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아니, 눈이 뜨였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호원은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아침이라기엔 이르고 새벽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5시 30분. 이도 저도 아닌 시간에 호원은 다시 눈을 붙이려 노력했지만 이미 잠은 다 달아난 뒤였다. 결국 호원은 이리저리 뒤척이다 다시 일어났고 지끈대는 머리를 붙잡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순간 발치에 느껴지는 싸한 기운에 흠칫 놀라 아래를 바라보니 그곳에는 동우가 잠들어 있었다.
"…!"
악 시발, 깜짝이야…! 깜짝 놀란 호원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놀라 헉헉대는데 동우는 아무 것도 모르는 듯 태평하게 자고 있다. 그 어린애같은 얼굴을 보니 잠도 다 달아나 호원은 결국 웃어버렸다. 발을 물렸다. 닿지 않는다는 걸 앎에도 왠지 밟으면 안 될 것 같아 호원은 잠시 가만히 동우를 바라보다 동우를 돌아 방 밖으로 나섰다. 피부에 닿아오는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 호원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호원은 잠시 몸을 풀다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왔다. 호원의 손에는 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아직은 쌀쌀할 날씨에 호원은 옷을 입고 가볍게 씻은 후 집 밖으로 나섰다. 동쪽 하늘 끝에선 발간 해가 어스름을 조금씩 밀어내며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감색이었던 하늘은 얇은 천을 하나씩 걷어내듯 조금씩, 조금씩 색이 옅어진다.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던 세상이 조금씩 제 몸을 드러내며 감추던 색을 밝힌다. 세상이 환해진다.
공원에는 몇몇 사람들이 조용히 운동하고 있었다. 호원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폐부 깊숙히 채워지는 선선한 공기에 호원은 슬쩍 웃으며 다시 숨을 내뱉었다. 개운하다. 호원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는 운동화 끈을 다시 묶고 달리기 시작했다. 항상 아침마다 도는 똑같은 코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오늘은 지금까지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이 든다. 호원은 알 수 없는 개운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발바닥에 닿는 땅이 저를 밀어올리는 듯 발이 튕기듯 올라온다. 몸이 가볍다. 운동을 하며 이렇게까지 개운했던 적이 있었던가. 결국 호원은 평소보다 두 바퀴를 더 뛰었다.
그리고, 호원이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샤워하고 머리를 말리고 방문을 연 그 순간까지, 동우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W. 김새벽
"원래 그렇게 많이 자요?"
호원의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에 동우는 멋쩍게 웃었다. 쟤는 잠도 안 자나 봐…. 호원에게서 아침 나뭇잎 냄새가 어렴풋이 풍기는 걸로 보아 호원은 아침에 나갔다 온 것 같았다. 게다가 머리 끝이 아직 촉촉한 걸로 보니 씻은지 얼마 안 된 것 같고. 원채 잠이 많았던 동우는 그런 호원이 신기하도 하고, 또 완전히 제가 호원에게 잠꾸러기로 인식이 된 것 같아 억울하기도 했지만 입을 다물고 그저 웃었다. 동우라고 예전부터 이렇게 잠이 많았으랴. 동우가 살아있을 적에만 해도 그는 수탉이 아침을 깨울 때쯤 일어나 주변에 촛불이 하나 둘 꺼지면 그제서야 저도 잠에 들곤 했었다. 동우의 이웃들이 모두 입을 모아 동우더러 어떻게 그리 부지런히 사느냐 물었을 정도로 성실하게 행동하던 그였다. 그러나 죽고 나서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기약 없는 약속. 벗어날 수 없는 이 좁은 집에서 동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이 환영처럼 그저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동우는 결국 잠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늘이 붉게 물들 때면 눈을 감았다. 저 아득한 하늘 끝에서 해가 떠오를 때면 눈을 떴다. 그래도 무료했다. 그러면 동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잠만 잤다. 하루 종일 잠만 잘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귀신도 잠을 자는구나. 신기하네."
"별 게 다 신기하대. 지금 몇 시야?"
"8시. 왜요?"
"그럼 커튼 좀 걷자. 왜 이렇게 어두컴컴하게 있어, 답답하게."
빨리 열어 줘. 햇빛 좀 보자. 동우의 재촉에도 호원은 빤히 동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뭐지? 동우도 호원을 가만히 바라봤다. 왜.
"햇빛 닿아도 돼요? 막, 햇빛 닿고 그러면 사라지는 거 아닌가 몰라."
어리숙한 호원의 질문에 동우는 귀여움 반, 한심함 반쯤 담아 호원에게 웃었다. 너는 그럼 내가 그 오랜 시간을 여기서 지내면서 햇빛 한 번 안 받았을 거라 생각했니. 그럼 지금까지 계속 집에 커튼 치고 있었던 게 나 때문인가? 동우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빨리 걷으라 했지만 호원은 여전히 뻘쭘한 표정이다. 얘는 생긴 건 되게 남자답게 생겼으면서 은근히 소심하네. 애기세요? 동우의 재촉 아닌 재촉에 호원은 껄끄러운 표정으로 창문에 다가가 조금씩 조금씩 커튼을 열었다. 바닥에 들어온 조각빛은 하얬다. 동우는 냉큼 빛이 들어온 곳으로 달려가 제 발을 뉘였다. 뭐 해요?
"그냥, 따듯하잖아. 너도 죽어보면 알 거야."
저건 농담인지 진담인지. 호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커튼을 확 걷었다. 순간 눈이 부셨다. 호원이 순간적으로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햇빛에 비친 동우는 평소보다 더 투명한 것 같았다. 햇빛을 만끽하며 한가로이 하품을 하는데 붉은 입술 아래 슬쩍슬쩍 보이는 이가 유난히 희다. 햇빛 때문인가. 호원도 가만히 눈을 감고 느긋하게 빛을 즐겼다. 몸을 쓰다듬는 해의 손길은 다정하고 아련하다.
몇 분쯤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호원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피부에 닿는 서늘한 공기. 동우도 눈을 떴다. 호원은 창문을 열고선 방을 나섰다. 어디 가?
"부엌이요. 밥은 먹어야지."
음, 그렇구나. 동우는 호원의 말에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뒹굴거리다 이내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호원은 이것저것 재료를 꺼내 씻고 있었다. 오이. 당근. 호박. 양파. 대파. 그리고 된장과 멸치. 쌈장. 두부. 계란. 딱 봐도 혼자 사는 남자의 아침이라 하기엔 휘황찬란한 재료수다. 호원아 뭐 하려고?
"된장찌개랑 계란말이요. 오이랑 당근은 생으로 쌈장이랑 찍어 먹고."
"요리 잘하나 보네. 어, 그런데 너 내가 온 거 어떻게 알았어?"
"음…. 갑자기 등 뒤가 서늘하더라고요. 그래서 형 온 줄 알았지."
우왓, 형이래! 동우는 호원에게서 처음 듣는 형이란 말에 방방 뛰고 있는 반면에 호원은 제가 뭐라 말한지도 모른 채 재료 다듬기에 열중이었다. 통통통, 도마와 칼의 중창 소리가 경쾌하다. 동우는 가만히 그런 호원을 바라본다. 동그란 머리통에 미끈한 목 선. 목의 선과 이어진 딱 벌어진 넓은 어깨. 걷은 소매 아래 보이는 팔뚝은 언뜻언뜻 핏줄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남자다운 팔뚝과는 다르게 또 가는 손목. 그리고 작은 손. 그렇지만 손에 비해 손가락이 길고 손끝이 단정하다. 손 마디는 또 남자답게 슬쩍 불거져 있고. 녀석, 잘생겼네. 전체적으로 몸의 선이 멋진 남자였다. 우락부락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근육이 그의 남자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이 녀석. 인기 많겠네.
"호원아."
"왜요?"
"너는 여자친구 없어?"
칼질이 멈춘다. 호원은 냄비 뚜껑을 열어 멸치 육수가 잘 끓고 있나 확인한 후 다시 덮었다. 그리고는 꺼낸 계란을 휘휘 풀고는 소금도 솔솔 뿌렸다. 쫑쫑쫑 당근도 넣고 파도 넣었다.
"없어요."
"그래? 의외네. 난 호원이 잘생겨서 인기 많을 줄로만 알았는데."
넙적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다. 기름은 처음 교실에 들어온 신입생처럼 쭈뼛쭈뼛대다 이내 곧 프라이팬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호원은 푼 계란을 프라이팬 위에 부었다. 치이익. 맛있는 소리와 맛있는 냄새가 부엌에 가득하다. 보글보글 육수 끓는 소리. 치이익 계란 익는 소리. 슥슥 오이 껍질 깎는 소리. 탕탕탕 당근 써는 소리. 일상적이며 다채로운 소리, 이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동우는 눈을 감았다. 흐릿한 추억이 머릿속에서 하나 둘 떠오른다. 시장에서 싸게 샀다며 자랑하던 취나물의 향내가 코끝에 머무는 듯하다. 당신을 위해 준비했다던 그 다정한 어투.제가 다 할 테니 그냥 가만히 방에 앉아 있으라던 목소리. 모든 게 다 그 사람과 관련된 기억이다. 그런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슬프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 모태 솔로라구요."
"모태 솔로? 그게 뭐야?"
"엄마 뱃속에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사귀어 본 적 없단 얘기예요. 안 그래도 서러운데 자꾸 이런 얘기 하기예요?"
서럽다며 툴툴대는 말투와는 다르게 목소리는 살갑다. 22살이라 했었나. 풋풋하고 귀여운 행동에 동우가 웃었다. 호원은 뒤에서 동우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웃지 말라며 타박했지만 동우에게는 그마저도 귀여웠다. 호원이 냄비에서 멸치를 꺼내고 된장을 휘 풀었다. 부엌에는 구수한 된장 냄새가 가득 피어올랐다.
"나 때만 해도 22살이면 이미 장가가고도 남을 나이었는데."
"지금 시대는 22살이면 한참 친구들이랑 놀고 여자친구 사귈 나이에요. 장가는 뭐, 서른쯤 되면 가려나."
"신기하네…."
긴 시간동안 홀로 살아왔다지만 이 곳을 벗어날 수 없어 직접 시대의 변화를 겪지 못한 동우에겐 이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가끔씩 들어오는 입주자들에게서 세월의 흐름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렇게 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 집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지면 동우는 항상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대는 저 높은 건물도, 개미처럼 쉴 새 없이 기어가는 자동차도.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친구와 함께 웃으며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바쁘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저 혼자만 멈춘 채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꼭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누굴까.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당신은… 대체 누구신가요.
호원은 계란말이를 썰어 접시에 길게 담았다. 선명한 노란색이 꼭 개나리를 보는 것 같다. 오오. 동우가 감탄사를 내뱉자 호원은 어깨를 으쓱 하며 웃는다. 이 정도면 만점 신랑감이죠. 텁텁 두부가 썰린다. 네모반듯하게 썰린 두부는 된장국의 품에 안긴다. 보글보글. 곧 썰어 놓은 호박과 양파도 파도 국의 넉넉한 품에 가득 안긴다. 호원은 찬장에서 작은 접시를 꺼내 쌈장을 덜고 오이와 당근을 담은 접시와 함께 식탁에 내온다. 빨간색, 초록색, 노랑색, 주황색. 여러 색들의 향연이다. 동우가 화려한 색에 정신이 팔린 사이 호원은 된장국에 야채를 넣고 밥솥에서 밥을 덜어 식탁에 냈다. 밥그릇은 두 개였다.
"호원아, 왜 그릇이 두 개야?"
"…아. 맞다. 형은 밥 못먹죠? 잊고 있었네."
"푸흐, 바보. 마음은 감사히 받을게."
호원이 식탁에 받침대를 깔고 찌개도 놓았다. 남자 자취생의 아침으로는 근사한 식탁이었다. 왜 이렇게 밥을 적게 먹냐는 동우의 말에 호원은 원래 아침 먹을 때 밥은 많이 안 먹는다고 대꾸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는 가벼운 침묵. 보글보글 소리 대신에 달그락거리는 젓가락과 그릇의 입맞춤 소리가 식탁 위에서 춤췄다. 어설픈 젓가락질이 귀여워 동우가 살짝 웃었다. 웃으면 호원이 토라질까 봐 몰래 웃었는데도 호원은 그걸 본 것인지 웃지 말라고 또 타박했지만 그 또한 동우에게는 귀여울 뿐이었다. 밥 먹는 데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라는 말도 귀엽고 서걱서걱 오이 먹는 모습도 귀엽다. 지금까지의 입주자들이 다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어서 그런 것인가. 이상하게도 동우에게는 호원이 자꾸만 귀여웠다. 오늘은 계란말이가 특히 더 잘 됐다며 뿌듯한 표정을 짓는 게 영락없는 어린애다.
"아쉽네요."
"뭐가?"
"오늘 계란말이 되게 맛있는데. 형이 먹을 수 없어서 아쉽네요. 색깔 선명한 거 보여요?"
'장 형! 보셨습니까? 요 근방에 산수유 꽃이 잔뜩 피었습니다. 멀리서 보았는데도 색이 아주 산뜻한 것이 저곳이 별천지인가 싶더이다. 날이 조금 더 풀리면 나갑시다.'
"당근도 맛있네. 달고 아삭한 게 신선한가 봐요. 이것도 색깔 진짜 선명한 주황색이네요."
'당신에게 오는 길에 능소화를 발견했습니다. 주위에 핀 다른 꽃은 안중에 들지도 않고 그 꽃만 눈에 띄더이다. 주홍빛이 어찌나 또렷하던지요 . 색이 참 선명하지요?'
"그러게. 색 되게 예쁘다. 안 먹어봐도 알겠는걸."
"형 진짜 안타까운 줄 아세요. 제가 얼마나 요리를 잘 하는데요."
"그것도 안 먹어봐도 알겠네."
호원은 몇 번 더 동우에게 자랑하다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아까처럼 다시 찾아온 가벼운 침묵. 그러나 그 침묵의 무게는, 분명히 아까와는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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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재미도 없는데 업데이트마저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래서 밤 새서 열심히 적어서 올리니까 봐주세요. 지금 시간이 새벽 4시 50분이네요. 음 김새벽 제 닉네임답네요. 주말 새벽마다 이렇게 될까봐 두려워지네욬ㅋㅋ큐ㅜㅠㅜㅠㅜㅠ 워낙 글쓰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지라ㅠㅠㅜㅠㅠㅜ 저번화도 그렇듯 이번화도 지루하고 재미 없네요.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그저 감사할 뿐! BGM : 마이너 왈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