르지 말라고 하셨다면서요? 왜 그러신 거예요? 저 없으면 출연 안 하시겠다고 막 그러셨다는데.”
“아... 막 그러진 않았고, 그냥 피디님 억울하잖아요. 제 질문에 대답한 것뿐인데 하루아침에 팀에서 빠지라고 해 버리면.”
“그렇죠? 난 또.”
“난 또? 피디님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 거예요.”
“네? 아니 그냥...”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내가 시선을 피하고는 대답을 얼버무리니 황 작가가 목소리를 가다듬는 척하며 슬쩍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끝내 그의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다. 사실 나조차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직접 들었듯 그저 호의였을 뿐이다. 그런데 왜? 그렇다고 내가 다른 것을 기대한 건 절대 아니다. 그럴 리 없잖아, 내가. 그렇다면 왜. 황 작가가 부장님께 내가 아니면 출연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를 이렇게까지 궁금해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가끔 나도 내 마음을 몰라 답답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러했다. 황 작가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눈만 끔뻑대는 나를 보며 여전히 킥킥대고 있는 듯했다.
“뭘 그렇게 고민해요. 이거 물어보려고 저 찾으신 거예요?”
“아... 네. 작가님 덕에 제가 잘린 게 아니라고 선배 피디님이 그러시길래, 감사 인사도 드릴 겸 해서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 여기서 잘리면 이제 갈 데도 없는데.”
“정말 감사한 사람 맞아요? 누가 시켜서 억지로 온 것 같은데.”
“아뇨 그럴 리가요. 정말이에요. 정말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편집 잘 해주시겠다고요?”
“...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방송은 뭐 피디님 믿고 가는 게 당연하고요, 그렇게 감사하면 저 밥이나 한 번 사주세요. 피디님 시간 괜찮으실 때.”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소설에 대해 평가받는 걸 좋아한다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집요하게 캐묻던 그 날부터 부장으로부터 나의 해고를 막아낸 것과 뜬금없이 밥을 사달라는 이 사람은 나에게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하는 순간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 끼어들게 될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큰 위험을 불러올지도.
“뭐, 알겠어요.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어쨌든 감사드리고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저는 피디님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무 때나 편하게 연락 주세요.”
“근데 제 번호 아세요? 저는 프로그램 준비하면서 받았는데 작가님은 제 번호 없으실 텐데. 번호 찍어 드릴게요. 핸드폰 이리-”
“아, 피디님 번호 있어요, 저.”
“네? 어떻게...”
“어쩌다 보니 생겼어요, 번호가. 편집 대충 하시고 얼른 가서 쉬세요. 그럼 곧 뵐게요.”
출연자들한테도 스태프들의 번호가 전달되었던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하나 더 늘었다. 자꾸만 궁금증이 늘어가면 곤란한데. 편집실에 틀어박혀 아까 직접 본 충격적인 아무 말 대잔치의 향연을 고급스러워 보이게 편집하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살릴 수 있는 건 역시 황 작가의 멘트 뿐이었고. 마지막에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그가 자신의 직업과 글에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의 말과는 대조적으로, 도망치듯 찾아온 직장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울며 겨자 먹기로 영상을 편집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깨나 초라해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또한 내가 선택한 일이었으므로. 갑자기 밀려드는 우울한 생각들에 의자 등받이에 몸을 의지해 멍하니 벽을 쳐다보고 있으니 녹화 중에 선배가 건넨 말이 천장을 맴돌다 다시 내 귀로 들어왔다.
로이킴 - 파도
― 연주씨 정말 사랑을 안 믿어? 입사 초기만 해도 남자친구 있었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되긴 했지만.
―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하도 사랑을 안 한 지 오래돼서. 내가 정말 사랑이라는 걸 했었는지도 가물가물해요.
― 그지? 사랑을 믿지 않게 된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 뭐 이런 건 없지? 난 또. 연주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해서.
정말 바보 같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냥 말이 그렇다고 하기엔 사랑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의 믿음이 너무 깊었다. 이마에 팔을 올린 채 눈을 감고 있으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첫 연애의 기억이 머릿속에서부터 하나둘씩 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빠의 바람을 경험한 이후 사랑이라는 감정에 잔뜩 겁에 질려있던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쏟게 된 그 남자에게서 사랑이라는 건 내 세상에 없다는 믿음을 다시금 확인받았던 그 날의 기억이.
― 괜찮아. 너무 긴장하진 말고.
― ...아, 오빠 잠깐만. 나... 나 못하겠어.
― 어? 연주야 그게 무슨...
― 미안해. 나 너무 겁이 나. 아직, 아직은...
― 야, 우리가 만난 지 반년이 넘었는데 아직 한 번도 못 잔 게 말이 되냐? 근데 오늘도 안 되겠다고? 너는 무슨... 내가 호구로 보여?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힘껏 잡아당긴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 오빠...
― 왜. 생각이 바뀌었어? 다시 할까?
하룻밤 재미를 위한 가면극이 막을 내림과 동시에 사랑에 대한 신뢰는 저 아래로 추락하고,
― ...우리가 하고 있는 거, 사랑 맞아?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던 상처가 불쑥 튀어나와 내 심장을 마구 찔러댄다.
― 또 그 소리네. 나도 이제 너 받아주기 힘들다. 하기 싫으면 옷 입고 나와. 집 가게.
갈기갈기 찢긴 심장에서 도망쳐 나온 사랑이라는 녀석은,
― 그렇게 힘들면 받아줄 필요 없어.
― ...뭐?
그렇게,
― 우리 그만하자.
나에게서 영영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인간을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일부가 되는 것
그리고는 사라지는 것
- 박가람, 젠가
+ 노파심에 하는 재공지!
1. BGM 수동 재생하면 좋음
2. 암호닉 신청은 댓글에서
3. 제가 독자님들을 많이 사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