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닮은 너에게
03. I'm fine thank you, and you?
분명 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을 챙겨 나왔는데 오늘 하루는 거짓말처럼 화창했고, 세 시간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던 자막 작업은 네 시간을 훌쩍 넘긴 후에야 끝이 났다. 마감 시간이 늦어져 또 한 소리 듣겠거니 하던 내 걱정과는 달리 메인 피디님께서는 수고 많았다며 오히려 편집팀에 커피를 돌리셨고, 무엇보다 저녁 약속을 잊었을 줄 알았던 황 작가님은 다섯 시가 되자 오늘 약속 잊지 말라며 귀신같이 전화를 걸어왔다. 나의 예상대로 일어나는 일이 정말 단 하나도 없는 이상한 날이었다.
“여보세요?”
[우리 오늘 저녁 같이 먹기로 했던 것 같은데, 맞죠?]
“안 그래도 제가 연락 드리려고 했는데, 안 까먹으셨네요.”
[제가 먼저 밥 한 끼 사달라고 했는데 까먹으면 안 되죠. 제가 방송국 앞으로 갈까요? 아무래도 피디님보다는 제가 더 자유로우니까.]
“뭐 굳이...”
[갈게요, 그리로. 여섯 시쯤이면 충분해요?]
“네, 뭐. 그럼 이따 봬요.”
자꾸만 빗나가는 수많은 예측 가운데에는 내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는 한 사람, 황민현이 서 있었다.
“피디님!”
“아, 네. 안녕하세요.”
“거기서 뭐 하세요. 얼른 안 타시고.”
“아, 네.”
“피디님 원래 말수가 이렇게 없으셨나.”
“네?”
“그날은 말씀 잘하시던데. 막 눈도 깜짝 안 하시고.”
“미팅 날은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그 일을 대체 언제까지 언급하시려고... 그래서 지금 밥 사러 가는 길이잖아요.”
“그래, 이렇게라도 말 좀 해요. 짜증을 내든 화를 내든 좋으니 가만히만 있지 말고.”
사석에서 만난 황 작가는 방송국에서 봤을 때 보다 훨씬 더 밝고, 활발한 사람이었다. 어떤 것이 이 사람의 본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알 필요도 없었다. 깊게 알고 지낼 사이도 아니고, 그러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으므로. 낯선 사람의 자동차 조수석에 조용히 앉아 눈치를 살피고 있자니, 차 안을 가득 채운 답답한 공기에 숨통이 막혀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에게 지금 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꿀 의무는 없었지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질 것 같아 가까스로 입을 뗐다.
“일식 좋아하시나 봐요.”
“피디님이 좋아하신다길래.”
“제가 사기로 한 건데, 왜 제가 좋아하는 걸 먹어요. 작가님이 드시고 싶은 거 먹어야지.”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서 밥 핑계로 연주 피디님 시간 빼앗은 건데, 음식이라도 피디님한테 맞춰야죠.”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나와 나눈 대화라고는 내가 그의 소설을 비판한 것밖에 없는데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가면서까지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대체 무엇인지, 나야말로 먼저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당황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아 대충 얼버무리며 상황을 모면한 것도 잠시,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네비게이션의 딱딱한 음성과 함께 황 작가의 차가 일식집 주차장 앞에서 멈추었다. 내가 사는 거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러 왔다는 말도 안 되는 배려를 보이면서, 금액도 내가 계산할 거라는 사실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은 모양인지. 황 작가가 손수 골라 도착한 이곳은, 대충 건물의 외관만 쳐다봐도 보통 비싼 일식집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곳이었다. 오늘 저녁 한 끼에 월급에 몇 퍼센트를 써야 할지를 계산하고 있는데, 발렛을 맡기고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 옆으로 와 들어가자는 손짓을 하는 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도 염치는 있는 사람이에요. 오늘 저녁 내가 사는 거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고요.”
나름 포커페이스에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데, 자존심 한 번 제대로 구겼다. 그렇다고 거절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나는 일개 방송 피디일 뿐이고,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저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작가 중 한 명이니, 뭐 시간까지 빼앗긴 주제에 돈까지 뜯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네. 물어보세요.”
식사를 주문한 이후 다시금 정적이 우리를 휘감으려는 기운이 밀려오자, 잠시 나의 눈치를 살피던 황 작가가 마침내 입을 뗐다.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이었다.
Various Artists - Timeless Slow
“사전미팅 날 말이에요, 피디님께서 제 소설이 뻔하다고 말씀하신 날이요.”
“아... 그때는 죄송했어요. 제가 너무 무례했죠.”
“아니 전혀요. 그거 말고 다른 게 궁금하던데, 저는.”
“...뭐가요?”
“사랑 안 믿으신다면서요. 왜 안 믿으시는지가 궁금해서. 저는 사랑지상주의자거든요. 전적으로 믿어요. 사랑을.”
사랑지상주의자라. 그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싫어한다기보다는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사랑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 존재한다면, 지금 내 인생이 이 모양일 리 없다.
“일이 좀 있었어요. 개인적인 거라 말씀드리긴 좀 그런데, 아무튼 안 믿어요. 본 적도 없고 느껴 본 적도 없거든요. 직접 겪은 게 아니면 잘 안 믿는 성격이라.”
“왜 느껴본 적이 없어요. 연애경험 있으시다면서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내가 이 사람에게 연애경험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없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기억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나의 연애경험을 먼저 이야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연애경험이라는 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악질의 기억일 때는 더더욱.
“아... 죄송해요. 사실 미팅 날 사랑을 믿지 않는 분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다른 피디님께 여쭤봤거든요. 막내 피디님 정말 사랑 같은 거 모르는 분이냐고.”
그럼 그렇지. 이번에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남의 인생에 관심이 너무 많은 것. 하긴, 사랑지상주의자라면 정말 궁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모든 일의 만병통치약이라 믿는 사랑의 존재를 내가 간단히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응어리지는 것이 느껴졌다.
“연애경험은 있죠. 그래 봤자 한 번이지만. 연애를 했다고 해서 사랑을 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제가 했던 그 연애에는 사랑이 없었거든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될까요? 실례가 된다면 대답 안 해주셔ㄷ...”
“그냥 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저도 그 사람한테 마음을 쏟아붓지 않았었고.”
거짓말. 전부 거짓말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랑이라는 것을 믿어보려 노력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 연애를 좋지 않게 기억하는 것도 전부 이 때문이겠지. 사랑을 믿지 않던 내가 속는 셈 치고 시작한 연애의 끝은 결코 좋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게 있을 리 없다는 나의 믿음을 확인받는 순간이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생긴 사랑에 대한 거부반응은, 나를 떠난 그 사람 덕에 더욱 견고해졌다.
“나를 사랑한 게 아니었어요. 내 몸을 사랑했던 거지. 다들 마찬가지겠죠. 그래서 안 믿어요. 방송국 밖에서는 처음 뵙는 건데 어쩌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괜찮아요. 저도 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나쁜 연애담 되게 많이 들었거든요.”
황 작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 나 자신에게 유감을 표하는 말이었다. 나를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저 사람에게 나는 무얼 바라 나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가.
“그럼 전 애인 분 때문에 사랑을 믿지 않게 된 거네요? 그분이 준 상처 때문에?”
“그런 셈 치죠.”
“주제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네?”
“그냥 사고였다고요. 흔하디흔한 교통사고처럼, 피디님께 들이닥친 사고였다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멋대로 평가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인생과 내 가치관을 자기 방식대로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언짢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상한 호기심 같은 게 들었던 것 같다. 사고라니. 그건 결코 사고가 아니었는데. 흔하디흔한 교통사고와 같은 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사고라뇨?”
“왜, 운전하다 보면 그런 사람들 꼭 한 명씩 있잖아요. 괜히 술 마시고 운전대를 잡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아니면 졸음운전을 하다 앞차를 들입다 박아버리는 사람.”
“그렇죠. 그게 왜요?”
“그냥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해서요. 피디님께서는 멀쩡히 운전을 하고 있던 건데, 이상한 운전자가 피디님을 들이받은 거예요.”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제가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한 사람 때문에 사랑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셨으면 한다고요. 운전을 하다 보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이상한 사람들이 보이지만,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운전을 포기하기엔 차가 주는 편리함이 너무 크니까. 그리고 세상에는 나쁜 운전자보다 좋은 운전자가 더 많거든요”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작가는 대체 사랑에 대해 뭘 그렇게나 많이 알고 있길래 나에게 이런 설교를 퍼붓고 있는 걸까. 생각하기도 싫은 최악의 연애를 떠올리며 응어리지기 시작한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누구를 위한 분노일까. 저 작가라는 사람을 향한 것일까, 혹은 나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 그 사람을 향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사랑이 있다는 걸 머리로는 다 알면서도 다시 상처받을까 두려워 애써 그것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는 나의 치졸한 이면을 향한 것일까.
“황 작가님.”
“네.”
“그런데요, 이렇게 생각해보시면 어때요?”
“어떻게요?”
“교통사고가 한 번 나고, 또 나고, 그 사고로 인해 누군가 죽기까지 하면요,”
“......”
“다시는 운전 같은 거 하지 않게 될지도 몰라요.”
“......”
“운전대를 잡는 게 겁이 나서, 또 누군가 나를 들이받을 것이 무서워서,”
“......”
“어쩌면 도로로 걸어 나오는 것조차 힘들어질지 모른다고요.”
자신이 멋들어지게 꺼내놓은 비유에 숨어있던 오류를 들켜 부끄러웠던 것일까. 황 작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테이블에 놓인 물잔을 만지작거리며 얼빠진 눈으로 식어가는 커피를 바라보고 있을 뿐.
“작가님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상처라는 게 한 번 생겨버리ㅁ...”
“그럴 수도 있겠네요.”
“...네?”
“제 생각이 짧았어요. 피디님의 상처를 함부로 판단해서 미안합니다.”
일단 사과를 받아내긴 했는데,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비관적으로 말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내 생각에 먼저 반기를 든 게 누군데. 끝내 내가 미안한 마음을 가질 이유는 찾지 못했지만 괜히 마음이 쓰였다. 초점 없는 두 눈동자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이윽고 음식이 나왔고, 서빙을 마친 식당 직원이 주방으로 유유히 사라지자 어딘가 불편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 일식집의 단골일 줄 알았던 황 작가는 이상하리만큼 음식을 적게 먹었다. 내가 내뱉은 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자신이 직접 운전해 도착한 일식집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정말이지, 오늘은 나의 예상대로 일어나는 일이 정말 단 하나도 없는 이상한 날이었다.
난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지 알아
그러니 상처받았다고 마음 꼭 닫지 말고 활짝 웃으렴
난 네가 사랑받고 살았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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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화에서는 민현이의 이야기가 다뤄집니다!
오늘따라 기다리기 힘들어서 일찍 올렸어요:)